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훈 산업연구원 원장] ‘벤치마킹(benchmarking)’이라는 말처럼 우리에게 혼란을 주는 용어가 있을까 싶다. 기실 우리말로는 결국 ‘따라 하기’인 셈인데 벤치마킹이라고 쓰면 어딘지 모르게 ‘고급스럽게 따라 하려고 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새로운 산업을 창출해 내는 이른바 ‘산업 생태계’의 벤치마킹 대상은 역시 실리콘밸리다.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실리콘밸리를 따라 하려고 갖은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은 익히 잘 알려져 있다.

실리콘밸리에서 발달한 엔젤 투자가, 액셀러레이터, 벤처캐피털을 만들어 내고자 하는 노력은 세계 곳곳에서 이뤄지고 있다. 부러워하면서도 잘 따라 하지 못하는 대상으로는 스탠퍼드대·버클리대와 같이 끊임없이 좋은 인재를 배출하는 대학들과 구글·애플·페이스북 등과 같이 세상을 이끌어 가는 창의적 거대 기업들이 있다.

이들의 명성에 걸맞은 수준의 대학이나 기업들을 만들어 내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이들은 눈에 잘 띄니까 각국에서 좋은 대학을 지원하고 좋은 기업들을 유치하려는 노력들이 추진되고 있다.
연·기금의 위험 투자없이 실리콘밸리는 없다
그래서 이곳의 인재들을 데려가려는 각국의 전쟁도 볼 만하다. 그중에서 중국이 가장 적극적이다 못해 공격적이라는 점도 잘 알려져 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하고 있듯이 실리콘밸리의 좋은 날씨를 제외한다면 이 모든 것들을 어느 정도는 벤치마킹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나라가 많은 것 같다. 한국도 포함되는 것은 물론이다.

여기서 오늘의 실리콘밸리가 왜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나게 됐는지, 그 가장 기초가 되는 출발점을 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선 이미 초창기 정보기술(IT) 기업으로 IBM이 터를 잡은 미국 동부가 아니라 서부의 캘리포니아를 휴렛팩커드·인텔 등 당시 스타트업들이 선택한 근본적인 이유는 캘리포니아법의 유연성을 들 수 있다.

‘기존에 일하던 회사에서 나온 엔지니어들이 그곳에서 습득한 기술을 가지고 사업을 시작하는 것을 허용한다’는 점이 캘리포니아법이 가진 가장 중요한 유연성 요소였다는 것이다.

과연 이 점을 우리가 따라 할 수 있을까. 한국에서 대기업의 임직원들이 이러한 스핀오프를 자유롭게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심지어 한국에서는 이러한 행위를 기술 유출, 기업 비밀 도용 등으로 간주하기까지 하니까 말이다.

그런데 요즈음 한국의 대표적 IT 기업들에서 일하던 엔지니어들이 중국의 IT 기업들에 스카우트돼 일하고 있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이제 한국도 이런 방식의 스핀오프에 더욱 관대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의 대기업들에서 일하는 뛰어난 인재들에게서 나올 수 있는 좋은 아이디어들 중에서 기업 내의 의사 결정 과정에서 사장돼 버리지 않고 비즈니스로 현실화되고 있는 비율이 어느 정도일지 궁금해진다.

다음으로 1970년대 말 그 당시 전국적으로 형성돼 있던 연·기금(pension fund)들로 하여금 매우 위험도가 높은 새로운 사업에 투자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법이 캘리포니아에서 통과된 점도 매우 중요한 요소로 알려져 있다. 연·기금은 수많은 연금 저축자들의 돈을 모아 좀 더 수익이 나는 곳에 투자하는 것이 그들의 비즈니스다.

수많은 개미들의 돈을 모은 것이기에 공공성이 강조돼 섣불리 위험도가 높은 곳에는 투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그런데 캘리포니아법은 여기서 유연성을 발휘했던 것이다. 그 결과 소로스펀드·타이거펀드 등의 새로운 벤처캐피털이 형성되는 기초가 됐고 실리콘밸리에 수많은 크고 작은 투자가들이 모여드는 근본 요인이 됐던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이와 비슷한 정신의 법이 통과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과연 국민연금이 새로 태어나는 스타트업에 투자하게 하는 길이 열릴 수 있을지, 많은 금융회사들이 실패할 가능성이 있는 기업들에 자금을 공여하는 것이 가능하게 될지는 정말 어려운 문제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저금리 시대에 막대한 자금을 보유하고 있는 자금원들 중에서 그 자금원의 일부라도 위험도가 높은 곳에 투자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지 못한다면 한국의 산업 생태계는 항상 투자자와 자금의 규모가 부족한 상황을 벗어나지 못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할 것이다.

선진 제도를 따라 하는 것, 즉 실리콘벨리를 벤치마킹하는 일도 그 근본정신과 그 기초 여건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면 정말 흉내만 낼 뿐 그 본질적 작동을 가능하게 하는 데까지는 미치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한국을 벤치마킹하고자 하는 수많은 개발도상국들이 아직 진정한 산업 발전의 궤도에 들어서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여서 씁쓸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