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의 전폭 지원으로 설립…24년 만에 세계 4대 철강 기업 ‘우뚝’}

[한경비즈니스=차완용 기자] ‘제철 산업을 통한 산업 입국’. 포항종합제철(현 포스코)을 설립한 고(故)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 대한민국 국가에 한 다짐이다.

지금으로부터 48년 전 포스코의 상징과도 같은 박 명예회장은 1967년 10월 3일 포항시 교외 영일군 대송면에서 포항종합제철을 세우며 황량한 모래벌판을 세계 굴지의 제철 공업단지로 탈바꿈시키는 꿈을 키웠다.

그리고 박 명예회장은 이 꿈을 단 하루도 잊지 않기 위해 1968년 4월 1일 제철소 입구에 포항종합제철 현판을 내걸며 ‘자원은 유한, 창의는 무한’이라는 글귀를 새겼다. 이 글은 48년이 흐른 지금도 제철소로 출근하는 직원들의 마음가짐을 새로이 다잡고 있다.
박태준 명예회장이 이끈 ‘제철보국’
(사진)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 1973년 포항제철소에서 첫 생산된 열연강판에 '피와 땀의 결정'이라는 휘호를 적고 있다. (포스코 제공)

◆(제1막) 제철 입국의 시작

박 명예회장의 삶은 ‘철강 신화’ 그 자체였다. 세계 최고의 제철 기업으로 우뚝 선 포스코의 오늘은 박태준의 ‘제철보국’ 신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고인은 자본도 기술도 경험도 없이 포항 영일만의 허허 모래밭에서 실패하면 동해바다에 빠져 죽자는 ‘우향우 정신’ 하나로 제철 입국의 초석을 다지면서 80평생이 넘도록 오롯이 철강 신화만 쓴 ‘철의 사나이’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포스코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1927년 경남 동래군 장안면(현 부산시 기장군 장안읍) 임랑리에서 박봉관(父)과 김소순(母)의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44년(17세) 일본 육사 입교 권유를 거부하고 와세다대 기계공학과로 진학하면서 소결로 공장에 노력 봉사 대원으로 배치되면서 제철과의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이후 1946년(19세) 돌연 중퇴한 후 귀국해 부산 국방경비대에 자원하면서 군인의 길을 걷게 된다. 육군 준장으로 진급하며 승승장구하던 그는 1963년(36세)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정치 참여 요청을 거부하고 미국 유학을 준비했지만 유학길에는 오르지 못했다.

그 대신 박 전 대통령의 강력한 요청으로 일본 특사로 활동한 직후 국영기업인 대한중석(현 대구텍) 사장을 지내게 된다. 만년 적자에 허덕이던 대한중석을 1년 만에 흑자 체제로 만든 그는 박 전 대통령의 요청으로 본격적인 제철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1967년 종합제철건설사업추진위원장에 임명된 그는 ‘제철공장 완수’라는 특명을 받고 본격적인 밑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고대하던 포항제철이 1968년 3월 20일 창립 총회를 열고 본격적인 제철 입국을 위한 박 명예회장의 행보가 시작됐다. 창설 요원으로 박 명예회장이 사장으로 임명됐고 임원 7명과 직원 31명 등 총 39명으로 구성됐다.

당시 재무부와 대한중석이 각각 3억원과 1억원의 자본금을 들였지만 포항제철은 국영기업이 아닌 주식회사로 공식 출범했다. 이는 박 명예회장의 강력한 요청 때문이었다. 국영기업으로 출범하면 설비 구매 등 사소한 일까지 정부 기관의 심의를 거쳐야 하는 만큼 소신 있는 경영이 곤란해진다는 것이 당시 박 명예회장의 주장이었다.

◆(제2막) 제철 강국으로 도약

제철 입국을 외치며 출발한 포스코는 박 명예회장의 뚝심 경영과 추진력으로 거침없는 성장을 이뤄 왔다. 설립 초기 그는 종합 기술 개발 발전 계획을 만들며 일본을 따라잡는 데 목표를 뒀다.

