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병우 현대엘리베이터 사장 인터뷰]
경쟁사 CEO로 돌아온 38년 해외 영업맨
"현지 시장의 인사이더가 돼야 합니다"
터키 교두보로 동유럽 진출 시동

[한경비즈니스= 장승규·이정흔 기자] 지난 7월 15일 터키에서 쿠데타 소식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장병우(70) 현대엘리베이터 사장은 예정대로 터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항공편을 구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장 사장은 현지에서 터키의 대표적 건설·에너지 기업인 STFA그룹과 현지 대리점 법인을 합작 법인으로 전환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2030년까지 글로벌 ‘톱7’ 진입을 목표로 세운 현대엘리베이터가 세계화 전략의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합작 파트너는 위험을 무릅쓴 장 사장의 결단을 고마워했다.

지난 4월부터 현대엘리베이터를 이끌고 있는 장 사장은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기를 이끈 대표적인 ‘해외 영업통’으로 꼽힌다. 1973년 럭키(현 LG화학) 수출부 사원으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금성사(현 LG전자) 수출입과장 때는 흑백TV를 들고 북미 대륙을 누볐다.

그 후 LG상사·LG산전 등 LG그룹 주요 계열사를 옮기며 시장 개척과 해외 지사 설립을 도맡았다. LG오티스엘리베이터 대표와 오티스엘리베이터 코리아 대표를 역임해 엘리베이터 업계에서 전문성도 인정받았다.

현대엘리베이터의 ‘세계화’를 이끄는 데 그만한 적임자가 없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현대그룹 연지동 사옥에서 7월 29일 장 사장을 만나 현대엘리베이터의 세계화 청사진과 경영 철학을 들었다.
장병우 현대엘리베이터 사장 “수출은 사라져야 할 용어”
(약력)1946년 서울 출생. 1973년 서울대 영문과 졸업. 1991년 금성사 해외영업관리담당 상무. 2001년 LG오티스엘리베이터 대표. 2006년 오티스엘리베이터 코리아 대표. 2016년 현대엘리베이터 사장(현). /이승재 기자

▶합작 법인을 터키에 설립한 배경은 무엇입니까.

“현대엘리베이터는 터키 시장에서 톱 브랜드에 속하죠. 글로벌 선두 업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해요. 이스탄불 지하철을 비롯해 메트로폴 이스탄불, 쇼핑몰 워터가든 같은 주요 고층 빌딩에 모두 우리 제품이 들어가 있죠. 첫 목표는 터키 시장에서 선두를 차지하는 거예요. 그다음은 이를 교두보로 동유럽에 진출하는 겁니다.”

▶쿠데타 등으로 터키 상황이 혼란스러운데요.

“터키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지만 여전히 큰 기회의 시장이라고 봐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은 건설을 강조하고 건설 경기를 바탕으로 그동안 경제를 운영해 왔어요.

쿠데타 이후 대통령의 파워가 더 세진 게 어떻게 보면 업계에는 전화위복일 수 있죠. 이번 터키 방문은 우여곡절이 많았어요. 폭탄 테러로 방문 날짜를 연기했는데, 이번엔 또 쿠데타가 터졌어요. 한국 항공사들의 터키 운항이 다 취소됐죠.

파트너 측에서 예정대로 와 줬으면 하더라고요. 쿠데타 직후 터키항공사에 직접 예약해 날아갔어요. 파트너사가 이런 상황에도 와준 걸 상당히 고마워하더군요. 서로의 신뢰가 높아지는 계기가 됐어요.”

▶합작 법인을 어떻게 운영할 생각입니까.

“터키는 우리가 추진하는 세계화 전략의 성공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라고 생각해요. 2~3년 내 터키에 현지 생산 공장을 세울 겁니다. 현재 터키의 엘리베이터 시장은 대략 3만 대 규모예요. 이 중 7000대가 수입품이죠. 나머지는 로엔드(중저가) 시장이에요.

로엔드를 수입해서는 경쟁력이 없어요. 우리는 브랜드 이미지가 강하기 때문에 현지 생산을 통해 로엔드 시장을 공략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어요.”

▶터키 외에도 해외 공장을 가동 중인 곳이 있나요.

