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환갑 넘어 도전한 모델 알고 보니 천직이었죠...제2의 인생은 좋아하는 일 찾을 기회”

20대 브랜드 러브콜 받는 60대 모델 김칠두
백발의 60대 남성이 컨버스 운동화와 코듀로이 바지를 입고 나타났다. 카메라 앞에 선 그는 능수능란하게 포즈를 취하고 강렬한 눈빛으로 ‘포스’를 내뿜었다.

세월에 따라 깊게 파인 주름마저 멋스럽게 소화하는 그는 시니어 모델 김칠두(64) 씨다. 이 60대 남자 모델에게 1020세대가 열광한다. 소셜 미디어와 포털 사이트 검색어를 장식함은 물론이고 뉴스에서도 김칠두 씨의 이야기를 전한다.

◆10개 브랜드 모델 활동부터 런웨이까지 점령
20대 브랜드 러브콜 받는 60대 모델 김칠두
“모델은 눈으로 이야기하는 직업이에요. 눈빛과 자신감이 가장 중요하죠.”
압구정 더쇼프로젝트에서 1월 22일 만난 김칠두 씨는 워킹 연습이 한창이었다.
자연스러운 포즈와 181cm의 체구를 보면 베테랑 모델 같지만 김 씨는 환갑이 넘은 나이에 모델 세계에 발을 들였다.

김 씨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작년 2월부터 본격적인 모델 활동을 시작했고 이미 10개 브랜드의 룩북(look book)을 찍었다.

룩북은 모델·포토그래퍼·스타일리스트 등이 합작해 만든 브랜드의 사진집이다. 대중에게 제품의 스타일링과 패션 경향을 보여주며 디자이너와 브랜드가 제품에 담은 의미와 철학을 전달하는 매개체다.

그에게 러브콜을 보내는 브랜드는 정장이나 중·장년층 기업이 아니다. 1020세대를 타깃으로 하는 스트리트·워크웨어 브랜드가 대부분이다.

“20대 브랜드 룩북을 처음 찍게 됐을 때는 좀 의외였죠. 아직도 이유를 모르겠어요. 얼굴이 독특하게 생겨서 그런 게 아닐까요(웃음). 아직까지 한국 모델 중 수염이나 머리를 길게 기르거나 개성 있는 모델이 많지 않아 그런 것 같아요.”

작년에는 국내 최대 패션쇼인 ‘헤라 서울패션위크’에서 ‘키미제이(Kimmy j)’ 브랜드의 오프닝을 장식하기도 했다. 국내 패션쇼에서 시니어 모델이 메인 무대에 오른 것은 처음이다.

모델을 하기 전 그는 30년간 경기도에서 순댓국집을 운영했다. 모델과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20대에는 모델을 꿈꾸던 청년이었다. 현실적인 이유로 모델의 꿈을 접어야 했지만 마음속에는 늘 꿈에 대한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그가 모델의 꿈을 다시 키운 것은 본업이었던 식당을 정리한 이후다. 직장인으로 따지면 은퇴였지만 김 씨에게는 인생의 다음 무대를 설계하는 계기가 됐다.

“식당을 정리하고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많이 갖게 됐어요. 내가 무엇을 잘할 수 있을지, 어떤 일을 하면 좋을지 고민하다가 20대 과거의 나를 돌아보게 됐죠. 한창 옷에 빠져 있었고 모델 경연 대회에 도전해 상도 탔던 시절이 있었어요.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모델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지만 열정적이었던 그때를 회상하면서 다음 직업에 대한 틀을 잡아갔죠.”

20대부터 옷을 좋아했고 자신감 넘쳤던 그는 딸의 적극적인 권유로 모델 에이전시의 문을 두드렸다. 서울에 연고는 없었지만 그의 인생 후반부를 위해 가족들이 함께 상경했다.

“나는 인터넷을 할 줄 몰랐기 때문에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될지 막막했어요. 그 때 딸이 에이전시 ‘더쇼프로젝트’에서 시니어 모델을 모집한다는 공지를 보고 알려줬어요. 늦게나마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 나를 믿고 다시 한 번 도전했죠.”

