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돋보기]

[곽수종의 경제돋보기] ‘소득 주도 성장’의 허와 실
[곽수종 한국조지메이슨대 경제학과 교수] 경제 이야기를 할 때 먼저 ‘발전’과 ‘성장’의 차이를 구별하자. 전자는 슘페터의 ‘창조적 파괴’에 준하는 ‘혁명적’ 변화를 의미한다. 반면 후자는 전자의 변화 이후 나타나는 다양한 파급효과를 의미한다. 발전을 촉발하는 사람을 기업가라고 한다면 성장은 경영인의 영역이다. 기업가와 경영인의 가치적 차이는 결국 누가 더 ‘오너십’을 강조할지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일반적으로 전문 경영인들은 기업가들보다 상대적으로 오너십이 약하지 않을까. 국가 경제를 국민이 주주인 주식회사에 비유하면 헌법적 가치, 즉 기업 내규에 따르면 대통령과 정부 각료들은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동안 이 모든 역할이 가능하다. 즉 창업자인 기업가도 될 수 있고 아니면 임기 동안 무난히 역할을 수행하는 경영인도 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의 대통령들과 정부 각료들은 모두가 기업가가 되고 싶어 하는 듯하다. 문제는 자칫 실수 하나로 기업을 통째로 부도나게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미 1997년 외환위기로 경험한 바다.

사회과학 발전이 어느 정도 자연과학의 변화를 떠받칠 수 있는 가치를 미리 형성하고 있어야 할 때가 많다. 예컨대 ‘인더스트리 4.0’의 기술적 진화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인공지능(AI)이 갖게 될 인식과 의식 가치의 판단 기준, 제도적 기반이 사회 공감대와 상식 수준으로 축적돼 있어야 한다. 글로벌 규범 가치 기준에 맞는 윤리와 도덕·사회적 정의 개념 등이 없다면 AI의 활용은 무의미하다.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동행은 ‘이인삼각(二人三脚)’ 경기와 같다. 자연과학의 발달이 경제적 잉여가치의 급등을 야기했고 뒤이은 사회적 부의 분배 왜곡과 자각(自覺)이 자유·평등·박애 정신으로 정의된 인권을 통해 재해석됐다. 그 와중에 잉여가치 분배 문제의 방법론을 놓고 사회주의 정치경제 체제가 탄생하게 됐다.

소득 발생을 위해서는 애덤 스미스 이후 주류 경제학이나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경제학 모두 투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즉 공산주의자들도 투자의 중요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투자에 대한 중요성을 부정한 결과는 구소련의 붕괴가 단적인 예다. 한편 투자는 당연히 기업의 몫이다. 기업은 소비자 소비 증가 추세를 눈여겨본다. 이윤 극대화가 목적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가계도 투자한다. 교육·금융·비금융 자산의 축적과 투자·투기 활동이 그러하다. 기업도 가계도 이윤 최대화와 소득 극대화가 목적함수다. 그렇다면 어떻게 소비는 증가할까. 당연히 소득이 증가할 때다. 그러니 소득을 늘려 소비를 증가시키면 투자도 늘고 경제가 성장 정체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논리가 나온다. 하지만 이런 논리는 1차원 논리다.

소득이 는다고 소비가 따라서 정비례해 증가하지는 않는다. 사실과 결단의 이원론적 논리는 불안하다. 결단이 비록 사실에 관계하기는 하지만 결코 사실로부터 나와야 한다거나 나올 수 있다는 인식은 위험하다. 만일 정부가 하나의 사실과 결과를 바꿔 보려고 노력할 때 이런 모든 결단은 사회경제적으로 다양한 사실 특히 경제 활동의 어떤 사실에 관계할 수 있고 경제 생활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의 모든 변화 가능한 사실들은 충분할 만큼 무수히 많은 서로 다른 결단 혹은 결정을 유발할 수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를 자신이 쳐 놓은 ‘도그마의 함정’이라고 정의한다.

서구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역사는 사실 피의 역사였다. 어쩌면 한국 경제가 필요로 하는 것은 ‘소득 주도 성장’이라는 자신이 쳐 놓은 도그마의 함정에서 허우적댈 것이 아니라 한 10~20년 다 같이 노력하자고 정직하게 주주인 국민에게 접근하는 것이 더 인간적인 해법이 아닐까.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13호(2019.02.25 ~ 2019.03.03)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