“중국과 브라질에 공장이 있습니다. 인도에도 공장과 판매 법인을 세우기 위해 6개월째 태스크포스(TF)팀이 현지에 나가 있고요.

앞으로 중국은 규모를 대폭 확대해 신공장을 세울 겁니다. 최첨단 현대식 시설로 계획 중이죠. 중국·인도·터키, 이 세 나라가 세계화의 ‘전초기지’가 될 거예요.”

▶중국 상황은 어떻습니까.

“중국은 글로벌 엘리베이터 시장의 70%를 차지하지요. 한국 시장이 3만 대인데 중국 시장은 60만 대예요. 20배나 큰 시장이죠. 중국에서 성공하지 못하면 세계화에 성공하기 어려워요. 현재 내로라하는 글로벌 업체들이 중국 시장을 과점하고 있어요.

100년, 150년의 역사를 지닌 미국과 유럽 10여 개 업체가 시장의 60%를 차지합니다. 아직 우리는 거기에 끼지 못하는 게 현실이죠. 이걸 넘기 위해 대규모 투자를 하려는 겁니다. 요즘 우리 회사는 술자리에서도 어떻게 하면 중국에서 톱10 브랜드에 진입할 수 있을까, 그 얘기만 해요.”

▶중국 시장에 대한 복안이 있나요.

“중국에서 성공하려면 두 가지 전제 조건이 있어요. 원가 혁신과 품질이죠. 중국 하면 싸구려 이미지를 자꾸 떠올리는데 착각이에요. 중국은 굉장히 고급 시장이거든요. 가전제품도 최고급만 팔리지 않습니까. 엘리베이터도 원가 경쟁력과 품질을 갖춘 제품만 살아남아요.

그래서 요즘 ‘원가 혁신’, ‘품질 혁신’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삽니다. TF팀을 만들어 프로젝트도 진행하고 있고요. 안전 기준도 중국이 더 엄격해요. 중국에서 안전사고를 내면 회사 문을 닫아야 할 정도죠.”


{영업 비결요? ‘네버 네버 기브 업.’ 이게 최고죠.
신입 사원에게 꼭 이 말은 해줍니다.
‘새우잠을 자더라도 고래를 꿈꿔라.’
회사는 5%가 이끌어 가는 곳이에요.
나머지 후배들이 그걸 보고 쫓아가는 거예요.
회사에서 평준화는 조직을 파괴하는 가장 나쁜 겁니다.}


▶해외 영업 전문가로서 세계화의 핵심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선은 국내 일등이 돼야 해요. 품질·코스트·마켓 셰어 등에서 확실한 핵심 역량을 갖춰야 세계화를 할 자격이 생깁니다. 그 핵심 역량을 해외에서 활용하는 게 세계화죠. 국내 체전에서 금메달을 못 딴 사람이 올림픽 가서 금메달을 딸 수 있습니까.

그리고 이제는 ‘수출’이라는 말이 사라져야 해요. 영어로는 ‘엑스포트(export)’인데, 포트를 떠나면 잊어버린다는 거예요. ‘아웃사이더’로 머무른다는 말이죠. 각 시장의 ‘아웃사이더’가 아니라 ‘인사이더’가 돼야 합니다.

적어도 우리가 경쟁력을 갖춘 주요 시장에서는 철저하게 현지화해 그 나라의 ‘기업 시민’이 돼야 해요. 그 나라에 ‘귀화’하는 거죠.”

▶세계 1위 오티스엘리베이터의 한국법인 대표도 하셨는데, 오티스의 경쟁력은 뭐라고 느끼셨습니까.

“연구·개발(R&D)입니다. 본사에서 글로벌 R&D를 직접 관장하며 끊임없이 신소재·신제품을 개발해요. 가장 큰 강점이죠. 반면 현지 문화를 이해하는 현지화에는 약합니다. 글로벌 제품이 나왔으니 그냥 무조건팔라는 식이죠. 각 나라별 R&D를 허용하지 않아요.”

▶현대의 R&D 수준은 어떻습니까.

“취임하고 나서 놀랐죠. 초고속 엘리베이터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이죠. 분당 1080m 제품 개발을 벌써 끝냈어요. 미쓰비시가 분당 1230m를 개발하면서 세계에서 최고로 빠른 엘리베이터라고 내세우지만 우리는 정부 지원을 받아 이미 분당 1260m짜리를 개발 중입니다.

