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에서 50대 중반이 되면 버텨야 한다.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기업의 임원 역할이다. 그래서 버텨야 한다.
스스로 연봉을 낮추고 권한을 축소해서라도 버텨야 한다.
[CEO 에세이] 50대 퇴직 임원의 운명
노익상 한국리서치 대표

1947년생. 1971년 고려대 사회학과 졸업. 1973년 고려대 사회학 석사. 2002년 고려대 사회학 박사. 1978년 한국리서치 대표(현). 2007년 대한산악연맹 부회장(현).


젊은 나이에 대기업에 입사해 50대 중반까지 임원으로 재직하다가 여러 사정으로 퇴사하고 3년 동안 정보기술(IT) 분야의 새로운 사업을 구상, 시작하고 사람을 모으다가 또 다른 사업을 구상하고…. 이렇게 퇴직 후 3년을 지낸 한 후배의 얘기다.

“대기업의 임원으로 일하면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여러 부서의 업무를 조정하거나 사원들의 품의에 대한 결정을 내려 주는 것밖에 없었어요. 조직 속에서 일하는 방법만 알 뿐 스스로 조직을 만들 수도 없고 직접 영업을 할 수도 없고 저 혼자의 기술을 갖고 있지도 않다는 것을 이제 깨달았습니다. 아무래도 다시 큰 조직에 들어가야 할 것 같아요. 소개 좀 부탁합니다.”

실감나는 얘기였다. 그가 비록 대기업의 마케팅 책임자로 신제품을 성공시키고 생산 과정을 개선해 비용을 줄이고 새로운 유통 조직을 만들어 매출을 올렸지만 그런 일을 혼자 한 것은 아니었다. 연구소·공장·영업조직·광고회사·마케팅 부서가 조직적으로 각자의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에 그 기업은 계속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동안의 경험과 인적 네트워크를 이용해 새로운 사업을 시도했지만 제품을 생산할 줄도 모르고 개인 특허가 있는 기술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광고물을 제작할 수도 없고 은행 대출을 받는 요령도 모른다는 것을 3년이 지난 후 깨달은 것이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대기업의 임원이다.

대기업에서 50대 중반이 되면 버텨야 한다.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기업의 임원 역할이다. 그래서 버텨야 한다. 스스로 연봉을 낮추고 권한을 축소해서라도 버텨야 한다.

그러나 50대 중반이 넘으면 자기 자리로 바퀴벌레처럼 다가오는 부장급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난다. 기업의 주인이나 대표이사 역시 혁신과 신기술의 도입을 외치면서 기존 임원의 퇴사를 압박한다. 임원은 계약직이다. 신문에 난 인사 공고를 보고 자신이 그만두게 됐다는 것을 안 임원도 있을 지경이다.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티지만 퇴직 후의 준비는 해 둬야 한다. 50대 후반이 된 자기를, 그것도 대기업의 임원을 역임한 무거운 자신을 채용할 기업은 없을 것이다. 아니 단연코 없다. 퇴직 후에는 지금처럼 여러 부서의 전문가들이 자신을 도울 수 없다. 자기 혼자 무엇인가 해야 한다.

B2B 사업이 그래도 소비재 사업보다 1인 기업의 장사로 위험이 적다. 몇 군데의 거래처만 확보해 놓으면 가능한 사업이다. 임원 재직 시 우선 인맥을 강화해야 한다. 광고회사, 소매 유통, 소재 납품 업체와 좋은 관계를 가져야 한다. 그들의 값을 후려치고 납품 기한을 앞당기라고 독촉하는 것은 위험한 행위다. B2B의 예상 판매처를 대기업에 근무할 때 친해 둬야 한다. B2B 사업 중 몇 가지의 품목을 정해 그 품목의 생산·유통·경쟁에 관한 정보를 모으고 그들 기업과의 연결 고리를 만들어 둬야 한다. 또한 그 품목의 소재와 품질을 평가할 수 있는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을 연마해야 한다. 이 정도의 준비만으로도 50대 후반부터 조금은 안정된 ‘자기 사업’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50대 중반의 대기업 임원에게는 자신의 한계를 파악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