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두번은 가능하지만 지속될 수 없어…천성 벗어난 그릇된 집착 버려야

[김경집의 인문학 속으로] 발뒤꿈치 들고는 오래 서지 못한다
장자(莊子)는 어설픈 완벽이나 지나친 도덕과 이념을 비판했다. 그것은 자칫 편벽이나 집착으로 나타난다. 집착은 결국 욕망의 극단적 애착이다. 자유롭지 못하면 그것은 결국 자신을 옥죄는 구속일 뿐이다. 심지어 장자는 백이(伯夷)에 대해서도 ‘장자’ 외편 ‘변무(騈拇)’를 통해 이렇게 비판했다.

“백이는 충성이라는 명예 때문에 수양산 아래에서 죽었고 도척은 도둑질이라는 이욕 때문에 동릉산 위에서 죽었다. 이 두 사람이 죽은 곳은 다르지만 천성대로 살지 않고 자기 목숨을 해쳤다는 점에서는 똑같다. 어찌 꼭 백이가 옳고 도척이 잘못이라고 하겠는가.”


남의 눈보다 내면의 참모습에 주목하라
백이가 충성을 위해 수양산의 고사리조차 뜯어 먹지 않고 죽은 것은 위대한 충성이라고 상찬할 수도 있겠지만 장자의 눈에는 그것도 자기 충절의 완벽함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려는 욕망과 다르지 않다고 보였을 뿐이었으니 그렇게 신랄한 비판이 나오게 된 것이다. 장자가 유가의 가르침이 인의니 예악이니 하는 정형화된 형식과 도구에 얽매여 자연스러운 내면의 참모습을 일그러뜨렸다고 보는 것도 바로 외부의 것을 기준으로 삼는 데서 오는 병폐라는 인식에서 기인한다. 장자는 그런 기준 설정 자체가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불가능한 것이라고 타이르며 ‘변무’에서 또 이렇게 말했다.

“스스로 자연스럽게 보지 않고 남에게 얽매여 보고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고 남에게 사로잡혀 만족하는 자가 있다. 이는 남의 기준으로 흡족해할 뿐 스스로 참된 만족을 얻지 못하는 자이다. 또 남의 즐거움으로 즐거워할 뿐 스스로의 참된 즐거움을 모르는 자이다.”

장자의 관점에서 보면 완벽 혹은 완전이라는 것은 남의 눈에 자신을 맞추려고 하는 것이다. 스스로 만족하고 약간의 모자람이나 흠결에 대해서는 조금 너그러워지는 것도 좋다. 다음에 더 잘해서 그것을 채우고 그다음에는 또 다른 모자람을 채우면 그것으로 족하다. ‘자뻑’은 곤란하지만 적당한 관대함은 필요하다. 남의 눈을 의식하고 거기에 기준을 맞추니 만족이라는 것을 모른다. 설령 만족한다고 하더라도 남의 눈에 맞춘 상태라면 대리 만족이거나 자기기만이기 쉽다.

장자의 눈으로 보면 ‘공자의 말씀’이니 ‘예언자의 말씀’이니 하는 따위도 결국은 왜곡이고 거짓이 될 뿐이다. 중요한 것은 내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이고 기쁨이다. 남이 아무리 칭찬하고 기뻐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나를 사랑하지 못하고 기뻐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남의 삶이다.

장자는 모든 것은 상대적이라고 가르친다. 물론 그도 상대주의의 폐해인 무책임이나 회피의 폐해를 모르는 바 아니었고 또한 그런 것을 조장하거나 가르치지도 않았다. 장자는 지나친 엄격성과 절대주의는 어리석은 교조일 뿐이라고 타이른 것이다. 장자를 특히 좋아했던 소동파(蘇東坡)가 전한 실화 한 토막이 떠오른다.

“어떤 사람이 유응지에게 왜 자신의 신발을 신고 있느냐고 따지자 유응지는 곧 벗어 주었다. 얼마 후 그 사람이 자기의 진짜 신발을 찾았다고 신발을 들고 오자 받지 않았다.”

유응지가 밖으로 나오면서 자기 신발을 제대로 신고 왔는데도 뒤따라 나오던 이웃이 왜 자기 신발을 신고 있느냐고 따진 것이다. 다음날 그 신발을 들고 와서 자기 신발을 다른 곳에서 찾았다며 돌려주자 받지 않은 유응지의 속셈은 무엇일까. 기왕 자기 것이라고 가져갔으면 그만이지 뭘 되돌려 주느냐는 앙금일 수도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소동파가 전하는 또 하나의 이야기를 통해 그게 뭐 그리 대수냐는 해석이다.

