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종원 더본코리아 대표

장사’를 하는 사람들은 자식의 혼기(婚期)가 가까워지면 밥장사 일에서 슬그머니 빠진다. 다른 직원이나 친지를 사장으로 앞세우고 자신은 OO실업·OO무역 등 새로운 명함을 만들어 ‘겉치레 사업가’로 변신한다. 아직도 사회적으로 밥장사, 즉 외식업을 천시해 자식의 혼사를 막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난 사람 맛난 인생] “메뉴 떠오르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죠”
그런데 그는 휴대전화 배경화면에 ‘밥장사’라고 못 박고 다닌다. 사진을 찍자고 하니까 밥장사들이 벗어버리고 싶은 옷, 즉 조리복으로 얼른 갈아입고 나온다. 전문 조리사들도 질투가 날 정도로 조리복이 멋지게 어울리는 남자. 외식 업계의 대박 식당 제조기로 불리는 백종원(47) 더본코리아 대표의 얘기다. 요즘은 연예인 소유진의 남편이라고 이야기하면 더 빨리 “아~하!”란 반응이 나온다.


‘만석꾼’의 풍족한 가족 음식
세상 사람들은 백 대표에 대해 깜찍한 미모에 당당한 이미지를 갖춘 열다섯 살 연하의 연예인 소유진과 결혼한 인물로 관심이 많지만 외식 업계에선 ‘삼성의 이건희’에 버금가는 차세대 글로벌 외식 경영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1993년 ‘원조쌈밥집’을 오픈해 17억 원의 빚더미를 극복하고 20년이 지난 2013년 8월 말 현재 31개의 브랜드로 국내 466개점, 해외 32개점의 점포망을 구축한 인물이다. 더본코리아의 최근 3년간 매출액도 430억 원(2010년), 628억 원(2011년), 684억 원(2012년)으로 급성장 중이다.

사실 서두에 꺼낸 이야기만 들으면 백 대표를 어려운 가정에서 자수성가한 인물로 받아들이기 쉽다. 그런데 그는 충남 예산의 만석꾼 증손자로 태어났다. 할아버지가 예덕학원(예산고·예화여고)의 설립자다. 아버지는 백승탁 전 충남교육감이다. 지난해 백 대표가 예덕학원 이사장 자리에 오른 게 생뚱맞지 않은 이유다.

“어릴 적 먹던 밥상 이야기를 하면 기본적으로 뚝배기가 2개나 올라옵니다. 찌개가 두 가지란 얘기죠. 거기에 국도 따로 나오고 생선구이도 빠지지 않아요. 젓갈 세 가지에 나물 반찬도 몇 가지. 한정식 상차림과 크게 다를 게 없었어요.”
[만난 사람 맛난 인생] “메뉴 떠오르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죠”
여기에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하나 더 더한다.

“계란을 쪄 본 사람들은 알지만 삶은 계란을 반으로 갈랐을 때 흰자위가 알맞게 익고 노른자위가 반만 익은 상태의 반숙은 쉽지 않거든요. 그런데 꼭 반숙만 고집하세요. 거기에 소금도 거부하고 당신의 입맛에 맞는 양념장을 살짝 얹어 드시는 분이 바로 제 아버지입니다.” 전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까다로운 입맛을 가진 아버지다. 그 아버지의 복은 평생 그 별난 입맛을 척척 맞춰 준 어머니를 만났다는 점이라고 덧붙였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맛집 투어를 많이 하잖아요. 우리 집은 제가 초등학교 다니던 1970년대에 했어요. 주말이면 아버지가 앞장서 어머니, 두 누나, 저와 남동생을 데리고 홍성, 온양, 그도 모자라 서울까지 외식 나들이를 했죠. 물론 휴가를 갈 때도 현지의 먹을거리 탐방이 관광지 방문보다 앞섰습니다.”

