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후 30년은 더 살아야…‘웰빙’ 아닌 ‘웰다잉’의 시대

[문화심리학으로 풀어보는 삼국지] 곱게 늙고 아름답게 죽을 의무에 대하여
“아, 리어, 리어, 리어여! 어리석음은 불러들이고 귀중한 분별력은 내쫓아 버린 이 머리통을 부숴 버려라!”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리어왕(King Lear)’에 나오는 리어왕의 독백이다. 고대 브리튼 왕국의 리어왕은 말년에 세 명의 딸 중에서 가장 효녀에게 왕국을 물려주고 자신은 편안하게 여생을 보내려고 한다.

리어왕은 믿었던 막내딸 코델리아의 무덤덤함에 실망해 그녀를 매몰차게 내쫓았고 첫째와 둘째 딸의 감언이설에 속아 왕권을 포함해 모든 것을 잃고 실성해 광야를 헤맨다. 마침내 다시 만난 코델리아에게 용서를 구하지만 결국 코델리아는 음모에 희생되고 딸의 주검 위에서 울부짖다가 리어왕 자신도 죽고 만다. 잘 다스려 온 가정과 나라가 말년의 판단 착오로 풍비박산이 난 것이다. 리어왕의 이야기는 우리가 인생의 마지막을 어떻게 지혜롭게 보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미국의 제48대 대통령인 지미 카터(1924~)를 한 번 살펴보자. 미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해군 대위로 전역한 카터 전 대통령은 땅콩과 면화 농사를 지어 부를 쌓았다. 카터 전 대통령을 얕잡아 보는 사람들은 그를 ‘땅콩 농사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말년의 극과 극, 리어왕과 지미 카터
이후 조지아 주 상원의원, 주지사 등을 거쳐 1976년에 미합중국의 대통령에 취임한다. 도덕 정치를 표방한 카터 전 대통령은 캠프 데이비드 협정, 이집트·이스라엘 평화협정 체결 등 각국의 평화 유지와 인권 개선을 위해 많이 노력했다. 하지만 오일 쇼크 등으로 인해 경제정책에 실패한데다가 이란 인질 사태까지 터지면서 무능하고 실패한 대통령으로 낙인 찍혀 재선에 실패하고 로널드 레이건에게 정권을 넘겨주고 말았다.

그러나 카터 전 대통령은 ‘끝이 좋으면 다 좋아(All’s Well That Ends Well)’라는 셰익스피어의 희극처럼 인생 역전을 일궈 냈다. 재임 중 ‘가장 인기 없는 대통령’이었던 카터 전 대통령은 현재 ‘가장 존경받는 전임 대통령’으로 평가받고 있다.

카터 전 대통령은 미국은 물론 제3세계 인권과 환경문제에서부터 국제분쟁의 조정에 개입했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0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해비타트 운동의 일환인 ‘사랑의 집짓기 운동’에 적극 참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저서 ‘나이 드는 것의 미덕’이 상징하는 것처럼 카터 전 대통령은 인생의 마지막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리어왕과 뚜렷하게 대조를 이룬다.

“영감이 끊기고/ 정신이 냉소의 눈(雪)에 덮이고/ 비탄의 얼음(氷)에 갇힐 때/ 그대는 스무 살이라도 늙은이라네/ 그러나 머리를 높이 들고 희망의 물결을 붙잡는 한/ 그대는 여든 살이어도 늘 푸른 청춘이라네.”

사무엘 울만이 78세에 지은 ‘청춘’이라는 시의 마지막 연이다.

나이가 많은데도 젊은이 못지않은 기백과 능력이 있는 사람을 우리는 노익장(老益壯)이라고 한다. 사무엘 울만이 말한 ‘여든 살이어도 늘 푸른 청춘’이 노익장에 딱 맞는 예일 것이다. 중국 한나라 때 장군으로 마원(馬援)이 있다. 남만 정벌을 나서려는 그를 두고 광무제가 말렸다. “경은 너무 연로하오!”

마원이 발끈했다. “폐하! 소신이 예순 둘이오나 지금도 능히 갑옷을 입고 말을 탈 수 있사옵니다.” 황제가 탄복하며 출정을 허락했다. “대장부가 뜻을 품었으면, 궁할수록 더욱 굳세고, 늙을수록 더욱 기백이 넘쳐야 한다(丈夫爲志, 窮當益堅, 老當益壯).” 마원이 평소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다. 여기서 노익장이라는 말이 나왔다.

