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나 남기는 여행은 그만…불편과 낯섦이 여행의 참맛

[김경집의 인문학 속으로] 설레는 여행, ‘주제’를 갖고 떠나자
여행이라는 말은 듣기만 해도 설레고 행복한 낱말이다. 그래서 여름휴가를 떠나기 전 많은 이들이 힘들고 어려워도 여행 갈 날만 기다리면서 애써 참는다. 올여름도 수많은 사람들이 여름휴가지에서 긴장과 피로를 내려놓은 채 쉬고 왔을 것이다. 흔히 여행을 가기 위해서는 최소한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한다. 건강과 시간 그리고 돈이다. 젊은이들은 건강하고 시간은 있으되 돈이 없어서, 중·장년들은 건강하고 돈은 있지만 시간이 없어서, 노년층은 시간과 돈은 있지만 건강을 잃어서 여행, 더욱이 해외여행이라도 갈라치면 더 어렵다고 한다. 이 세 가지를 동시에 갖는다는 건 생각만큼 쉽거나 흔한 일은 아니다.

여행을 떠날 때 무엇을 가지고 가면 좋을까. ‘주제’를 갖고 떠나라고 권하고 싶다. 먼저 주제라는 낱말에 주목해 주면 좋겠다. ‘목적’이 아닌 주제라는 말 속에는 그 범위의 넓고 좁음을 떠나 자기 스스로가 주체가 돼 어떤 문제의식을 갖는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저 유명한 곳, 명승지를 둘러보는 여행보다 하나의 주제를 설정해 떠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건축물을 중심으로 다닌다든지, 또는 음식을 주제로 삼는다든지 민속이나 풍습을 관찰하고 조사하는 등의 여행을 말한다. 그저 눈으로 훑어보기만 하지 말고 사전 조사도 해가며 지식과 정보를 얻는다면 훨씬 좋을 것이다.


여행은 자신을 만나러 떠나는 것
특정 지역을 택해 머무르며 주제 의식을 갖고 여행한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기(Italienische Reise)’일 것이다. “내가 로마 땅을 밟은 그날이야말로 나의 제2의 탄생일이자 내 삶이 진정으로 다시 시작된 날이라고 생각한다”는 괴테의 고백은 여행의 위대함을 그대로 대변하는 증언이다. 괴테의 여행 목적은 인간으로서 그리고 예술가로서의 자기 수양이었다. 또 새로운 세계를 체험해 사고의 틀과 삶을 넓히고 깊은 성찰로 자신을 키우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그에게 로마는 하나의 ‘학교’ 그 자체였다.

괴테가 로마에 도착한 뒤 내뱉은 첫마디는 “나는 다시금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하는 어린아이와 같다”였다. 그것은 그가 살았던 세계인 바이마르를 벗어나 보편 세계인 동시에 유럽 문화의 뿌리를 지닌 로마에서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고 키우기 위한 목적과 부합했다. 그렇게 그는 스물두 달 동안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자신을 새롭게 구축했다. 오죽하면 그 여행이 자신을 다시 태어나게 하고 혁신시키며 충실을 기할 수 있게 한 사건이라고 평가했을까.

사실 그 시절의 괴테는 한가한 사람이 아니었다. 공직을 맡아 바쁜 생활을 해야 했고 지치지 않는 문학의 열정으로 끊임없이 글을 쓰던 시기였다. 하지만 그는 과감하게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이탈리아로 떠났다. 그 내막에는 정치적 곤경도 한몫했고 피폐해진 건강도 고려한 것이었지만 그는 그 여행을 통해 거듭났다고 고백했다. 실제로 그가 카를 아우구스트 공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얼마나 큰 성과를 거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제 여행의 중요한 의도는 육체적·도덕적 폐해를 치유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음은 참된 예술에 대한 뜨거운 갈증을 진정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전자는 상당히, 후자는 완전히 성공을 거뒀습니다.”

어디 괴테뿐이겠는가.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는 여행기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박지원은 1780년(정조 4년)에 청나라 건륭제의 70세 생일잔치를 축하하기 위해 사신으로 간 집안의 친척 형 박명원을 수행해 청나라에 따라갔다. 그곳에서 연암은 황제의 피서지인 열하를 여행했는데, 단순히 눈요기에 그친 게 아니라 엄청난 관찰과 사상의 힘까지 쏟아 당시 중국의 문물을 기록하고 해석했으며 중국의 문인 등 명사들과 교유하면서 그들을 통해 중국을 접했다. 이런 경험들을 통해 당시 중국의 문물제도를 소상하게 접할 수 있었고 또 관련 내용들을 꼼꼼하게 기록했던 것이다. 26권 10책이라는 분량만으로도 엄청나지만 내용과 뛰어난 통찰력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경이로움을 느끼게 만든다.

