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돋보기]
[차은영의 경제돋보기] ‘시계 제로’의 한국 경제
[차은영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 통계청이 발표한 바에 의하면 지난 8월 소비자 물가가 전년 동기 대비 0.04% 하락했다. 소비자물가가 올해 7월까지 계속해서 0%대를 유지하다가 급기야 아래로 떨어진 것이다.

1965년 통계작성을 시작한 이후 월간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한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2019년 2분기 국민소득(잠정)’에 따르면 국가경제 전체의 물가수준을 나타내는 국내총생산(GDP) 디플레이터도 2분기에 전년 동기 대비 0.7% 하락했다. GDP 디플레이터는 지난해 4분기부터 연속 3분기에 걸쳐 마이너스를 기록했고 이것은 외환위기 이후 처음이다.

언뜻 보면 소비자물가가 감소한다는 것은 나쁘지 않다고 느낄 수 있지만 저물가가 지속된다면 내수침체가 가속화하고 소득 감소로 이어져 불황이 장기화할 가능성도 있다.

물론 물가가 급속히 하락한 것이 수요 측면보다 농산물이나 국제 원유 가격의 변화에 따른 공급 측 요인이고 일시적 변동성으로 봐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주요 거시경제 지표와 글로벌 경제 환경의 움직임을 보면 안일하게 대처하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디플레이션 늪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골드만삭스와 모건스탠리 등 해외 투자은행들이 한국의 거시경제 펀더멘털이 약화되고 있다는 의견과 함께 1%대 성장전망치를 내놓고 있다. 전문가들은 올해 경제성장률이 2%를 넘지 못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한국 경제를 지탱하고 있는 수출이 9개월 연속 감소하고 있고 민간소비의 증가세도 완연히 둔화되고 있다.

설비투자와 건설투자도 여전히 지지부진하다. 정부부문의 성장률 기여도가 1.2%포인트인 반면에 민간부문의 기여도는 오히려 마이너스 0.2%포인트로 나타난 것을 보면 정부의 재정지출 증가로 그나마 경제성장률 1%대를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세계경제는 저성장·저물가·저금리라는 이른바 3저 시대에 진입하고 있다. 유럽 경제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독일의 2분기 성장률이 전 분기 대비 마이너스 0.1%를 보였고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의 후유증을 겪고 있는 영국의 2분기 성장률도 마이너스 0.2%를 기록했다. 내홍에 휩싸인 홍콩의 2분기 성장률도 마이너스 0.4%로 나왔다.

저성장으로 인한 실물경제의 악화는 저금리로 이어진다. 일본을 비롯한 일부 국가에서만 나타나던 마이너스 금리 현상이 독일·프랑스·스위스를 비롯한 전 세계로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나마 건전한 상태를 유지하던 미국도 더 이상 안심할 수 없는 상황으로 가고 있다. 실제로 그린스펀 미국 중앙은행(Fed) 전 의장은 최근 인터뷰에서 “마이너스 금리가 미국으로 확산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밝힌 바 있다.

더구나 미국의 장·단기 금리차가 금융 위기 직전인 2007년 이후 12년 만에 역전됐다. 일반적으로 미래 성장에 대한 기대로 인해 장기금리가 단기금리보다 높게 책정되지만 미래가 현재보다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으로 인해 단기금리가 더 높아지게 된 것이다. 이 경우 대체로 미국은 경기 침체를 경험했다.

미·중 무역갈등이 장기화하고 글로벌 경제의 동반 하락이 본격화된다면 대외 비중이 높은 한국 경제의 여건상 물가하락과 경기 침체가 복합된 디플레이션 국면을 피하기 어렵다.

0%대의 출산율과 가장 빠른 고령화 속도, 불확실성을 양산하는 정부를 고려하면 디플레이션을 동반한 장기 불황에 대한 우려가 기우는 아니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43호(2019.09.23 ~ 2019.09.29)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