“심인사도 이웃 사람이 와서 자신의 신발을 잘못 신었다고 하자 웃으며 말했다. ‘이게 당신 거였소?’ 그러면서 곧바로 건네줬다. 그런데 그 이웃이 나중에서야 잃었던 진짜 자신의 신발을 찾고 가지고 갔던 신발을 돌려보내자 웃으며 ‘당신 것이 아니었소?’ 하고는 받았다.”

소동파는 이 일화가 양나라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말한다. 유응지는 관대하기는 했지만 한 번 자기 것이라고 가져간 것은 이미 내 것이 아니라는 기준을 갖고 있었다. 그게 마음속에 앙금으로 남았다. 그 앙금은 왜 생겼을까. 한 번 떠난 물건은 자기의 것이 아니라는 기준틀이 있었고 받지 않겠다는 결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인사는 그런 기준틀에 굳이 얽매이지 않았기에 무심히 받은 것뿐이다. 심인사는 마음에 기준도 없고 앙금도 없다. 그가 무골호인이어서가 아니다. 관대함을 넘어서 마음속에 아무런 기준이나 결의 같은 것 없이 무심히 응한 것이다. 소동파는 심인사를 이렇게 평했다.

“이는 비록 작은 일이지만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심인사 같아야지 유응지처럼 해서는 안 된다.”

따지는 건 자기 마음속에 기준선을 긋고 있는 주체가 있기 때문이다.


장자가 아내의 죽음에도 웃은 까닭
장자는 아예 대놓고 군자 따위에 묶이지 말라고 타이른다.
“그러므로 소인이 되지 말고 자신의 천성을 따르라. 군자가 되지 말고 자연의 섭리에 따르라. 일의 잘잘못을 따지지 말고 자연의 대도에 상응하라. 자기의 행위를 일관되게 하려고 하지 말고 정의를 지키려고 하지 말라. 자기의 참된 마음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장자’ 도척 편)

마음속 깊은 곳의 참된 마음에 따르는 건 외부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자신을 버리지 말고 밖에서 만들어진 기준에 휘둘리지 않는 것이다. 만물은 변한다. 우리는 그 변화하는 표면의 모습에 이끌려 살기 쉽다. 하지만 그건 거죽일 뿐이다. 확고한 규범이나 기준이라는 것조차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타율적 틀에 불과하다. 심지어 장자는 아내가 죽었을 때 두 다리를 뻗고 앉아 그릇을 두드리며 노래를 불러 절친한 친구 혜시를 기함시켰다. 혜시가 그 황당함을 나무라자 장자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나라고 아내가 죽은 뒤에 어찌 슬프지 않았겠나.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태어나기 전 아내의 삶이란 원래 없었던 것 아닌가. 아내는 지금 천지라는 거대한 방에 누워 있는데, 내가 소리를 질러가며 울고불고한다면 그건 하늘의 섭리를 모르는 일 아닌가. 그래서 곡을 그친 것이네.”(‘장자’ 지락 편)

범인이 그리 했다면 누구나 손가락질하며 미친놈이라고 욕을 해댔을 것이다. 장자쯤 되니 그 일조차 그의 그릇을 재는 일화로 남을 수 있다. 솔직히 나는 장자의 경지 근처에도 다다를 그릇도 아니거니와 그러고 싶은 생각도 없다. 그러나 적어도 그의 커다란 사고에서 배울 것이 많다고 생각한다. 장자의 대선배인 노자는 우리가 외부의 기준에 따라 살면서 완벽해 ‘보이고 싶어’하는 어리석음을 다음과 같은 비유로 설명한다.

“발뒤꿈치를 들면 오래 서 있지 못한다. 보폭을 넓게 하면 오래 걷지 못한다.”(‘노자’ 24장)
이 얼마나 절묘한 비유인가. 완벽에 대한 그릇된 집착의 극단은 왜곡을 불러오고 삶의 본질까지 망가뜨린다. 한두 번은 발뒤꿈치를 들고 서 있을 수 있고 큰 걸음으로 걸을 수 있다. 하지만 잠깐뿐이다. 이 왜곡은 비단 자신만 망가뜨리지 않는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까지 망가뜨리기 쉽다. 간단히 말해 완벽주의자는 자신에게든 남에게든 관대함이 없는 사람이고 밖의 시선과 기준에 따라 휘둘려 사는 어리석은 사람일 뿐이다.

보다 나은 결과를 위해 애쓰는 건 권할 일이다. 그러나 매사 완벽하지 않으면 스스로 용납되지 않고 다른 이들까지 들볶는 건 깊은 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