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인물에게서 배우는 경영 이야기 ⑤
문익점에게서 배우는 ‘오픈 이노베이션’
(사진) 경남 산청군 목면 시배유지 전시관 / 연합뉴스

[윤동한 한국콜마 회장] '오픈 이노베이션(open innovation)’은 4차 산업혁명 시대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다. 이제 한 기업이 혼자만의 힘으로 경쟁력을 키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지식재산권을 독점하면 실패한다. 공유와 개방의 힘을 발휘해 서로 협력하고 혁신을 추구해야 하는 시대다.

그런데 놀랍게도 일찍이 이 땅에 오픈 이노베이션을 도입한 기업가가 있었다. 바로 문익점이다. 그는 목화씨를 보급하고 새로운 산업을 일궈 ‘의류혁명’이라고 불릴 만한 혁신적인 변화를 이끌어 냈다. 여말선초(麗末鮮初) 정치경제적 격동기를 겪은 한반도에서, 그것도 이렇다 할 기술과 유통 물류망이 없던 시절 그는 어떻게 한반도 전체에 ‘이노베이션’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을까.

우선 문익점은 끊임없는 연구·개발(R&D)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그는 목화를 수입하는데 그치지 않고 우리 땅에서 직접 재배하고 전파하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했다고 전해진다. 기후와 토양이 서로 다르고 당시 기술이 부족했던 것을 감안하면 수많은 실패를 겪었을 것이다. 이를 극복하고 3년에 걸친 집중 재배 끝에 종자 채집에 성공했다.

목화 재배에 성공한 그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후속 관리를 자녀에게 맡겼다. 가족 사업으로 확대해 기술 개발에 집중하고 본격 확산에 나선 것이다. 그의 손자 문래와 문영은 목면 생산 기계를 개량하는 임무를 맡았다고 전해진다. 이때 문래가 실을 뽑기 위해 고안한 기구의 이름이 ‘물레’가 됐고 문영이 짠 천이 나중에 ‘무명’이 된 것도 이러한 유래를 갖고 있다.

문래는 “물레는 곧 하늘이 둥글고 땅이 평평한 것과 같은 이치로 지어졌다. 막대 하나가 다섯 가지를 꿰뚫어 남북 양극을 이루고 쇠로 된 가락은 음양의 이치로서 오른손으로 손잡이를 돌리고 왼손으로 고치(솜방망이)를 조정하면 새 날실 씨실이 연면하게 끊이지 않고 빠져나온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이처럼 문익점과 그의 ‘가족 기업’이 연구·개발을 통해 얻은 성과도 대단한 것이었지만 혁신형 기업가로서 그의 진면목은 목면 전파 방식에서 엿볼 수 있다.

‘거점 마케팅’을 적극 활용한 문익점

문익점은 자신이 그토록 고생해 고안한 노하우(전문 지식)를 아낌없이 공개했다. 그가 선택한 전략은 전국 각지의 유지들을 거점으로 삼아 목화씨와 재배 기술을 퍼뜨리는 것이었다. 그는 남평 문씨, 진주 정씨, 상주 주씨, 진양 하씨, 성주 이씨 등 지역의 유력 가문을 찾아갔다. 그들에게 신뢰를 심어주고 이로운 사업에 대해 설득했다.

제일 먼저 씨를 뿌리고 거둬들이는 방법을 설명했다. 그리고 목화에서 딴 목화송이를 말리는 작업부터 볕에 말리고 씨를 빼고 고치말이를 하고 물레질을 하는 과정을 빠짐없이 보여줬다. 그리고 당시로선 최첨단 기계였을 물레와 30종 정도로 이뤄진 베틀 등을 사용하는 기술도 전수했다. 정보를 나누고 기술을 공개하는 공유 경제, 오픈 이노베이션의 실천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현대의 ‘거점 마케팅’이 연상되는 사업 확장 방식도 인상적이다. 문익점은 정보를 나눈 유력 가문 간 경쟁을 유도해 목화 사업을 빠르게 확장시켰다. 그리고 각 가문을 거점 삼아 소비자, 즉 백성들에게 그가 개발한 우수한 제품을 알렸다.

목면은 지금까지 없던 따뜻함과 높은 활용도로 저절로 입소문이 났다. 지금은 너무나 대중화된 마케팅 기법 중 하나이지만 당시 그가 개발한 ‘훌륭한 상품’은 백성들의 경험담을 타고 쉽게 소문이 났을 것이다. 아마도 문익점은 입소문 마케팅의 선구자일 것이다.

이처럼 문익점은 전략적인 기술 공개와 치밀하고 똑똑한 마케팅으로 일종의 ‘선순환 생태계’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는 오늘날 기업 창업 과정과 닮아 있을 뿐만 아니라 오픈 이노베이션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그 덕분에 목화가 조선 경제의 핵심으로 자리 잡기까지 불과 10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만약 그가 실 뽑는 기술이나 물레 만드는 법, 사용법 등을 공개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 조선의 의류혁명은 그렇게 빨리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특정 지역에 한정된 기술로만 남았을지 모른다.

문익점이 끊임없는 R&D와 오픈 이노베이션을 통해 개발과 확산에 성공한 후 조선 왕조도 목면 재배 확대에 힘을 실었다. 특히 세종은 추운 북쪽 지방에서 목면을 재배할 수 없어 군인과 백성이 모두 추위에 떨며 지내고 있다는 것을 걱정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세종은 재위 17년인 1435년 “함길도는 기후가 남방과 달라 한전(旱田)을 경작하고 있는 실정이므로 하삼도(충청·전라·경상도)에서 면 종자를 거둬 함길도에서 면화를 키우라”고 명하기도 했다.

또 성종도 목면 재배지 확산에 큰 관심을 가졌고 중종 때 재배 지역이 평안도까지 확산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한반도의 삶을 확 바꾼 기업가적 혁신

이처럼 문익점의 기업가적 혁신은 한반도 전체를 뒤바꿔 놓았다. 그의 성과가 없었다면 목면이 백성들의 일상생활 곳곳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것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혁신을 가능하게 한 원동력이다.
바로 애민정신이다.

문익점은 상업적 이익을 취한 기업인이라기보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 힘쓴 인물이었다. 목면을 통해 가난한 백성들은 추운 겨울 몸을 보호할 따뜻한 옷을 선물 받았다. 양반 사대부와 일부 부유 계층만이 아닌 모든 백성을 위한 사업을 펼침으로써 사회공헌에 앞장선 것이다. 이는 현대의 어떤 기업 경영자도 하지 못한 놀라운 업적이다. 그 밑바탕에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자리 잡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윤동한 회장 약력 : 윤동한 한국콜마 회장은 한국 화장품과 제약 산업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윤 회장은 농협중앙회를 거쳐 1974년 대웅제약에 입사해 부사장에까지 올랐다. 하지만 창업의 꿈을 이루기 위해 1990년 한국콜마를 설립하고 국내 화장품업계 최초로 제조업자개발생산(ODM) 시스템을 도입해 매출 1조원의 기업으로 키워 냈다. 2017년엔 이순신 리더십을 전파하는 사단법인 서울여해재단을 설립해 이사장을 맡고 있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15호(2019.03.11 ~ 2019.03.17)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