인공지능을 이용한 행선층 예약 시스템도 개발했고 원격으로 고장을 감지해 간단한 것은 원격으로 고칠 수 있는 시스템도 갖췄죠. 각 분야에서 크게 밀리는 분야가 없습니다.”

▶국내 엘리베이터 업계가 발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요.

“선진 시장은 서비스가 엘리베이터 회사의 영업이익을 책임집니다. 그 정도로 서비스를 중시하죠. 제조업체가 서비스까지 해야 한다는 규정도 있고요. 제품을 팔면서 책임 유지 관리 계약까지 한꺼번에 하는 곳이 많아요.

한국은 비싸다는 이유로 이걸 꺼립니다. 1000개가 넘는 중소업체가 무조건 ‘가격’으로 승부하죠. 서비스와 안전에 대한 개념이 낮은 거예요. 엘리베이터 업계가 세계 선두 대열에 들려면 서비스 분야가 향상되지 않고는 힘들어요. 제품 설치 중심에서 서비스가 주도하는 비즈니스 모델로 바뀌어야죠.

우리가 추진하는 세계화 전략에서 타깃 시장을 정하는 기준도 바로 ‘서비스’예요. 적정 규모의 수요가 있어야 하지만 핵심은 결국 서비스죠. 한국처럼 서비스가 무시되는 나라에선 아무리 현지화를 해도 승산이 없어요.”
장병우 현대엘리베이터 사장 “수출은 사라져야 할 용어”
“중국 하면 싸구려 이미지를 자꾸 떠올리는데 착각이에요. 중국은 굉장히 고급 시장이거든요. 가전제품도 최고급만 팔리지 않습니까. " / 이승재 기자

▶엘리베이터와 어떻게 인연을 맺었나요.

“올해 직장 생활 40년째인데 그중 해외 영업만 38년이에요. LG상사에 있을 때 LG산전을 세계화하라는 지시를 받고 LG산전으로 갔어요. 거기에서 전력 기기와 엘리베이터 해외영업담당을 맡았죠. LG오티스엘리베이터가 만들어지면서 대표를 맡게 됐고요.”

▶처음 해외 영업을 할 때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은데요.

“1970년대 해외 영업을 시작할 때만 해도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이라는 나라를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어요. 제가 수출입과장일 때 금성사의 수출액은 5000만 달러에 불과했어요. 흑백TV가 주력이었고 미국이 수출 시장의 90%를 차지했죠.

보통 출입국 심사하며 직업을 묻지 않습니까. ‘골드스타’에서 일한다고 하면 아무도 몰라요. 한번은 출입국 직원이 ‘오 골드스타~’하며 아는 척을 해주는데 그게 그렇게 기분이 좋더라고요.

당시만 해도 우리 제품은 ‘미끼 상품’밖에 안됐어요. 매장들이 파격적인 가격을 홍보해 일단 고객을 끌고는 막상 소비자가 오면 다른 제품을 팔아요. 팔아봐야 남는 게 없거든요. LG전자는 그런 설움을 딛고 일어선 겁니다.”

▶영어 이름이 ‘밥 장’이신데, 특별한 사연이 있습니까.

“금성사 수출입과장 때 구자용 E1 회장, 김영찬 LG전자 부사장, 황재일 전 LG전자 부사장과 같이 일했어요. 술자리에서 영어 이름을 하나씩 갖자는 이야기가 나왔죠. 제가 영문과 출신이니까 하나씩 지어줬어요.

구자용 회장은 ‘자용’이니까 쟈니라고 했어요. 지금도 구 회장 만나면 그냥 쟈니라고 부릅니다. 영어 이름 부르는 게 굉장히 민주적이에요. 기억하기도 좋고요. 그 후 금성사에서 영어 이름을 가진 사람은 다 내가 지어준 거예요. 여기 와서도 요즘 영어 이름을 하나씩 지어 주고 있지요.”

▶영업은 결국 상대를 설득하는 것인데, 남다른 비결이 있습니까.

