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은 치고 올라갈 일만 남은 곳…어디서든 자존감 잃지 말아야

[김경집의 인문학 속으로] 인생의 ‘바닥’에 닿은 그대에게
어느 인명 구조원의 이야기가 마음을 끈다. 물에 빠지면 무조건 수면 위로 오르려고 허우적대지 말고 강바닥에 내려가는 게 좋은 방법이라는 것이다. 물론 너무 깊은 강물에서는 그것도 쉽지 않겠지만 어지간한 깊이에서는 도움이 된다고 한다. 바닥에서 발을 박차고 올라가면서 체력을 소비하지 않는 것도 생명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그의 말은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내용이었다. 바닥에 닿으면 곧 죽음이라는 공포를 벗어나 차분하게 받아들이면 오히려 체력의 낭비도 줄이고 공포를 덜 수 있어 더 오래 버틸 수 있다는 뜻일 게다.

사는 게 힘들고 지치면 절망한다. 미래의 희망도 당장 보이지 않고 출구도 보이지 않으면 체념할 수도 있다. 그러면 모든 것을 포기하거나 방관하게 된다. 자기가 자신을 방관하는 순간 그건 자기 삶이 아니다.


올리버 트위스트를 이끈 희망
디킨스는 ‘올리버 트위스트’에서 런던 사람들의 삶을 서민적 해학과 예리한 필치로 그려냈는데, 특히 당시 최하위층의 삶이 그대로 묘사됐다. 디킨스는 아이들의 고독과 절망에 대해 쓸 때 그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았다. 그것은 그의 인생 역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자신도 한동안 구두약 제조 공장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몇 달 동안 채무를 지고 감옥소에 간 일도 있었다. 찰스는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공장의 보조원으로 일해야 했다. 중간계급 신분에서 추락해 ‘워런 블래킹 공장’에서 겪은 일들은 당시 열두 살의 찰스에게는 끔찍한 경험이었다.

19세기 말까지 런던 시민의 평균수명이 고작 20세를 넘기지 못했다는 사실은 그만큼 섭생·위생이 열악하고 노동 강도가 엄청났다는 뜻이다. 19세기의 런던은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가장 발전한 도시였다. 하지만 급격한 도시화의 부작용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빈민촌이 형성되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곳이 바로 이스트엔드(East End)다. 그곳은 빅토리아 시대에 형성된 대표적인 런던의 빈민촌이었다. 이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하루 15시간을 거칠고 험한 노동에 시달렸고 오염된 물 때문에 전염병에 걸려 30세를 넘기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런 사람들이 당시 런던 인구의 80%를 차지하고 있었다.

수명을 단축시킨 또 다른 요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어린 노동자들의 이른 죽음 때문이었다. 힘든 일을 하면서도 임금은 성인 남자의 절반 이하 혹은 절반의 절반쯤만 주면 됐다고 하니 많은 자본가들이 이들을 데려다 썼다. 엄연한 착취였지만 아무도 이를 막지 못했다. 아이들을 학교에 가지 못하게 만든 이들이 바로 자본가들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탄광에서는 그 정도가 더 심했다. 아이들은 몸집이 작아 갱도를 크게 만들지 않아도 돼 시설비도 그만큼 줄었다. 게다가 임금이 훨씬 싸니 소년 광부들이 고용돼 죽어나갔던 것이다.

올리버가 살았던, 그러니까 정확히는 찰스 디킨스가 살았던 19세기의 영국에서 자본가가 아닌 사람들에게 무슨 희망이 있었겠으며 낙이 있었을까. 비교해 보면 지금 우리가 겪는 고통은 새 발의 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 시대를 단순히 비교할 수는 없다. 그래서도 안 된다. 올리버가 끝내 자신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그걸 읽어내야 한다. 그것은 끝내 절망하지 않고 자신을 지켜낼 수 있는 주체성이었고 도덕성마저 잃으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절대성이었다. 희망은 그런 단단한 옹이를 바탕으로 가능한 것이다. 그것을 상실하거나 외면하면서 희망을 품는 것은 비겁한 일이고 자신의 삶을 방기하는 것이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너나없이 삶이 피폐해졌다. 뜻하지 않은 구조조정과 명예퇴직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사태로 가장의 삶이 무너졌다. 젊은이들에게 그 시련은 더 혹독했다. 취업은 아예 전쟁이 됐다. 대마불사라고 여기던 거대 기업군들이 무너지고 대규모 해고와 임금 삭감, 유가와 물가의 급상승 등은 삶을 송두리째 망가뜨렸다. 다행히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이른 시간 내에 그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성장의 기반을 마련했지만 고용 없는 성장과 나쁜 일자리 양산이라는 숙제가 남겨졌다.