아버지의 외식에 빠지지 않는 두 가지가 있었다고 한다. 그 음식을 찾아온 배경 설명과 원하는 메뉴를 마음껏 골라 먹기. 아버지의 자상하고 재미난 설명은 먹기도 전부터 군침을 흘리게 하는 조미료 역할을 했고 원하는 것을 먹게 함으로써 자존감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먹고 싶은 음식이 나뉠 때는 뿔뿔이 흩어져 먹고 다시 모이기도 했다고 한다. 미각이 예민한 아버지였지만 외식 자리에서만큼은 ‘강압에 의한 획일화나 통일’을 철저하게 배제한 분이었다는 얘기다.

그렇게 잘 먹고 잘 살던 백 대표가 오픈하는 음식점은 서민형 아니면 끼니 해결형 저가 음식점이 대부분이다. 부잣집 자식들이 흔히 문을 여는 고급 인테리어의 고가 레스토랑과는 정반대다.

“한국의 음식 값은 너무 비싸요. 도쿄에서도 샐러리맨들이 점심시간에 후딱 해치우는 규동(쇠고기덮밥)을 280엔(약 3000원)에 먹을 수 있어요. 그런데 우리나라에선 웬만한 찌개 하나에 7000원은 있어야 하잖아요.”

백 대표는 밥장사를 하면서 과한 욕심은 내지 않는다. 비싼 음식을 팔아 이문을 많이 남겨야겠다는 생각도 없다. 체인점을 왕창 펼쳐 한몫 잡아야겠다는 욕심은 더더욱 없다고 한다. 누구나 부담 없이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메뉴, 누구나 열심히 노력하면 생활비가 보장되는 음식점이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브랜드별로 차이는 있지만 제 음식점의 기본 메뉴 가격은 3000원에서 1만 원입니다. 손님들이 원하는 것은 맛도 친절도 아니더라고요. 바로 가격 대비 만족도, 즉 음식점을 나설 때 기분이 좋으면 꼭 다시 찾거든요. 체인점을 내줄 때도 본부가 큰돈을 챙길 수 있는 점포의 위치 선정이나 인테리어 공사를 맡지 않습니다. 오해의 소지를 없애 서로 신뢰를 쌓는 거죠. 프랜차이즈 업계에선 감히 엄두도 못 내는 ‘1박 2일 가맹점주 집체 교육’이 가능한 배경입니다.”


화려한 ‘나만의 음식 생활’
서울 생활은 중학교 3학년 때 아버지의 문교부 발령으로 시작됐다. 2년 뒤 아버지가 공주의 대학으로 직장을 옮기면서 4남매만 서울에 남게 됐다. 이때부터 백 대표의 화려한 ‘나만의 음식’ 생활이 펼쳐진다. 짬 나는 대로 유명 음식점을 찾아다니고 직접 요리까지 해 먹을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제 생애의 첫 창작 메뉴는 돼지고기 카레 스테이크입니다. 돼지고기를 도톰하게 썰어 카레 가루로 양념해 구운 것인데 친구들한테 요즘 말로 ‘대박’이란 소리를 들었어요. 대학 시절엔 수업을 받다 말고 친구 몇을 꾀어 차를 몰고 강원도 평창에서 두부조림을 먹고 온 적도 있습니다. 서울에 돌아오니 밤 11시. 이후 친구들은 내가 밥을 먹으러 가자고 하면 슬금슬금 피하더라고요.”

맛집을 찾아다니다 학사경고까지 받은 이야기를 듣고, 슬슬 군대 이야기로 말을 돌리니 입가에 계면쩍은 미소가 감돈다.

“학사 장교로 입대해 간부 식당 취사 인력으로 제대했다고 하면 사람들이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그런데 정말입니다. 간부 식당 관리를 맡은 부사관과 보직을 바꿔 생활했지요. 150명의 포병 병력 관리 보직을 선임 부사관에게 넘기고 ‘먹가이버 장교’로서의 기량을 마음껏 뽐내다가 나왔습니다.”

