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의 영웅들은 초월적 힘과 치명적 약점을 함께 지닌 연약한 존재

[김경집의 인문학 속으로] ‘신화’속에서 마주하는 인간의 이야기
대부분의 신화는 ‘낯익은 기이함’을 통해 인간의 공통적 경험을 나타내 보인다. 각 사회의 형태는 다양하지만 인간의 행동과 사고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조앤 롤링의 ‘해리포터’ 시리즈를 읽으면서 그게 실제로 일어나거나 보이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하지만 왜 갑자기 그 소설에 열광하는 것일까. 물론 내용이 워낙 재미있다지만 그토록 논리적이고 과학적 사고를 강조하던 사람들까지 어째서 이 말도 안 되는 마법사 이야기에 흠뻑 빠져드는 걸까.

환경과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특히 가상현실(virtual reality)에 익숙해지면서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개념과 느낌이 달라졌다. 이전에는 시간과 장소가 일대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 있으면서 동시에 저곳에, 지금이면서 동시에 과거나 미래일 수는 없었다. 그러나 디지털 세계에서는 일대 다(多)의 작동 구조가 가능해졌다. 물론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것 역시 일대일 대응 구조이긴 하지만 컴퓨터의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지면서 그 대응과 반응 속도도 빨라졌기 때문에 마치 동시에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고 느껴지는 것이지만…. 그래서 기존의 틀을 벗어나 하늘을 날 수도 있고 사람이 벽을 허물지 않은 채 그대로 통과할 수도 있다는 현상에 대해 특별한 거부감을 갖지 않게 된 것이다. ‘해리포터’의 판타지들이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이런 조건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은유로 표현된 신화의 진짜 모습은
우리가 ‘해리포터’ 시리즈에 열광하는 이유는 또 있다. 사실 이 이야기는 가장 전형적으로 ‘소년의 통과의례’를 다룬 고전적 틀을 따르고 있다. 사람이 태어나 죽을 때까지 새로운 지위·신분 상태를 통과하면서 치러야 하는 의식이나 의례는 다양한 형태로 체화된다. ‘해리포터’는 이러한 통과의례를 통해 악을 이기는 선의 승리, 우정과 인간관계에서의 신뢰, 사랑의 영원함, 다양성의 수용, 편견이나 선입견과의 싸움 등 우리가 성장하면서 겪는 다양한 일들을 극적으로 전개하고 표현하기 때문에 우리의 기본적 욕구를 채워주는 힘을 갖는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신화의 틀과 매우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신화를 통해 문화와 인간이 갖고 있는 보편성에 공감하고 체화하기 때문에 신화에 관심을 갖는다. 이성의 시대에 접어들며 잠시 찬밥 신세가 됐을 뿐 언제나 우리는 신화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신화는 그냥 먼 옛날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과 다른 세상을 그려 내면서도 현재의 우리와 신화 속 주인공들이 놀랍게도 닮았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우리는 신화를 통해 삶에 대한 의미를 다양하게 공감하고 체득한다. 그러니 신화는 결코 그저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다.

여러 신화에서 주목할 것 가운데 하나는 주인공인 신들과 영웅들이 초월적 힘이나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매우 치명적인 약점도 지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건 바로 인간이 지닌 보편적 약점들이고 그것들이 빚어내는 여러 사건들 역시 우리의 일상에서 나타나는 현실이다. 그래서 우리 자신이 신화의 주인공이고 또한 위대한 영웅이 된다. 그게 바로 신화의 힘이다. 만약 주인공들이 완전한 존재라면 신화는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남의 이야기’일 뿐이다. 신화는 낯설고 기이하면서도 ‘권위 있는’ 이야기다.

