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묻지 않은 조조 휘하에 난세의 인재들이 모여들었던 이유는

[문화심리학으로 풀어보는 삼국지] 지조는 고귀하고 배신은 간교한가
배신은 다른 사람의 ‘믿음을 저버리는’ 행위다. 상대방에 대한 믿음이 전제돼야 배신도 성립된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말도 그래서 나왔다.

가장 흔한 것은 남녀 사이의 배신이다. 고려가요 ‘가시리’는 정인(情人)의 배신을 애절하게 노래한다. “가시리 가시리 잇고 나는/ 버리고 가시리 잇고 나는/ 위 증즐가 태평성대.”

김소월의 ‘진달래꽃(1924년)’도 같은 정서다.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1960년대 저음 가수 배호가 부른 ‘배신자’도 마찬가지다. “더벅머리 사나이에 상처를 주고/ 너 혼자 미련 없이/ 돌아서서 가는가/ 배신자여 배신자여/ 사랑의 배신자여.”

그러다가 1988년 MBC 강변 가요제에 이상은이라는 여가수가 ‘담다디’라는 노래를 들고 나타난다. 전통적인 애상(哀傷) 정서가 깨지는 이변(?)이었다. 그녀는 남자처럼 큰 키에 짧게 친 머리를 마구 흔들면서 노래한다. 이상은은 한민족 역사에 활짝 웃는 얼굴로 이별을 노래한 최초의 가수일 것이다. “담다디 담다디 담다디 담/ 그대는 나를 떠나려나요/ 내 마음 이렇게 아프게 하고/그대는 나를 사랑할 수 없나요.”

‘담다디’는 확실히 이변이었다. 바로 이듬해 발표된 조용필의 노래 ‘큐’가 여전히 기존 정서를 확고히 지키고 있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너를 용서 않으니/ 내가 괴로워 안 되겠다/ 나의 용서는 너를 잊는 것/ 너는 나의 인생을 쥐고 있다 놓아 버렸다/ 그대를 이제는 내가 보낸다.”
남녀 사이의 사랑과 배신을 선비나 장수로 옮기면 지조와 변절, 혹은 의리와 배반 등으로 바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 조지훈은 ‘지조론(志操論)’에서 이렇게 말한다.

“지조란 것은 순일(純一)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며 냉철한 확집(確執)이요, 고귀한 투쟁이기까지 하다.”

역사를 돌아보면 지조를 지킨 인물도 많지만 배신자나 변절자도 많다. 중국 상나라의 백이와 숙제 형제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목숨을 버린 충절의 대명사다. 비슷한 경우가 조선시대 수양대군의 모반에 반대하고 단종에 대한 의리를 목숨 바쳐 지키려고 한 사육신(死六臣)이다.

배신자도 즐비하다. 자신의 은인인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암살에 가담해 카이사르로부터 “너마저!”라는 소리를 들었던 브루투스가 먼저 떠오른다. “두견새가 울지 않으면 죽여 버린다”고 말한 것으로 유명한 일본의 오다 노부나가도 최측근인 아케치 미쓰히데의 배반으로 최후를 맞는다.


배신의 본능에 충실하다
‘삼국지’에서 워낙 유명한 여포의 배신 이야기는 오늘은 논외로 하자. ‘책략에 실수가 없고 사태 변화를 꿰뚫고 있었다’는 평가를 받는 조조 막하의 유명한 참모로 가후라는 자가 있다. 그의 삶은 배신의 일생이다. 당초 동탁의 참모였던 가후는 동탁의 잔당인 이각, 곽사의 휘하로 옮겼다가 오히려 잔당 토벌군인 단외에게로 투항했다. 다시 장숙에게 의지했다가 장숙을 설득, 조조에게로 넘어간다. 가후의 좋은 머리가 주군의 승리에만 쓰이지 않고 제 목숨을 구걸하는 ‘주군 바꿔치기’에도 쓰인 것이다.