여행에 관해 또 하나 권하고 싶은 것은 기꺼이 불편함을 감수하자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는 어쩔 수 없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여행지에서까지 편함만 추구하는 것은 그저 돈 쓰고 다니는 일에 그치기 쉽다. 여행을 뜻하는 영어 단어 ‘트래블(travel)’의 어원인 라틴어 ‘트라바유(travail)’는 ‘고생’ 혹은 ‘고난’을 뜻한다. 요즘이야 마음만 먹으면 지구 반대편도 하루 만에 도착할 수 있는 세상이다. 하지만 예전에는 집 밖에 나가는 일 자체가 고스란히 고생길이었다. 오죽하면 ‘집 떠나면 개고생’이란 말이 돌았을까.


혼자 떠나는 여행의 매력
이에 비해 요즘 여행은 바깥세상을 즐기고 누리는 사치가 됐다. 하지만 진짜 여행은 그런 게 아니다. 쉽고 편한 여행을 일부러라도 거부할 수 있는 패기가 있어야 한다. 국내건 해외건 여행에는 어려움과 새로운 것에 대한 낯섦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즐길 수 있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속도에 지친 현대인이 여행에서조차 다시 속도를 이용하고 그것을 누리려고 하는 것은 아이러니다. 여행은 최대한 느리고 불편한 이동과 숙박을 마다하지 않을 때 뜻하지 않은 즐거움을 누리게 만든다. 그건 불편함이 아니라 특권이다.

또 정해진 길만 따라가선 안 된다. 일상에서 벗어난 여행은 우리의 익숙한 ‘경로 의존성(path dependency)’에서 벗어나는 쾌감을 누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그런데도 교통의 편의적 시스템에 아무 저항 없이 따르고 적당한 편리함만 구가한다면 그건 또 다른 경로 의존에 불과할 뿐이다. 스스로 경로 의존성을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삶은 자주적이고 주체적일 수 있다. 이 얼마나 값진 자산인가.

때론 일부러 카메라 없이 떠나는 것도 좋다. 요즘은 너 나 할 것 없이 커다란 카메라를 메고 다니며 닥치는 대로 찍는다. 마음에 드는 대상을 사진에 담아 두고두고 즐기는 것은 물론 좋다. 그러나 자칫 찍는 일에 마음이 팔려 정작 제 눈으로, 마음으로 먼저 보는 걸 놓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럴 땐 차라리 거추장스러운 카메라를 내려놓고 제 눈으로 실컷 즐기는 것도 필요하다.

미국의 비평가 수전 손택은 “언제부터인가 현대인들에게 여행은 사진을 찍기 위한 하나의 전략이 되고 말았다”며 한탄했다. 그녀는 일에만 매달린 사람들일수록 휴가나 여행 중에 카메라에 매달린다고 비평했다. 일 중독자나 노동에 대해 엄격한 자기 기준을 가진 사람들이 ‘일하지 않고 있다’는 불안감을 카메라라는 기계를 작동함으로써 해소한다는 뜻이다. 카메라를 통해 일하고 있다는 착각을 느낀다는 분석이다. 그녀의 말을 전적으로 따를 건 아니지만 적어도 때론 카메라로부터도 온전히 자유로울 필요가 있다. 여행은 편리함보다 날것으로의 생동감을 느끼고 원시성으로 회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그걸 제대로 누리기 위해서는 기꺼이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그게 제대로 된 여행, 바로 ‘트라바유’로서의 여행이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떼를 지어 다니거나 대여섯 명이 무리 지어 다니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물론 마음에 맞는 사람들과 어울려 함께 여행하는 것은 행복한 일이지 탓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가끔은 혼자 다니는 여행도 즐길 줄 알아야 한다. 여행이란 어쩌면 일에서 벗어나, 일상에서 벗어나 자신과 오롯하게 만나고 대화할 수 있는 기회다. “여행은 장소의 이동이 아니라 사고의 이동”이라는 아나톨 프랑스의 말이 아니더라도 고독하게 떠나는 여행이 은근히 많은 걸 얻게 해준다. 혼자 떠나는 여행은 언제든지 자기 마음이 내키는 대로 저지를 수 있다. 그리고 그 시간을 오롯이 자기 혼자 쓸 수 있고 자신과 오래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의 기회를 누릴 수 있다.

왁자지껄한 축제 느낌을 받는 휴가도 좋지만 조용히 혼자 떠나 자기를 만나고 자신을 채우는 여행은 이제 필수 사항이다. 여름휴가를 미처 가지 못했거나 일부러 미뤄 뒀다면 혼자만의 여행을 권하고 싶다.


김경집 인문학자, 전 가톨릭대 인간학교육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