‘삼국유사’의 기이(紀異)권은 신화적 내용으로 가득하다. 뭔가 다른 것, 이상한 것을 기록해 놓은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냥 낯선 것은 아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의 삶과 놀랍게도 맞닿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야기가 조금 낯설기도 하고 일상적 시간과 공간에서 벗어나 있는 듯 보이지만 그런 색다름과 변화가 사실은 우리의 일상이 갖고 있는 익숙함이다. 그러니 ‘삼국유사’의 나머지 부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 안에 담긴 수많은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는 민족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만난다. 그것들이 다양한 상징들, 즉 캠벨이 말한 ‘은유’로 드러난다. 이런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는 세상이 어떻게 존재하는지, 인간과 우리 주변의 동식물과 사물들이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지 등을 깨닫는다. 또한 끊임없이 현재를 느끼고 더 나아가 미래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신화는 우리의 삶이다
신화는 비유와 상징으로 그리고 심리적 통일성과 정체성의 근원으로 이해할 때 비로소 제대로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그래서 신화는 한 개인의 삶에 국한하지 않고 한 부족 혹은 한 민족의 정체성과 문화적·심리적 뿌리로 작용할 근거가 되기도 한다.

신화는 바로 우리 자신의 삶을 가장 극적으로 표현한 이야기인 동시에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게 될 무수히 많은 사건들을 상징한다.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그 해결책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는 힘을 지녔다. 그러니 신화는 바로 내 삶에서 살아 있는 이야기이며 자기 미래의 삶에 대한 열쇠를 건네주는 보물 창고인 셈이다.

‘그리스 신화’의 파에톤 신화가 그런 경우다. 그리스어로 ‘빛나는’ 혹은 ‘눈부신’이라는 뜻의 주인공은 태양신인 헬리오스(다른 곳에서는 아폴론으로 부르기도 한다)와 요정 사이에 태어난 청년이다. 파에톤은 제우스와 이오의 아들인 에파포스에게 자신이 태양신의 아들이라고 했다가 거짓말쟁이라는 모욕을 당한 뒤 자신의 말이 진실임을 증명하기 위해 헬리오스를 찾아갔다. 헬리오스는 성장해 찾아온 아들에게 자신이 아버지라는 것을 인정하고 미안한 마음에 어떤 소원이든 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자 파에톤은 태양 마차를 몰게 해달라고 했다. 뜻밖의 요구에 난감했지만 태양신이 약속한 것을 뒤집을 수도 없어 어쩔 수 없이 그 요청을 들어줬다.

파에톤이 얼마나 의기양양했을까. 자신을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한 친구에게 보란듯이 자랑하고 싶었을 것이다. 태양 마차는 헬리오스가 이른 아침마다 몰고 다니며 동쪽 끝에서 세상에 빛을 뿌리는 도구였다. 만약 조금이라도 잘못 모는 경우 세상의 낮과 밤은 뒤죽박죽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걸 파에톤이 몰게 된 것이다. 이 대목은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 때로는 무모한 부탁마저 들어주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비슷한 예가 현실에도 허다하지 않은가.

제우스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태양 마차를 탄 파에톤은 신나게 몰았다. 그런데 마차를 몰던 네 마리 말은 헬리오스보다 훨씬 가벼운 파에톤이 타자 평소보다 무서운 속도로 내달렸다. 하지만 마차를 타는 데만 정신이 팔렸던 파에톤은 말을 다루는 법, 특히 말을 세우는 법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말은 정신없이 마음대로 달리며 제멋대로 날뛰었다. 그 바람에 강과 바다가 말라버렸다. 리비아에 사막이 생긴 것도, 에티오피아인들의 피부가 검게 탄 것도 바로 그 때문이라고 한다.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사랑도, 멸시받는 파에톤의 반감과 그에 대한 보상 심리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이건 이미 단순한 부자 간의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제우스는 더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해 번개를 던져 파에톤을 죽게 만들었다.

파에톤의 피해의식과 자랑하고 싶은 욕망은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있다. 그리고 그 욕망이 채워졌을 땐 앞뒤 안 가리고 마음껏 누리려고 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스스로 통제하는 법을 먼저 배우지 않으면 결국 파멸에 이를 뿐이다. 이 신화를 통해 사람들은 그런 절제를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이 점이 바로 신화가 주는 중요한 교훈이자 신화의 가치다. 이렇게 ‘그리스 신화’의 거죽을 한 꺼풀 벗겨내 읽어 보면 그속엔 결국 우리 삶의 모든 것들이 다 들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어찌 삶과 따로 떨어져 있는 허황된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는가.

신화는 지금도 조앤 롤링의 ‘해리포터’ 시리즈로, 톨킨의 ‘반지의 제왕’으로 새롭게 변형돼 재창조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신화를 이루고 있는가.


김경집 인문학자, 전 가톨릭대 인간학교육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