가후의 줄타기는 동탁의 참모였던 채옹과도 뚜렷이 구별된다. 채옹은 대학자이면서도 죽음을 무릅쓰고 동탁의 시체 위에 엎드려 대성통곡했다. 다들 몸을 사려 간신 동탁의 죽음을 애써 외면하는데, 유독 채옹만 자신을 알아준 주군 동탁을 애도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가후 뺨치는 ‘배신 본능’의 소유자가 있다. 촉한의 장수 맹달이다. 맹달은 애초 유장의 참모였다가 유비에게 간다. 맹달은 관우의 긴급 구원 요청을 묵살, 관우를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유비의 문책이 두려웠던 맹달은 조조의 위나라에 투항한다. 조조는 ‘항복한 장수는 중용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어기고 맹달을 중용한다. 조조가 죽고 조예가 즉위한 후 입지에 불안감을 느낀 맹달은 북벌에 나선 제갈량과 내통하는 모반을 꾀하다가 사마의에게 들통이 나 결국은 참수됐다.


목숨으로 지조 지킨 영웅들
꿋꿋하게 지조를 지킨 이들도 많다. 조조의 회유에도 끝까지 넘어가지 않고 지조를 지킨 관우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목숨을 걸고 적진에 단기필마로 뛰어들어 주군의 아들을 구한 조자룡도 있다. 조자룡은 자신을 알아주는 주군 유비에게 “죽어 간과 뇌가 땅바닥에 으깨져도 충절을 버리지 않겠다”며 맹세한다. 간뇌도지(肝腦塗地)의 고사가 여기서 나왔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대체로 지조를 지킨 이들이 고려 말 충신인 정몽주의 ‘단심가(丹心歌)형’이라면 배신자·변절자는 이방원의 ‘하여가(何如歌)형’이라고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방원이 정몽주에게 회유의 운을 띄웠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하여 백년을 살아보세.” 정몽주가 바로 받았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우리는 나관중의 위대한 ‘촉한 정통론’의 음모(?)에 힘입어 유비는 실리보다 의리를 중시한 만고의 성군(聖君)이고 조조는 권력을 위해 신의를 헌신짝처럼 버리는 천하의 간웅이라는 프레임에 세뇌돼 있다. 그래서 유비가 적어도 다섯 번 이상 주인을 바꾼 사실을 간과한다. 유비는 처음 공손찬 휘하에 있다가 서주목인 도겸에게 귀순한다. 도겸이 죽자 서주를 차지해 서주목이 된다. 그 후 여포에게 투항해 소패성에 머무른다. 여포에게 쫓기자 조조에게 의탁했다가 원소를 찾아가고 나중에는 유포에게 귀순한다. 유비야말로 가후나 맹달이 무?置?‘줄타기의 천재’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유비에 비하면 오히려 조조가 매력적이다. 조조는 “남을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확신했다. 조조는 “내가 남을 배신할지언정 남이 나를 배신하게 하지는 않겠다(寧敎我負天下人, 敎天下人我負)”는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난세의 간웅다운 배포다.

조조의 이런 화끈한 성정 때문에 수많은 인재들이 조조 휘하에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조조는 자신의 성격처럼 과거를 묻지 않고 능력을 중시했다. 지조와 의리를 따지는 유비는 아이러니하게도 항상 인재난에 허덕였다. 결국 천하를 통일한 것도 조조가 아닌가.

사족. 조지훈 선생의 말씀처럼 지조란 ‘불타는 정성, 눈물겨운 정성, 고귀한 투쟁’이기까지 하다. 지조를 지키는 게 그만큼 힘들다는 소리일 것이다. 더구나 세상은 항상 올곧은 사람들만 모여 있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치세도 그러한데 하물며 난세의 삼국시대에는 오죽했으랴.


김진국 칼럼니스트, ‘재벌총수는 왜 폐암에 잘 걸릴까?’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