‘삼국지’ 세계에서 노익장의 대표는 조자룡일 것이다. 오호장군(五虎將軍)의 한 사람으로 청홍검(靑紅劍)을 가지고 다녔으며 창술의 일인자였다. 오호장군은 유비 막하 5명의 맹장을 말하는데, 관우·장비·조자룡·마초·황충이 그들이다. 조자룡이 당양파 싸움에서 유비의 부인인 감부인을 구하고 미부인이 죽으면서 맡긴 유비의 아들 아두(阿斗)를 품에 안고 단기필마로 적의 진중을 돌파한 일은 유명하다.

제갈량이 위나라를 치기 위해 북벌을 단행할 때 조자룡은 이미 나이가 일흔 살의 고령이었지만 소수의 군대를 이끌고 출정해 조조의 대군에 맞섰다. 위나라 장수 5명을 혼자 상대해 전부 목을 베는 위용을 떨쳤다. 일을 맡기면 목숨을 걸고 완벽하게 일을 처리했기에 유비나 제갈량의 신임이 두터웠다. 2008년에 나온 영화 ‘삼국지:용의 부활’은 백전노장 조자룡이 주인공이다.


‘파더 쇼크’ 넘어 ‘노인 쇼크’로
노익장 하면 황충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사람이다. 황충은 신궁(神弓)이라고 불릴 정도로 뛰어난 활솜씨로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고 한다. 풍부한 전투 경험과 탁월한 전략을 동시에 갖춘 노장 황충은 유비가 한중을 취하고자 할 때 나이 이미 70이 넘었지만 역시 노익장을 자랑하는 동료 장수 엄안과 함께 맹활약하며 요충지인 천탕산을 점령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정군산 전투에서는 조조의 최고 심복인 하후연의 목을 베어 엄안과 함께 유비가 한중을 차지하는 데 일등 공신이 된다.

오나라의 용장 황개도 빼놓을 수 없다. 알다시피 적벽대전을 앞두고 황개는 스스로 대도독 주유를 찾아간다. “제가 대도독께서 의견을 내면 대놓고 반대할 것이오니, 저를 엄히 문책해 태형(笞刑)에 처해 주시오. 그러면 앙심을 품은 척하며 조조에게 찾아가 거짓 항복을 하고 때를 보고 있겠습니다!” 대의를 위해 자신의 몸을 희생하는 이른바 고육지책(苦肉之策)이다. 황개는 거짓 투항했다가 적벽의 바람이 동남풍으로 바뀌어 불자 곧 바로 조조의 선단(船團)에 불을 질러 적벽대전 승리의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다.

‘파더 쇼크(Father Shock)’라는 말이 있다. 인류가 생겨난 이후 남성은, 특히 아버지는 밖에 나가 사냥만 해오면(즉 회사에서 돈만 벌어오면) 그것으로 임무 완수였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어 오늘날의 남성들은 유사 이후 처음으로 가정 내부의 아이 양육과 가사 노동에 동참해야 하는 충격적인 딜레마에 빠져 있다. 부부 맞벌이, 핵가족화 등의 영향으로 양육과 가사를 돕던 조부모의 역할이 줄어든 때문도 있을 것이다.

같은 논리로 지금 현대사회에는 ‘노인 쇼크(Eldery Shock)’라고 할 수 있는 급속한 변동이 갑자기 닥쳐왔다. 60세를 평균 정년 연령이라고 본다면 퇴임 후 몇 년만 더 살면 되던 시절을 지나 이제 길게는 30~40년을 더 살아야 하는 초유의 현실에 직면해 있다. 노인들은 심신 양면의 건강, 경제적 문제, 실업에 따른 역할 상실감 등 ‘4고(四苦)’만 걱정해야 할 상황이 아니다.

이제는 늙지 않기 위해서(antiaging)가 아니라 잘 늙기 위해서(wellaging), 또한 단순히 잘사는 것만(wellbeing)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잘 죽을 것인가(welldying) 하는 문제까지 동시에 해결해야만 한다. 더구나 리어왕이 될 것인가, 지미 카터가 될 것인가는 개인적 선택 사항이 아니다. 개인적 차원의 노력과 사회 정책적인 배려가 함께 가야 할 문제다. 노인들이 조자룡이나 황충처럼 노익장의 기개를 뽐내던 시절은 이미 세월의 강물 속으로 흘러가 버린 것일까. 이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고 선언해야만 하는 걸까.


김진국 칼럼니스트, ‘재벌총수는 왜 폐암에 잘 걸릴까?’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