철강 생산 공정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던 박 명예회장과 직원들은 포항제철소 건설을 지원한 일본의 신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과 일본강관(NNK)이 전수한 각종 기술 자료를 바이블로 여기고 이를 철저히 흡수하며 하나하나씩 양산에 성공했다.

그러다 보니 포스코에 우호적이던 일본 업체들이 1980년대 들어 광양제철소 건설에 착수할 때부터 태도가 180도 달라졌다. 무섭게 따라오는 포스코의 기술력을 감지하고 부메랑 효과를 우려한 것이었다.

일본 제철소를 견학할 때에는 정보 유출을 철저히 차단했고 기술 교류에서도 계약 범위를 엄격히 지켰다. 오죽하면 신일본제철의 일본 제철소를 방문했을 때는 뒤따라오는 직원들이 꼼꼼히 살펴보고 매뉴얼을 외울 수 있도록 일부러 제철소 현장을 천천히 걸었다는 일화가 있다.

하지만 더 이상 일본의 뒤를 따라만 갈 수는 없었다. 모방·추격 단계를 거친 포스코는 이때부터 자력 개발 단계로 들어간다.

포스텍 설립과 부설 연구소인 포항산업과학연구원(RIST)의 독립 법인화를 통해 포스코는 이들 기관과 제철소 현장을 연결한 산·학·연 협동 연구 체제를 구축했다. 독자적 기술 개발이 탄력을 받게 되자 서서히 일본을 따라잡거나 넘어서기 시작했다.

박 명예회장은 1990년 광양3기 설비 종합 준공(연산 조강 810만 톤 체제 확립)한 데 이어 1992년에는 광양4기 설비 종합 준공 및 ‘포항제철 4반세기 대역사 준공(연산 조강 2100만 톤 체제 확립)’을 이뤄냈다.

포항제철소를 착공한 지 24년 만에 세계 4대 철강 회사로 만들어 낸 것이다. 이는 조강 생산 기준 세계 1위로, 제철 입국으로 시작한 포스코가 제철 강국으로 거듭난 순간이었다.

같은 해 10월 3일 박 명예회장은 서울 동작동 박정희 전 대통령의 묘소를 찾았다. “각하의 명을 받아 25년 만에 제철 입국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음을 영전에 보고합니다.” 그는 이를 마지막 공식 일정으로 한 뒤 사의를 표명, 그해 10월 8일 일선에서 물러났다. 이후 자민련 총재와 국무총리 등을 역임하고 2011년 12월 영면했다.
박태준 명예회장이 이끈 ‘제철보국’
◆(제3막) 외압에 흔들린 제철 강국

세계적인 철강 기업으로 우뚝 선 포스코는 재계 순위 6위에 오를 정도의 대기업이 됐다. 하지만 재벌 총수가 없는 국민 기업이다. 이 때문인지 포스코는 정부 지분이 없는 민간 기업이지만 회장 선임과 퇴임 등의 과정에서 번번이 정권의 외압 논란이 따라붙었다.

박 명예회장에 이어 1992년 10월 황경노 전 회장이 2대 회장에 취임했지만 6개월 만에 회장직을 내려놓았다. 이어 1993년 3월 3대 회장에 취임한 정명식 전 회장은 내부 갈등으로 1년 뒤인 1994년 3월 교체됐다.

이후 4대 회장에는 포스코 출신이 아닌 김만제 전 회장이 발탁됐다. 김 전 회장은 회장 취임 전 재무부 장관과 부총리를 역임한 외부 출신이었다. 하지만 그도 1998년 정권이 바뀌자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5대 회장에는 유상부 전 회장이 올랐다. 유 전 회장은 박 명예회장 측 인사로 5년간 회장직을 수행했다. 6대인 이구택 전 회장은 2003년 3월부터 2009년 1월까지 재임했다. 2007년 연임에 성공하며 6년가량 회장직을 수행했다. 고 박 전 회장 이후 가장 긴 재임 기간이다. 이후 이명박 정부 출범 초인 2008년 자진 사퇴했다.

