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

[만난 사람 맛난 인생] “탐하고 빠지면 자유로움에서 구속되죠”
“쓴맛이 사는 맛. 그래도 단맛이 달더라.” 새해 벽두 모 일간지에 실린 인터뷰 기사를 읽고 요약한 내용이다. 1935년생 우리 나이로 여든인 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 꼭 만나서 어떤 게 쓴맛이고 어떤 게 단맛인지 듣고 싶었다. 벼르고 별러 반 년 만에 경남 양산에 있는 효암학원을 찾았다.

채현국 선생. 그에 대한 기록은 별로 없다. 대구에서 출생. 서울대 철학과 졸업. 한때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거부. 그리고 유신 시절 민주화 운동을 뒤에서 돌봐주던 익명의 후원자. 이 정도가 고작이다. 그런데 ‘이 시대의 큰 어른’이란 꼬리표가 달린다.

채 선생과의 첫 대면 테이블에 커피가 나왔다. ‘여든에 커피’라니 충격이다. 그것도 설탕 하나 안 들어간 블랙 원두커피다. 쓴맛 ‘지대로’다.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풀렸다.

“나 커피 엄청 잘 마셔요. 하루에 몇 잔을 마시는지 몰라요.”

한 모금 마셔 보니 마냥 쓰지만은 않다. 신맛이 살짝 깔려 있다. 뒷맛의 여운도 향긋하게 남는다. 잘 아는 바리스타가 골라준 원두라고 했다.

채 선생의 커피는 초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군들이 뿌리고 다니던 인스턴트커피가 시작이다.

“1945년 미군이 들어오면서 작은 봉지에 든 레몬 분말과 인스턴트커피를 던지고 다녔죠. 아이들은 그걸 쫓아다니며 주워 먹었어요. 어머니가 줍지 말라고 해서 저는 먹지 않았죠. 그래도 가끔 친구들이 입에 털어 넣어줘 맛있게 먹었어요. 어느 날 친구들이 장난으로 레몬 분말 대신 커피를 왕창 입에 털어 넣어준 거예요. 제가 쓴맛에 기겁해야 하는데, 오히려 미소를 띠며 맛있다고 했어요.”

표정이 ‘70년 전진 앞으로’다. 해맑은 눈빛에 장난기가 가득하다. 써서 죽을 지경이었지만 꾹 참고 반대로 친구들을 골려 먹었다는 얘기다.

“그런데 정말이지 쓴맛 뒤에 남는 여운이 참 좋더라고요. 그때부터 맛을 들여 한창 돈을 벌 때는 하루에 15잔 이상도 마셨어요. 그 당시 커피는 아주 귀한 음료였으니까요. 그렇게 마시다가 결국 위궤양에 걸렸지만.”

허리가 펴지지 않을 정도로 아파 병원에 갔다가 발견됐다. 당뇨병도 그때 확인됐다. 스스로 ‘악질’ 환자라고 말하는 그는 커피를 끊으라는 의사의 지시를 듣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커피를 즐겨 마신다. 물론 당뇨 때문에 설탕을 뺀 쓰디쓴 블랙커피, 아니면 에스프레소다.


방송국 PD 석 달 만에 사표 던져
효암학원에는 ‘쓴맛이 사는 맛’이라고 쓰인 큰 돌이 있다.

“교명을 써서 세워 두려고 가져왔는데 한 귀퉁이가 깨져 있더라고. 깨진 돌에 교명을 쓰는 게 좋지 않아 무슨 다른 말 한마디를 새겨볼까 하다가 한 줄 읊은 게 그렇게 된 게지. 혹시 비관론으로 들릴까봐 교사들과 학생들한테 물었더니 반응이 괜찮아 그대로 쓴 겁니다.”

아이들에게 말하고 싶은 쓴맛은 본인이 좋아하는 커피의 쓴맛은 아닐 게다.

“가난·이별·무시·낙방·좌절 등 이런 것이 인생의 쓴맛일 겁니다. 이런 건 견딜 만합니다. 극복하고 나서 훗날 추억이라고 하며 웃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말한 ‘사는 맛’의 쓴맛은 ‘고진감래(苦盡甘來:고생 끝의 낙)’ 정도인데…”, 갑자기 채 선생이 말을 잇지 못한다. 10여 초가 흐른 뒤 작은 소리로 “진짜 지독하게 쓴맛이 있다”며 말꼬리를 흐린다.

