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돋보기]
제 역할 못하는 WHO…확산되는 국제기구 무용론 [강문성의 경제 돋보기]
[한경비즈니스 칼럼 = 강문성 고려대 국제학부 교수] 2019년 12월 중국 우한에서 처음 발생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코로나19는 중국 전역을 넘어 국경을 넘더니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지역으로 확산됐고 이탈리아·스페인 등 유럽과 미국·중남미·러시아·아프리카 등 전 세계로 확산되면서 팬데믹(세계적 유행)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코로나19와의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전 세계 모든 국가의 정부는 각국이 보유한 방역 시스템을 100% 가동하고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일련의 사태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 보건·위생 분야의 국제적 협력을 위해 1948년 설립된 세계보건기구(WHO)의 역할은 기대 이하다. 코로나19가 지닌 전염력과 확산 속도는 과거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나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와는 전혀 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WHO는 지난 3월 11일이 돼서야 ‘팬데믹’을 선언했다.

‘유행성 질병과 전염병 대책’을 수립하는 것이 주요 업무인 WHO는 한국은 물론 전 세계가 ‘마스크 사용법’과 같은 비교적 단순한 행동과 관련된 혼란에 직면했을 때조차 아무런 지침을 마련하지 못했다. 이에 WHO와 같은 ‘국제기구의 무용론’이 점차 확산되고 있는 실정이다.

사실 이와 같은 국제기구에 대한 무용론은 한국에는 새삼 새로울 것이 없다. 왜냐하면 1998년 금융 위기를 겪으면서 국제통화기금(IMF)이 제시한 정책 방향에 수많은 한국 기업과 노동자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 금융 위기를 겪는 국가마다 위기가 발생하게 된 배경이 다르고 그 경제가 성장해 온 배경도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IMF 구제금융의 처방은 ‘금리 상승과 엄격한 재정 긴축을 통한 구조조정’이라는 천편일률적인 조치였다. 마치 사람의 머리 크기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원 사이즈 피트 올(one size fits all)’이라는 문구 하나만 붙이고 모자를 판매하는 것과 같은 처방이 내려졌다. 개별 국가의 상황을 분석하고 그 상황에 맞게 경제 문제를 해결하는 ‘맞춤형(customized)’ 처방이 아니었다.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나타난 미국과 중국의 무역 분쟁에 대한 세계무역기구(WTO)의 역할 역시 제한적이었다. 물론 WTO와 같은 다자 무역 체제에 부정적 시각을 지닌 트럼프 행정부의 출범에 WTO가 본연의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미국의 반대로 임기가 종료된 상소기구(Appellate Body) 위원의 후임을 선임하지 못해 상소기구 위원이 1명(중국인) 남아 있는 상황에서 분쟁 건당 최소 3명의 상소기구 위원이 심리해야 하는 원칙이 지켜질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회원국 간 분쟁을 해결해야 하는 상소기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점 역시 고려돼야 한다. 그런데도 WTO는 그동안 ‘회원국 주도(member-driven) 국제기구’를 강조하며 회원국 간의 무역 분쟁이나 보호무역주의적 정책이 확산될 때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물론 ‘국제기구의 무용론’이 확산되는 것에는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도 기인한다. 2017년 유엔 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에서 탈퇴한 미국은 2018년 유엔인권이사회 역시 탈퇴했다. 그 이후 독일과 프랑스 등 서유럽 국가를 중심으로 국제기구를 개혁해야 한다는 주장이 국제 사회에서 점차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한국은 국제기구 개혁 논의 초기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할 필요가 있다. 국제기구가 어떠한 방향으로 개혁되고 변화되는지에 따라 국제 경제 질서가 정해지기 때문이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71호(2020.04.06 ~ 2020.04.12)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