포병 장교로 병과 교육을 받던 피교육생 시절엔 콜라 캔과 신문 한 장으로 계란 하나를 삶아 동료들의 날계란 2개와 바꿔 먹는 재주를 부리기도 했다.

“간부 식당에서 일할 때 제 음식 솜씨에 감동한 부대 장군의 무한 지원이 있었습니다. 그 덕분에 유명 맛집을 찾아가 요리 비법까지 배워 가며 해보고 싶은 요리를 실컷 해보고 나왔습니다.”

‘밥하는 장교’ 시절을 신나게 자랑하는 모습이 팔불출을 연상케 할 정도다.

“제가 조리복을 입고 있지만 저는 ‘요리사 자격증이 하나도 없는 요리사’입니다. 그런데 군대에서 자격증보다 더 깊은 요리의 핵심을 배웠고 수백 명의 음식을 하더라도 두렵지 않을 정도의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간부 식당의 군 생활이 음식점 사업을 하는 데 큰 자산이 됐네요.”

제대 후 밥장사는 머릿속에 전혀 없었다. 대를 잇는 교육자의 길로 뛰어들 계획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외로 유학을 떠나거나 대기업에 취직할 생각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대신 번듯한 사업가가 돼 돈 좀 벌어야겠다는 꿈을 키우고 있었다.

“첫 사업으로 뜻이 맞는 몇몇 친구와 논현동에 사무실을 차리고 인테리어 사업을 시작했어요. 그런대로 수입이 짭짤했지요. 그렇게 잘 지내던 어느 날 근처 부동산에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어디 식당 할 만한 자리가 없느냐’고 묻다가 얼떨결에 밥장사에 들어서게 됐습니다.”

백 대표가 외식업에 뛰어든 시발점이 된 ‘원조쌈밥집’이다. 기존의 상호는 ‘대구 쌈밥 서울 분점’. 규모는 컸지만 장사는 신통해 보이지 않았다. 얼른 발뺌하려고 했다. 그러나 작자만 나서면 당장 넘기려는 주인의 기세에 눌려 단돈 50만 원으로 9000만 원짜리 가게를 계약하고 운명처럼 밥 팔기를 시작했다.

이름을 바꾸고 해물쌈장부터 음식을 하나씩 업그레이드했다. 마침내 대패삼겹살을 개발해 문 앞에 손님 줄을 만들었다. 그곳에서 번 돈으로 근처에 ‘원대포’라는 고깃집까지 냈다. 곁다리로 시작한 사업이 대박이 난 것이다.

“약간의 돈을 쥐니까 자격지심이 생기더라고요. 사회에서 인정하는 번듯한 직업도 아니고 손님들에게 굽실거리는 자신이 싫어지더군요.”

때마침 인테리어 사업에서 확장한 건축자재 수입이 잘 풀려 번듯한 사장 호칭을 들을 정도가 됐다. 원조쌈밥집과 원대포를 나 몰라라 던져두고 내친 김에 단독주택 단지를 짓는 욕심까지 부렸다. 결국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의 직격탄을 맞았다.

“이것저것 정리하고 나니 남은 건 17억 원의 빚과 쌈밥집뿐이더라고요.”

쌈밥집으로 돌아왔을 땐 ‘황금알을 낳는 거위’는 사라지고 월 몇 백만 원씩 적자를 내는 애물단지로 전락해 있었다. 하루에 3~4시간을 자며 손수 전단지까지 돌렸다. 수개월 동안 억척스럽게 생활하자 다행히 안정을 찾았다. 이어 시작한 ‘한신포차’의 성공 덕에 빚도 청산하고 현재의 사업 발판도 마련할 수 있었다. 결국 인테리어 사업 실패로 큰 어려움을 겪었지만 자신의 본업인 밥장사를 찾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됐다고 백 대표는 말한다.