7대 정준양 회장은 2009년 2월부터 2014년 3월까지 자리를 보전했다. 재임 기간에 포스코의 외형을 급격히 키우는 과정에서 검찰의 조사를 받기도 했다.

◆(제4막) 다시 세우는 제철 신화

이처럼 포스코 수장들이 외압에 휘둘리며 부침을 거듭하는 사이 포스코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지난해 연결 기준 당기 순손실(960억원)을 기록하는 등 분위기가 아주 좋지 않기 때문이다. 2014년 4분기에 이어 지난해 3분기 당기순손실을 내긴 했지만 포스코가 연간으로 적자를 기록한 것은 2015년이 처음이다.

매출과 영업이익도 쪼그라들었다. 지난해 매출 58조1900억원, 영업이익 2조4100억원(연결 기준)은 전년 대비 각각 10%와 25%씩 줄어든 수치다. 지난해 초 권 회장은 67조원의 매출을 장담했지만 실제 실적은 이보다 9조원 적었다.

시장의 우려도 높아졌다. 국제 신용 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지난 2월 초 포스코 장기 신용 등급 전망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하향 조정했다.

다른 국제 신용 평가사 무디스도 포스코 신용 등급 전망을 ‘부정적’으로 낮췄다. 무디스는 “포스코가 지난해 기대 이하의 실적을 거뒀고 아시아 철강 산업 상황도 좋지 않아 신용등급 전망을 하향 조정했다”고 밝혔다.

현재 포스코는 권오준 회장이 지난해부터 이끌고 있다. 8대 회장이다. 지난 2년간 권오준호(號)의 항해는 순탄하지 않았다. 작년 한 해 지속된 검찰 수사와 고강도 구조조정으로 내부는 그 어느 때보다 어수선했고 철강 업계의 불황과 계열사들의 실적 악화로 실적은 추락했다.

군살 빼기와 본업에서의 경쟁력 강화로 절반의 성과를 거뒀지만 실적의 근본적 개선을 향한 길은 아직 멀었다는 평가다. 떨어질 대로 떨어진 ‘국민 기업 포스코’의 명성을 되찾는 일도 과제다.

권 회장은 우선 대내외 악재들에 맞서 과감한 구조조정을 통한 비용 절감 전략을 이어 가겠다는 방침이다. 권 회장은 지난 1월 말 열린 기업 설명회에서도 “구조조정 목표를 도전적으로 정하고 이를 위해 꾸준히 실천하겠다”고 강조했다.

포스코는 이미 작년 34개 계열사를 구조조정하는 등 부실을 상당 수준 털어냈다. 이를 발판 삼아 올해 초부터 포스코그룹 상장사 시가총액이 급등하고 있다. 저평가 매력이 부각되는 동시에 실적이 좋아질 것이라는 기대에 매수세가 몰렸기 때문이다. 철강 가격이 오름세를 보이는 것도 주가에 긍정적 재료로 작용했다.

실제로 포스코·포스코대우·포스코켐텍·포스코엠텍·포스코ICT·포스코강판 등 포스코그룹의 상장사(거래 정지된 포스코플랜텍 제외) 6곳의 시가총액 합계는 지난 4월 1일 기준 22조7051억원으로 집계됐다. 작년 말(18조1662억원)과 비교해 24.98% 불어났다.

하지만 권 회장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있다. 조직을 더 정비해 포스코의 옛 명성을 되찾기를 원한다. 과연 권 회장이 어디까지 포스코를 일으킬지, 또 다른 철강 신화를 만들어 놓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cwy@hankyung.com

[기사 인덱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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