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른 사람을 믿으면 그 사람도 나를 믿는다. 이것은 어느 정도 그런 것 같다.
상대방의 행위에 입각해 믿을 사람과 못 믿을 놈을 구별하지 않고 모두를 믿으면 그것이 행복인 것 같다.
[CEO 에세이] 조건 없는 믿음
노익상 한국리서치 대표
1947년생. 1971년 고려대 사회학과 졸업. 1973년 고려대 사회학 석사. 2002년 고려대 사회학 박사. 1978년 한국리서치 대표(현). 2007년 대한산악연맹 부회장(현).



지은 지 40년이 넘은 아파트에는 8~9층까지 가지를 뻗친 아름드리나무들이 많다. 봄에는 목련과 벚꽃이 만개하고 가을에는 단풍이 아름답다. 여름에는 그 그늘이 시원하다. 특히 여름밤, 나무들 사이 벤치에 누우면 상쾌한 기운과 함께 기분 좋은 졸음이 온다. 친구들과 저녁에 거나하게 취할 만큼 마시고 집에 들어가는 길에, 그 벤치에 가끔 누워 여름밤을 즐긴다. 그러다가 또 잠이 들었나 보다. 놀라서 손목시계를 보니 11시가 넘었다. 오늘도 아내에게서 한소리 듣겠다는 걱정이 앞선다. 그런데 갖고 다니던 작은 손가방이 없다. 벤치 주위를 둘러보니 눈에 띄지 않는다. 술집에 놓고 왔나?

다음 날 아침 6시쯤 깨었다. 여름이어서 6시라고 해도 이미 햇살이 따가울 정도다. 아파트 복도에 나가 난간에 기대 “어제 손지갑을 어떻게 했을까? 너무 일러 그 친구에게 전화하기도 그렇고 어딘가 있겠지”하고 말았다. 그런데 건장하게 생긴 50대 남자가 엄청 즐거운 표정으로 복도를 뚜벅뚜벅 걸어온다. 그의 손에 내 손가방이 들려 있다. 경비원인가? 유쾌한 목소리로 “204동 602호에 사시지요?” “아, 네.” 손가방을 건네준다. “아침에 산책하다 보니 벤치 밑에 떨어져 있더군요. 열어서 주민증을 보고 여기 사는 것 같아서”라고 한다. “아,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내가 어제 손가방을 베고 자다가 떨어뜨렸나 보다. 경비원이 아니네. 고맙다는 말밖에 못한 내가 좀 아쉬웠다. 악수라도 청할 걸….

자주 무엇을 어디에 놓고 다니는데 실은 지금까지 잃어버린 적이 거의 없다. 네팔의 높은 산에 갔다가 작은 바위 위에 카메라를 놓고 왔는데 모르는 산악인이 마을까지 가져다준 적도 있었다. 스스로 이렇게 위안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내가 다른 사람의 것을 취하고자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도 내 것을 가져가지 않는다.” 진짜 그럴까. 혹은 나 혼자 그렇게 생각하고 무엇을 자주 어디에 놓고 다니는 습관을 합리화하는 것인가.

내가 다른 사람을 믿으면 그 사람도 나를 믿는다. 이것은 어느 정도 그런 것 같다. ‘믿음’이란 사실에 입각해 믿고 안 믿고 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믿음은 스스로의 의지이지 않을까. 회사의 경리 담당 사원을 믿는다. 그냥 무조건 믿는다. 의심해 봤자 나만 괴로우니까 믿는 것이 편하다. 그러면 그 사원도 나를 믿는다. 부부 관계도 그렇다. 배우자가 밖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니든 내가 믿으면 그만이다. 따질 것이 없다. 상대방의 행위에 입각해 믿을 사람과 못 믿을 놈을 구별하지 않고 모두를 믿으면 그것이 행복인 것 같다. 사람을 믿는 것일 뿐이다. 그가 하는 일을 믿는 것과 그 사람을 믿는 것은 다른 것이다. 임원이 하는 일은 사전에 조언도 해 주고 일을 끝냈다고 하면 그것을 직접 봐야 한다. 이것은 그 사람을 못 믿어서 하는 행위가 아니다. 내가 해야 할 의무이기 때문에 사전에 주의도 주고 사후에 확인도 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것을 탐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도 내 것을 가져가지 않는다.” 진짜일까. 괜한 자기 합리화일까. 믿음이 그렇다면, 무엇을 잃어버리는 것도 같은 게 아닐까. 잃어버리고서도 잃어버리지 않았다고 믿으면 되는 것일까. 바보인가. 그런 것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