소유진과 결혼 후 탄력 받는 행복 음식
이 정도면 자수성가라고 할 만한 데 그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음식업 자체로만 보면 자수성가가 분명하죠. 그런데 넉넉한 집안 환경의 뒷받침을 무시할 수는 없죠. 미식가인 아버지와 음식 솜씨가 뛰어난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유전자를 부정하지 못하죠. 그런 것들이 저의 메뉴 개발이나 스토리텔링 작업의 원천이 됐거든요.”

누나 둘이 시집가고 동생도 장가를 든 뒤론 쭉 혼자 지냈다. 그래도 백 대표는 먹는 것만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논현동 일대의 10여 개 가게에서 언제든지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해보고 싶은 음식도 바로바로 만들어 직원들과 의견을 나누며 사업 아이템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현재까지의 사업 아이템은 별난 개발 과정을 거치며 나온 게 아닙니다. 시중에 있는 아이템에서 평상시에 느꼈던 불편한 점이나 모순점을 개선한 것입니다. 짬뽕 전문점인 ‘홍콩반점0410’은 철가방표 중국집의 총천연색 메뉴를 짬뽕 단일 품목으로 밀어붙인 것에 불과합니다. 여기에 오픈 주방을 도입해 중국집의 아킬레스건인 위생에 대한 자신감을 보인 게 주효한 것이죠.”
[만난 사람 맛난 인생] “메뉴 떠오르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죠”
그래서 백 대표는 스스로도 자신의 사업 아이템이나 신메뉴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개발이 아니라 창조적 개선이라고 말하는지 모른다.

“현재 브랜드는 31개지만 알려진 건 8~9개에 불과합니다. ‘새마을식당’ 같은 브랜드를 50개까지 만들어 가는 게 제 목표입니다.”

올 초 마흔 후반의 나이에 열다섯 살 어린 소유진과 결혼했다. 상대가 워낙 미모의 어린 연예인이다 보니 이런저런 말이 많았다. 얼마 전 SBS TV 프로그램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에 출연해 특유의 소탈한 눈웃음을 곁들여 가며 군말들을 한방에 잠재우는 막강 입심을 과시했다.

“혼자 먹다가 둘이 먹으니 좋은 건 당연하지 않겠어요.”

아내의 이야기를 꺼내니 한마디만 대답하곤 슬그머니 꼬리를 내린다. 그 나이에도 쑥스러운 모양이다. 그런데도 자신이 만들어 주는 음식을 언제든지 잘 먹어줘 행복하다는 표현을 슬쩍슬쩍 내비친다. 좋긴 정말 좋은가 보다.

힐링캠프 이후 방송 출연과 CF 제의가 쇄도하고 있지만 “나대지 말라”는 아내의 한마디에 숨죽여 지낸다고 한다.

“만들어 보고 싶은 메뉴가 있으면 한밤에도 후다닥 일어나 만들어 놓고 둘이 품평회를 합니다. 그녀는 손님 입장의 평가자가 되기 때문에 저는 주로 듣기만 하죠.” 먹어보지 않아도 그 맛 참 고소할 것 같다. 신혼의 깨가 듬뿍 들어갔을 테니 말이다.

“얼마 전 아내의 생일날 처음으로 호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어요. 따라 나온 처조카가 그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라더라고요. 신혼여행 가서도 매일 길거리 음식이나 먹고 다녔더니 ‘명색이 신혼여행인데 와인이라고 한잔 마시자’고 제안해 돌아오기 전날 밤엔 와인 데이트를 했습니다.”
[만난 사람 맛난 인생] “메뉴 떠오르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죠”
고급 음식을 기피하는 이유를 물었더니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의도적인 행동”이란 답이 돌아왔다. 자신이 추구하는 중저가 음식점을 찾는 손님들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서란다. 그래서 국내외 많은 식당을 탐방하고 가는 곳마다 넘치게 메뉴를 맛봐도 음식 값 부담은 별로 안 된다고 한다.

