-상표권 무단도용에서 기회 발견
-고발 대신 협업 통해 의류·화장품 등 이색 제품 출시
‘잊힌 밀가루 기업에서 핫 브랜드로’…‘곰표’ 대한제분의 마케팅 혁신 스토리

[한경비즈니스=김정우 기자] 2017년 말 대한제분의 한 직원이 인터넷 쇼핑몰 사이트를 검색하다가 특이한 상품을 발견했다. 큰 사이즈 옷을 디자인해 판매하며 젊은 층에게 높은 인지도를 쌓은 ‘4XR’이라는 의류 브랜드에서 자사의 밀가루 브랜드 ‘곰표’를 정중앙에 새긴 긴소매 티셔츠를 제작해 판매하고 있었던 것이다.

직원은 즉시 “우리 브랜드 상표가 무단으로 도용된 것 같다”며 이 사실을 회사에 알렸다. 제보를 받은 대한제분 담당자는 해당 제품을 직접 찾아보기로 했다. 곰표 브랜드가 고스란히 박힌 제품을 실제로 목격했는데 왠지 ‘무단 도용’의 심각성보다 ‘신선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급기야 “이런 방식으로 브랜드 마케팅을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상사에게 제안했다.

패딩·치약·샴푸 등 곰표 브랜드를 활용한 상품을 잇달아 출시하며 이종 업종 간의 ‘협업(컬래버레이션)’ 열풍을 불러일으킨 주인공으로 주목받고 있는 대한제분의 ‘마케팅 혁신’은 이렇게 시작됐다.

자칫 ‘악연’으로 번질 수 있었던 사건에서 새로운 기회를 발견하며 이를 ‘인연’으로 만든 것이 예상하지 못한 성과를 안겨 줬다는 설명이다.

◆곰표 브랜드 잊힐까 위기감


무단 도용 문제를 한참 고민하던 대한제분은 결국 2018년 3월께 4XR 측에 연락해 직접 만나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양 사의 미팅 자리에서 대한제분은 ‘항의’ 대신 ‘협업’ 의사를 전달하며 손을 내밀었다. 4XR 역시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렇게 지난해 7월 대한제분이 곰표 브랜드를 활용한 첫째 협업 상품인 ‘티셔츠’가 출시됐다.

물론 단순한 신선함이 티셔츠 협업 제품 출시로까지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4XR 측에 협업을 제안했을 당시 대한제분은 큰 고민에 빠져 있었다. 바로 대중에게 잊혀 간다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사실 대한제분은 그동안 브랜드 마케팅에 소극적인 자세를 취해 왔다. 이유는 간단했다. 마케팅이 따로 필요하지 않은 사업 구조를 갖고 있어서였다.

대한제분의 밀가루 매출액은 연간 약 3000억원. 이 중 대부분이 기업 간 거래(B2B)에서 나왔다. 일반 소비자들은 대상으로 한 매출 규모는 약 100억원에 불과하다.

웬만한 규모를 갖춘 기업에서 흔히 찾아 볼 수 있는 브랜드 마케팅 담당자나 팀도 따로 존재하지 않다가 2017년 말 뒤늦게 위기감을 느껴 이를 구성한 상태였다.

브랜드 마케팅팀을 구성한 뒤 대한제분은 현시점에서 정확한 브랜드 인지도를 파악하기 위해 시장 조사 기관 ‘엠브레인’에 직접 조사를 의뢰했는데 결과는 내부를 충격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20~39세 소비자를 대상으로 ‘밀가루 하면 떠오르는 브랜드’를 묻자 곰표라고 답한 응답자는 5명 중 1명에 불과했던 것이다.

한때 ‘밀가루는 곰표’라는 공식까지 생길 정도로 업계에서 인지도가 높았지만 젊은 소비자들에게는 더 이상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조사에서 드러난 셈이다.