“당시 우리가 5000만 달러, 삼성전자가 1억 달러어치를 수출했어요. 2년 안에 삼성을 꺾자는 목표를 세웠죠. 북미 필립스가 9인치 TV를 몇 년째 삼성과만 거래했어요. 철옹성이었죠.

한번은 흑백TV 1만 대를 주문하는데 업무 프로세스상 우리한테도 기회를 줘야 했어요. 그걸 따려고 날아가 며칠간 설득해 겨우겨우 5분간 면접을 하는데 캐비닛 색상이 달라서 안 된다는 겁니다. 색상을 바꿔 주겠다고 해도 1주일 뒤 쇼가 예정돼 안 된다고 해요. 1주일 내에 색상을 맞추겠다고 했죠.

그때는 미국까지 비행기로도 사흘이 걸렸어요. 고참 사원이던 김영찬 부사장에게 곧바로 전화해 언제까지 색상 코드를 맞춰 워킹 샘플을 보내라고 지시했어요. 그 친구는 전화를 받자마자 택시를 타고 울산 LG화학으로 달려갔죠. 공장 설계 담당이 까다로운 사람이었는데 사정을 하니까 감동해 전 공장을 스톱시키고 플라스틱을 뽑아줬어요.

그렇게 해서 나흘 만에 기적같이 샘플이 도착했죠. 고객도 감동해 수주하게 됐고요. 요즘 젊은이들에게 이 말을 해주고 싶어요. ‘네버 네버 기브 업.’ 이게 최고죠. 또 오너십을 갖고 주도적으로 일해야 해요.

달걀을 자기가 깨면 병아리가 되지만 남이 깨면 계란 프라이가 됩니다. 조그만 일을 할 때도 오너십을 갖고 주도적으로 하면 달라집니다. 김영찬 부사장도 그때 ‘이 일은 나에게 달려 있다’는 오너 의식을 가졌으니까 그 새벽에 공장으로 달려간 거죠. 택시비가 많이 나와 나중에 경리담당과 싸우기는 했지만요.(웃음)”

▶사장이 되는 비결은 뭡니까.

“1973년 1월 1일 입사했는데 그해에 주말 다 포함해 하루도 쉰 날이 없었어요. 아내와 4~5년 사귈 때인데 집에서 아내에게 ‘저 사람 안 되겠다. 선봐라’고 할 정도였죠.

신입 사원 들어오면 이 말을 꼭 해줍니다. ‘새우잠을 자더라도 고래를 꿈꿔라.’물론 사장이 아무나 되는 것은 아니죠. 주위 환경도 중요하고요. 그래도 그런 생각을 갖고 도전해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보스를 잘 만나야 해요. 가장 불행한 사원은 보스를 잘못 만난 사원이에요. 나쁜 짓인 줄 알면서 부하에게 시키고 그걸 할 수 없이 따라해야 하는 사원이 가장 불쌍한 사원이죠. 이런 사람을 솎아내 내치지 않으면 회사가 망합니다.

회사는 5%가 이끌어 가는 곳이에요. 전체가 다 이끌어 가는 게 아니죠. 회사의 기준은 5%가 정하고 나머지 후배들이 그걸 보고 쫓아가는 거예요. 회사에서 평준화는 조직을 파괴하는 가장 나쁜 겁니다.”

▶한국 영문학계의 거목인 장왕록 전 서울대 교수가 부친이고 장영희 전 서강대 영문과 교수가 동생인데 학자의 꿈은 없었습니까.

“원래는 대학 졸업하고 교사가 되려고 했죠. 수출부 사원을 뽑는다는 공고를 보고 딱 3개월만 하려고 입사했어요. 무역에 대해 ‘ㅁ’자도 몰랐는데 오히려 그래서 그런지 일이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3개월 지나 교사를 하지 않고 회사에 들어간다고 하니까 아버지가 무척 놀라시더군요. 회사 부장으로 있던 제자를 따로 만나시기도 했더라고요.

그때 제자가 ‘남자 화장실, 여자 화장실 구분도 못할 정도로 열심히 일하면 사장 된다’고 말씀드렸다고 해요. 그래서 아직도 조금은 부담감을 느낍니다. 내가 열심히 일한 이유 중 하나죠.”

sk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