“아이를 낳으면 아빠처럼 잘 먹는 사내를 기대하느냐”며 슬쩍 2세에 대한 질문을 던지자 대답을 지난해 물려받은 학원법인 쪽으로 노련하게 돌린다.

“음식점 경험이 학교 운영에 많은 도움이 됩니다. ‘손님이 오고 싶은 식당’처럼 ‘학생이 오고 싶은 학교’로 만들면 되지 않겠습니까.”


학교 운영도 음식점 경험이 큰 도움
이사장으로 취임한 뒤로 해외에 진출한 중국을 활용해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과 모범 교사들을 선발해 해외 연수를 보내고 있다. 학교 급식에도 한 달에 한번 ‘더본코리아 데이’로 정해 자체 31개 외식 브랜드의 인기 메뉴로 식단을 짜 학생들에게 제공한다. 교내 매점을 운영할 때도 ‘학용품 값만은 대형 마트보다 쌀 것’이라는 조건을 거는 대신 임대료를 올리지 않는 식이다. 학생과 교사는 물론 관련 사람들조차 오고 싶은 학교가 되도록 차근차근 만들어 갈 계획이다.

5년 전까지만 해도 백 대표는 자칭 미식가였다. 그런데 이번에 만났을 때 자신은 “미식가는 아니다”라고 손사래를 친다. “먹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일 뿐이고 입맛 수준도 낮고 평범하다”고 힘줘 말했다. 어디서 그런 겸손함이 나왔을까.

“2009년 식당에서 요리사나 찬모 없이도 바로 음식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백종원의 식당조리비책’이란 레시피 책을 내놓았어요. 같은 해 발간한 ‘무조건 성공하는 작은 식당’이란 단행본에도 그 내용을 일부 실었고요. 군대 시절부터 20년 넘게 쌓아 온 요리 노하우를 고스란히 밝힌 것이죠.”

‘백종원의 식당조리비책’에선 레시피에 조미료 사용을 밝혀 국내 외식 업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몰래 숨겨 쓰면서 마치 비법인 양 손님들을 속이는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주려고 했다고 말한다.

백 대표는 음식점과 관련해 두 개의 특허를 가지고 있다. 삼겹살을 동그랗게 썰어 놓는 ‘대패삼겹살’과 쌈채소를 가로로 길게 담는 ‘사각쌈판’이 그것이다. 삼겹살집을 하거나 쌈밥집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그런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흉내를 내거나 만들어 판다.

“특허 도용에 대해 제재할 생각은 없어요. 남이 쓰지 못하게 하려고 특허를 낸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혹시 다른 사람이 자신이 개발한 것이라고 우기거나 앞서 특허를 내 내 사업을 방해할까봐 ‘백종원이 개발한 것’이라는 상징적 의미에서 특허를 출원했거든요.”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은 무엇을 먹을까’부터 생각하는 사람. 점심을 먹으면서도 ‘저녁엔 뭘 먹지’를 고민하는 사람. 밥맛이 좋으면 행복해지고 아니면 입이 툭 튀어나오는 사람. 아침나절 하루 동안 먹을 메뉴가 깔끔하게 정리되면 하루 종일 기분이 좋은 사람. 갑자기 찾아오는 손님 때문에 그 계획이 흐트러지면 손님도 반갑지 않은 사람. 이 모두가 백 대표에 해당한다.

머릿속엔 온통 먹을 것밖에 없는 백 대표. 그 머릿속에 맛있게 그려진 음식들이 고스란히 식당이 되고 메뉴가 되어 세상으로 나오고 있다. 여기에 드디어 시어머니의 뛰어난 요리 솜씨까지 전수받을 음식 동반자까지 가세했다. 앞으로 어떤 브랜드의 어떤 메뉴가 등장해 ‘백 대표의 음식 세상’이 국내로 해외로 얼마만큼 더 넓게 펼쳐질지 자못 궁금하다.


유지상 음식칼럼니스트┃사진 서범세 기자 joycin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