대한제분 관계자는 “20~30대 소비자가 곰표를 모른다면 대한제분의 가장 큰 고객인 제과·제빵 기업도 향후 곰표 대신 다른 브랜드를 선택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며 “브랜드 재활성화를 찾던 도중 협업 제품 출시라는 키워드가 눈에 들어왔고 4XR에 제안을 건넸다”고 설명했다.

4XR의 브랜드 정체성도 협업 진행을 결정하는데 한몫했다는 설명이다. 큰 옷을 전문적으로 만드는 브랜드인 만큼 곰과 정체성이 일치하는 측면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티셔츠는 예상을 뛰어넘는 ‘흥행’을 기록하며 팔려 나갔고 대한제분이 본격적으로 마케팅 혁신에 열을 올리는 계기로 작용했다.

◆젊은 층에게 친숙한 브랜드로 부활


탄력을 받은 대한제품은 밀가루 브랜드 ‘곰표’를 활용한 새 제품을 내놓기로 결정했다. 여러 상품들을 물색하다가 내부적으로 밀가루의 하얀 이미지와 어울리는 파운데이션을 협업 제품으로 만들자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여러 업체들을 찾다가 화장품 제조 업체인 스와니코코가 눈에 들어왔다. 천연 원료로 화장품을 만드는 스와니코코의 이미지가 곰표와 어울릴 것이라고 판단했다. 게다가 젊은 층에게 인기도 높았다. 그렇게 ‘곰표 밀가루 쿠션’이 지난해 10월 탄생하며 업계에 신선한 충격을 일으켰다.
‘잊힌 밀가루 기업에서 핫 브랜드로’…‘곰표’ 대한제분의 마케팅 혁신 스토리
또 자체적으로 ‘굿즈 상품’을 판매하는 온라인 사이트도 구축하며 더욱 브랜드 가치 제고에 박차를 가했다.

그 결과 올해 들어 대한제분이 굳이 다른 기업들을 찾아 협업을 제안하지 않아도 ‘러브콜’이 쇄도할 정도로 곰표 브랜드의 인기가 치솟았다.

올해 5월부터 CU 편의점에서 판매 중인 ‘곰표 오리지널 팝콘’과 11월 애경산업과 협업해 출시한 ‘곰표 2080 치약’도 모두 해당 기업에서 먼저 제안해 협업이 이뤄졌다.
‘잊힌 밀가루 기업에서 핫 브랜드로’…‘곰표’ 대한제분의 마케팅 혁신 스토리
특히 밀가루 형태로 만들어진 곰표 오리지널 팝콘은 브랜드를 알리는 데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CU에 따르면 현재 매달 6만 개 이상의 제품이 팔려 나가며 인기몰이 중이다. 또 최근에는 다시 한 번 4XR과 협업해 패딩 제품을 출시했는데 실시간 검색어 상단을 차지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잊힌 밀가루 기업에서 핫 브랜드로’…‘곰표’ 대한제분의 마케팅 혁신 스토리
대한제분 관계자는 “곰표 브랜드를 빌려주는 방식으로 계약이 진행돼 해당 제품이 많이 팔린다고 해서 수익이 나는 것은 아니지만 협업의 목적인 브랜드 가치 제고 차원에서 보면 만족스럽다”며 “각종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에 협업으로 출시한 제품 인증 사진들이 수없이 올라오는 등 현재 상황을 놓고 보면 젊은 층에게 생소했던 곰표 브랜드를 어느 정도 각인시키는 데 성과를 거둔 것으로 분석된다”고 말했다.

향후에도 대한제분은 다양한 기업들과 협업 제품 출시를 이어 갈 예정이다. 우선 내년 초 애경과 함께 휴대용 치약과 칫솔 세트를 함께 내놓기로 합의했다.

여러 기업들에서 협업 문의가 이어지는 가운데 브랜드 이미지와 발매 효과 등을 고려해 최종적으로 제품 출시를 결정할 방침이다.

enyou@hankyung.com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53호(2019.12.02 ~ 2019.12.08)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