‘쓰다는 말조차 하기 힘든 쓰디쓴 인생사’를 그는 가족의 자살이라고 했다. 실제로 그의 형은 자살했다. 6·25전쟁이 휴전되던 날, “이제 우린 영구 분단이다. 잘 살아라…”는 말만 남겼다고 한다. 그때 형은 서울대 상대 4학년, 채 선생은 열일곱 살이었다. 채 선생은 아주 어렵게 자랐다. 아버지가 중국에 건너가 큰돈을 벌었지만 정작 대구에 남은 가족은 어머니의 ‘공창 비단옷’ 삯바느질로 연명하고 지냈다. 그때 기억을 채 선생은 “늘 배가 고팠다. 먹는 것만 생각했다”고 말할 정도다. 콩깻묵·꽁보리밥 그리고 호박죽은 생각만 해도 징그럽다고 한다.

대학교는 서울대 철학과를 택한다. 연극배우가 되려는 심사였다. 키도 작고 인물도 떨어져 ‘깜’이 아니란 걸 깨닫고 포기한다. 졸업 후 선택한 첫 직업은 중앙방송(KBS 전신)의 연출자. 그런데 석 달 만에 사표를 던진다. 정권에 우호적인 드라마를 만들라는 지시에 환멸을 느낀 것. 부도 위기에 처한 아버지 회사 흥국탄광에 들어가 10여 년 탄광 일에 전념한다. 1973년 탄광 사업을 정리해 탄광 노동자들에게 나눠준다.

“사업을 해보니까 돈 버는 일이 가장 신나더라고요. 돈 쓰는 재미보다 몇 천 배는 매력적이죠. 양귀비와 노는 것도 못 따라올 걸요. 돈이 더 벌릴지도 훤히 보입디다. 그 정도 되면 빠져 나올 수가 없죠. 정의고 나발이고 아무런 생각이 없지요.”

그래서 과감하게 광산을 처분했다고 했다. 인터뷰 중간에 그는 자신을 ‘좋은 사람’으로 비치게 쓰면 안 된다고 당부했다.

“탄광은 조폭 사업입니다. 광부의 85%가 전과자인데 제대로 경영했겠어요. 밥과 돈을 내세워 혹독하게 부려 먹던 일제 징용과 별반 다를 게 없어요.”

‘단맛이 달더라’의 단맛은 어떤 맛일까. 채 선생은 하얀 백설탕을 꼽았다. ‘뿌리칠 수 없는 달콤함의 절정’이라고 표현했다.

“단맛은 맛이 강해 다른 맛을 잊게 하는 재주가 있어요. 그러다 보니 오만 것에 단것을 넣어요. 당뇨 때문에 단맛을 멀리하지만 여기저기 복병이 숨어 있어 짜증이 날 정도예요.”


물에 빠진 것과 수영은 달라
대표적인 것이 소주다. 아스파탐의 단맛이 싫어 커피를 섞어 마신단다. 그런데 커피를 아무리 넣어도 단맛이 줄어들지 않는다고 하소연했다.

“아이들과 여자들은 쓴맛을 좋아하지 않아요. 그런데 그들에게 쓴맛을 먹이기 위해 단맛을 넣어요. 대표적인 게 소주와 막걸리입니다. 이런 게 억지 짓인데 그러면 안 되는 겁니다.” 따끔한 지적이다.

삶의 쓴맛처럼 삶의 단맛도 있을 것 아닌가.


“아이들과 여자들은 쓴맛을 좋아하지 않아요. 그런데 그들에게 쓴맛을 먹이기 위해 단맛을 넣어요. 대표적인 게 소주와 막걸리입니다.”


“진리·신앙·신념 모두가 단맛이죠. 그런데 확신과 자신만 있을 뿐 허구입니다. 가치가 있다고 해도 순간의 수작에 불과한 거예요. 시(詩)도 수작에 불과해요. ‘쓴맛이 사는 맛? 개수작한다. 배부른 소리’란 욕도 맞는 말입니다.” 무언가에 빠지는 게 인생의 단맛이란 답이다.

그러니 살아가면서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단다. 그래도 사랑처럼 욕심 없이 단순 소박하게 몰입하는 자세. 그건 빠지는 게 아니라 이뤄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물에 빠진 것과 수영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니 헷갈리지 마라”고 힘줘 당부했다.

많은 사람들은 밥맛 나는 세상을 꿈꾸고 있다. 채 선생은 “밥맛 나는 세상은 할 일이 있는 세상”이라고 단정했다. 그리곤 “절대 빈곤이 없어야 함은 물론이고 상대적 빈곤도 크게 느끼지 않는 세상”이라고 덧붙였다.

“음식을 탐하지 마세요. 단것에 빠지지 마세요. 탐하고 빠지면 자유로움에서 구속되는 겁니다. 적게만 먹어도 자연스럽게 해결됩니다. 모든 게 맛있을 수밖에 없는 몸 상태가 되니까요. 그러면 어느새 세상 사는 일이 달콤해질 겁니다.”.


유지상 음식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