더쇼프로젝트에서 교육을 받고 있는 시니어 모델은 50여 명, 그중 김 씨가 유일한 청일점이다. 20년 넘게 유지해 오던 장발의 스타일과 서구적인 얼굴은 그만의 무기가 됐다. 지금은 밀라노와 벨기에 현지 브랜드에서도 소셜 미디어를 통해 섭외 연락이 오고 있다. 다른 에이전시에서도 그를 스타 모델로 키운 비결을 알려달라고 찾아올 정도다.
20대 브랜드 러브콜 받는 60대 모델 김칠두

◆시니어들에게 개방된 세상 오길

김 씨는 1주일에 두 번 워킹, 포즈, 연기 수업을 듣는다. 집에서도 틈틈이 표정과 포즈를 연구한다. 아직 데뷔한 지 1년이 지난 신인 모델이기 때문에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패션 감각도 타고났다.

그가 주로 쇼핑하는 곳은 서울 동묘시장. 인터뷰 때 입은 의상도 모두 시장에서 구입했다. 니트 재질의 후드 코트와 코듀로이 재질의 통 넓은 바지를 입고 다양한 색상의 팔찌를 레이어드하고 패션 반지까지 착용했다. 60대 패션 감각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센스다.

“평소 의상 코디는 모두 스스로 하고 있어요. 비싼 옷은 하나도 없어요. 보통 약속 장소와 사람의 분위기에 따라 콘셉트를 정한 후 기분에 따라 입는 편이에요.”

그는 모델이 천직이라고 말한다. 처음 카메라 앞에 섰을 때나 수십 명이 모인 패션쇼에 설 때도 긴장보다 설렘이 앞섰다.

데뷔한 직후부터 소셜 미디어를 타고 유명해졌고 국내 패션 매거진 화보 촬영은 물론이고 각종 패션쇼와 룩북 촬영을 진행했다. 최근에는 소극장에서 연극도 시작했다. 그야말로 제2의 인생이 펼쳐진 것이다.

“처음 모델을 하면서도 카메라가 겁나거나 떨리지 않았어요. 런웨이에 설 때도 쭉 해오던 일 같았죠. 일이 즐겁고 사람들의 관심을 즐기는 걸 보면 내 안에 잠재돼 있던 끼가 있었나 봐요.”

김 씨는 모델로서의 인생을 살며 활기를 얻었다. 그는 좋아하는 일을 하며 그 어느 때보다 만족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말했다.

“모델 활동을 하며 가장 활력을 얻는 요소는 ‘현장의 분위기’예요. 모델·사진작가·스타일리스트가 함께 협업하며 어떻게 하면 옷과 브랜드의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을지 맞춰 가는 과정이 가장 즐겁죠. 내가 한 일이 결과물로 남는다는 것도 매력적이죠. 결과물이 잘 나올 때가 가장 보람 있어요.”

그의 롤모델은 자기 자신이다. 한국에서 독보적인 시니어 모델인 만큼 자신만의 길을 닦아가고 있다.

“롤모델은 없어요. 이 나이에 무슨 롤모델입니까(웃음). 다른 사람의 인생을 흉내 내기보다 내 인생에 집중하고 바르게 살아가는 게 더 중요하죠. 나름대로 모델의 정의를 내리면서 배워 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는 제2의 인생을 준비해야 하는 60대가 좋아하는 일을 찾을 수 있는 ‘기회’라고 얘기했다.

“100세 시대여서 첫 직장을 그만두면 또 다른 일을 해야 하잖아요. 그동안 먹고살기 바빠 해야만 하는 일을 했다면 제2의 인생은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했으면 좋겠어요. 지금도 어떤 일에 흥미가 있고 어떤 일을 하고 싶었는지 고민하는 데 늦지 않은 나이라고 생각해요. 진정 원하고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면 노후에도 즐거운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요.”

유튜브를 하는 할머니에 이어 패션쇼에 서는 할아버지까지…. 고령사회에 접어들면서 활기찬 노후를 살아가는 액티브 시니어가 떠오르고 있다. 그동안 액티브 시니어는 새로운 소비의 주체로만 주목받아 왔다. 하지만 진정한 액티브 시니어는 이들처럼 삶을 주체적으로 만들어가며 인생 제2막을 즐겁게 사는 이들을 일컫는 게 아닐까.

“한국에서 아직까지 제2의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사람은 극히 일부라고 생각해요. 한국에서는 시니어들의 주체적인 경제활동이 보편화되지 않았잖아요. 저뿐만 아니라 모든 시니어들이 다 같이 조명 받을 수 있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어요. 또 시니어들이 설 수 있는 개방된 문이 많이 열렸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모두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잖아요.”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11호(2019.02.11 ~ 2019.02.17)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