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 사라지고 폭력·모욕만 난무하는 대학 신입생 신고식}
[김진국의 심리학 카페] ‘통과의례’를 거치지 못한 세대의 불행
[김진국 문화평론가 겸 융합심리학연구소장] 1980년대 중반에 대학을 다녔다. 유수의 일간지 기자가 되겠다는 비전을 갖고 있던 필자는 입학해 대학신문의 학생 기자가 됐다.

세상을 향해 올곧은 주장을 펼치겠다는 정론직필(正論直筆)의 꿈이 산산조각이 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편집국장·취재부장·부장·기자·수습기자·수습기자보로 이어지는 층층시하의 위계질서에 숨도 쉬기 어려웠다.

같은 학번 친구들이 야유회를 가고 미팅을 하던 호시절에 선배들의 커피나 담배 심부름, 식사 주문, 편집실 청소 등 허드렛일로 소일했다.

◆소주와 담배가 상징하는 ‘어른성’

수많은 과제와 실리지도 않을 기사의 마감에 기진맥진했다.

200자 원고지에 만년필로 정성들여 쓴 기사는 선배의 빨간 사인펜에 벌겋게 교열을 당한 채 취재부장의 책상 위에 수북이 쌓여 있다가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기 일쑤였다.

심지어 이런저런 트집을 잡혀 선배들에게 몽둥이찜질을 받는 일도 있었다. 운동부 학생도 아니고 학생 기자인 데도 말이다. “아무리 군사정권 시절이라지만, 아직도 이런 시대착오적인 집단이 존재하다니?” 한숨부터 나왔다.

어느 날 저녁 편집국장의 비상소집령이 떨어졌다. 영문도 모르는 우리 동기 10여 명은 편집실에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국장 책상 위에는 수십 병의 소주가 놓여 있었다. 이른바 신고식이었다. 몇 달 간의 고난을 거쳐 이제 정식으로 대학신문사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것인지 여부는 여기서 판가름 난다.

원고지 위에 쓴 기사로서가 아니라 소주 한 병을 한입에 털어 넣어야 한다. 마셔본 사람은 안다. 빈속에 소주 한 병을 ‘원 샷’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그것도 의도적으로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가냘픈 몸매의 여자 선배가 소주 두 병을 깔끔하게 털어 넣는 시범을 보이고 난 뒤다.

“소주 한 병도 제대로 못 마시면서 무슨 정론직필이냐?”며 욕설과 고함과 야유가 뒤범벅이 된 공포 분위기 속에서 임무를 완수하면 국장이 고생했다면서 담배 두 개비와 오징어 다리를 두 개 준다.

여기서 술과 담배는 갓 대학에 들어온 신입생 앞에 펼쳐질 어른들의 세계를 상징하는 것이다. 한사람씩 차례로 나갔다가 제자리에 돌아오면 또다시 시작되는 고함과 욕설과 야유…. 물론 소주 두 병 혹은 세 병을 그 자리에서 해치우는 친구도 있었지만 병원 응급실로 실려 나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때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간 친구들은 다시는 편집실에서 볼 수 없었다.

지금은 왜 그랬을까 싶지만 당시는 정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거역하기 힘든 뭔가가 있었다. 특히 신고식이라는 의례를 집전하는 사제(司祭)의 역할을 한 선배들은 매우 진지했고 비록 욕설과 야유가 쏟아지긴 했지만 일정한 선을 결코 넘지 않았다.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보도되는 국내외 대학에서의 부작용 있는 저열한 신고식 행태와는 격이 달랐다. 필자는 인생의 반을 이 과정에서 배웠다고 단언한다.

이것이 인류학에서 말하는 전형적인 통과의례(rite of passage)의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세월이 좀 흐르고 난 뒤였다. 신화학자인 조지프 캠벨은 호주 원주민의 사례를 들어 통과의례를 설명한 적이 있다.

호주 원주민들의 아이가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건장한 남자들이 이 아이에게 쳐들어간다. 이들은 몸에다 피를 칠하고 거기에 깃털을 붙였다. 남자들은 막무가내로 이 아이를 데리고 가버린다.

어머니는 더 이상 아이의 보호자가 되지 못한다. 전혀 다른 삶의 마당에 이르렀다. 남자들은 이 아이를 남자들만의 성소로 데려간다. 아이는 여기에서 시련을 당한다. 할례를 당한다든가, 몸의 한 부분에 상처를 입는다.

의례가 진행될 동안 연장자는 아이에게 위대한 신화의 신화적인 에피소드를 통해 사회생활의 규정을 가르친다. 물론 부족의 신화도 배운다. 의례가 끝나면 어른이 된 아이는 집에 돌아온다. 집에서는 부모들이 골라 놓은 배필이 기다린다. 아이는 비로소 어른이 된 것이다.

인류학자 아널드 반 제넵에 따르면 필자가 학생 기자 시절 받은 신고식이나 호주의 아이가 받은 성인식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구조다. 먼저 과거의 상태에서 ‘격리(separation)’되는 단계에서 고난과 역경을 통해 새로운 힘과 지위를 부여받는 ‘과도기(transition)’를 지나면 새로운 공동체의 일원으로 ‘통합(incorporation)’되는 것이다.

우리는 봉쇄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편집실에 격리돼 강제로 술을 마시고 야유를 받는 고난의 과도기를 거치면서 정식 기자 멤버로 통합됐다. 성소로 끌려가(격리) 고난을 받다가(과도기) 정식으로 성인 대우를 받는(통합) 호주 원주민 아이처럼 말이다.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들의 신고식인 면신례(免新禮)나 영국 옥스퍼드대의 학생들이 받는 신고식이나 오늘날 한국의 대학 신입생들이 받는 신고식도 사실은 본질적으로 같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통과의례의 신화적 의미와 심리학적 상징을 잘 모르는 이들이 ‘고난’을 과도하게 해석하거나 잘못 해석해 인격 모독적인 행태를 보인다든지 심지어 죽음에 이르는 안타까운 일도 일어난다. 혹은 아예 ‘고난’에 해당하는 과정을 생략해 버리기도 한다.

◆‘고난’을 통해 성숙한 존재로 변모

“우리는 요즘 신고식 세게 안 해요. 하더라도 사제지간에 둘러앉아 그냥 간단히 몇 잔 하면서 훈훈한 분위기에서 담소를 나누죠!” 모 대학 교수의 이런 발언은 매우 신사적인 것처럼 들리지만 통과의례의 상징성에 무지한 발언이다. 그건 통과의례가 아니고 단순한 신입생 환영 파티일 뿐이다.

조지프 캠벨은 이렇게 말한다. “일상성의 세계에서 완전히 몰아내 우리를 늘 있었던 자리로 감싸 들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밖으로 내던지는 데 있다는 것을 잊은 거지요!”

‘제대로 된’ 통과의례를 경험해 보지 못하고 쉽게 쉽게 관문을 통과한 이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외부 세계로 나아가 고난을 겪어 보고 이전과 다른 성숙한 존재로 변모하지 못한 세대…. 그들은 영원히 미성숙한 ‘어른아이(adult child)’일 뿐이다.

대학원 박사과정에 들어가서도, 심지어 취직하고 결혼하고서도 엄마의 코치를 받는 마마보이가 많은 것도 제대로 된 통과의례를 거치지 못한 세대의 불행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