기업은 유동성이 풍부해졌지만 투자를 꺼린다. 경제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위험 부담을 안고 투자를 주저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러니 새로운 고용의 창출은 어렵고 취업은 갈수록 힘들어진다. 또 불안정한 고용 구조 때문에 너 나 할 것 없이 공무원 시험 같은 안정적인 일에만 매달린다. 사회를 위해 봉사하겠다는 숭고한 뜻으로 공무원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고용이 안정되고 연금 체계가 상대적으로 낫기 때문에 안정적 삶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바닥에서 단련된 삶이 강하고 고결하다
그러나 젊은이들이 그렇게 공무원 시험에 매달리는 것은 좋아 보이지 않는다. 공무원이 매력 없는 직업이라는 뜻이 아니다. 과연 젊은이들에게 삶의 안정성이 가장 중요한 가치일 수 있느냐 하는 안타까움 때문이다. 기꺼이 모험을 선택하라고 떠밀 수는 없다. 그러나 자기 꿈과 의미를 포기하면서까지 그렇게 안정된 삶에만 몰두했을 때 과연 당장 먹기엔 곶감이라지만 나중에 그 허탈함을 어찌 할 것인지 두렵다. 자기 삶이다. 한 번밖에 없는 자기 삶이다. 물론 힘들고 어렵다. 고작 시급 5000원쯤의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면서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더 깊이 생각하고 전의를 불어넣고 자신을 다잡아야 한다. 지금은 너무 절박해 다른 선택이 없을 것 같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그 절박성 때문에 예전 같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분야에서 새로운 가능성과 도전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자기가 진짜 원하는 일, 진정 바라는 삶의 방식에 대해서는 포기하면 안 된다. 지금 당장은 힘들어도 그걸 이겨내야 비로소 자기 삶의 주인이 돼 자신이 원하는 삶을 실현할 수 있다. 자신이 지금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올리버 트위스트의 처지보다 낫지 않은가. 하나씩 양보하고 타협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결국 자신의 영혼도 삶도 다 헐값에 팔아넘기게 된다.

어렵다. 정말 어렵다. 하지만 이제는 거의 바닥에 다 왔다. 더 이상 내려갈 곳도 없다. 물러설 곳도 없다. 맞서 싸울 일만 남았다. 그런데 그렇게 바닥에서 다져진 내공이 결코 만만하거나 가볍지 않다. 이제 곧 그 힘을 발휘하게 된다. 그러니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이젠 오르는 일만 남았다.

특히 요즘 청춘에게 세상은 시리고 맵다. 청춘 그 자체가 바닥인 세상이다. 그래도 이겨내야 한다. 어느 정도 살다가 그런 일을 겪어도 힘들고 모질 텐데 이 나라 불쌍한 청춘들은 봉오리를 맺었으되 꽃을 피우지 못하고 갑자기 엄동설한 퀭한 들판에 내몰려 그 봉오리마저 얼어 죽게 만든다. 그러니 무슨 위로가 들리고 어떤 격려가 힘이 될까.

하지만 그 바닥에서 우리가 깨닫는 건 삶의 ‘다운사이징’이다. 불필요한 욕망을 내려놓고 작은 것에 행복할 수 있는 지혜를 배우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버티고 견딜 수 있다. 또 그래야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다.

바닥을 겪어 본 사람의 삶이 훨씬 더 단단하고 옹골차다. 물론 지나치게 옹색하거나 엄격해 지질리거나 힘과 돈에 쉽게 넘어가 아부하기 쉽다는 점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남들은 그래도 나는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일도 아니다. 그 사람들도 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런 삶을 선택했다. 그걸 내가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건 자기 삶이 아니라고 단단히 오금을 박아야 한다. 그런 결의가 자기 삶을 고결하게 만든다. 그런 고결함과 당당함이 앞으로 자기 자신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되게 한다. 바닥에 있을 때 늘 명심할 것은 바로 그 고결함과 자존감이다. 바닥, 그것이 축복일 수 있는 것은 그런 당당함의 바탕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