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작품에 담긴 당대의 역사와 문화 읽어 낼 수 있어야

역사는 꼭 실록 같은 서적을 통해서만 읽어 낼 수 있는 게 아니다. 과거의 유물을 통해서도 역사를 읽어 낼 수 있다. 예를 들어 고려 상감청자를 보자. 신비롭게 아름다운 비취색의 황홀함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정말 아름답다. 색깔뿐만 아니라 모양도 유려하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냥 ‘아, 정말 아름답구나’라고 뿌듯해 하기만 하면 그것밖에 보이지 않는다. 도자기 하나도 당시의 상황과 배경을 짚어보고 살피면서 보면 많은 것들을 배우게 된다. 고려는 왜 그토록 아름답고 신비한 상감청자를 만들게 됐을까. 이런 물음이 따라와야 한다.

고려는 세상에 혼자 존재했던 나라가 아니다. 어느 나라건 이웃나라와 관계를 맺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 수밖에 없다. 한중일 삼국은 역사적으로 늘 그러한 관계 속에서 살아왔다. 꼭 가까운 이웃나라와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신라는 멀리 서역, 그러니까 페르시아와 인도 등과도 교역했고(신라의 유리 제품 유물이 그런 증거이고 괘릉의 무인석이 서역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고려는 벽란도를 통해 수많은 나라들과 무역했다.

고려는 당연히 중국의 송나라와 아주 밀접하게 지내며 그들의 선진 문물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송나라는 중국의 그 어느 왕조보다 무(武)보다 문(文)을 중시했고 자연스럽게 그러한 문화가 발전했다. 그 대표적 문화가 바로 도자기다. 물론 당나라 때도 당삼채(唐三彩)라는 도기 문화가 발달했지만 도자기 문화의 꽃은 송나라 때 활짝 폈다. 바로 그 송나라 때 청자가 발달한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고려에서도 청자를 수입하고 배우고 제작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고려는 세계에서 둘째로 청자를 만든 나라였다.

문화는 어느 한 곳에 머물러 고정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다른 곳으로 옮겨 간다. 마치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이, 더운 공기와 찬 공기가 대류하듯이 말이다. 그런데 고려청자의 뛰어난 점은 송나라의 청자를 빼어난 솜씨로 모방하고 재현했기 때문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기법을 창안해 훨씬 아름답고 예술적으로나 기술적으로 더 뛰어난 도자기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바로 ‘상감(象嵌)’ 기법이다. 세계 최초이자 유일한 기술이었다. 오죽하면 중국인들조차 고려의 상감 기법을 보며 천하제일이라고 감탄했겠는가.


경제가 없으면 문화도 쇠퇴
상감 기법 이전까지는 도자기에 직접 그림을 그렸지만 고려의 장인들은 도자기에 음각과 양각으로 그림을 새기고 거기에 백토나 흑토로 채우고 구워 낸 다음 다시 청자 유약을 발라 구워 내면서 무늬가 유약을 통해 투시되도록 했다. 물론 상감이라는 기법이 완전히 독창적인 것은 아니고 나전칠기 등에서 사용했던 기법을 응용한 것이다. 이렇게 문화는 모방과 창조를 통해 진화하는 것이다.

예술적 안목과 문화적 잠재력도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걸 생산해 낼 수 있는 사회적 배경도 무시할 수 없다. 먼저 기술적인 면을 보자. 도자기는 일반 찰흙으로 만드는 도기와 자토로 만드는 자기를 일컫는 말인데, 도기는 섭씨 500~1100도에서 굽지만 자기는 1200도가 넘어야 구워지기 시작해 1300도쯤 될 때 최적의 상태가 된다.

그렇게 구워지면 훨씬 가볍고 단단해진다. 금속이 대략 1000도쯤이면 녹는다는 것과 비교해 보면 엄청난 온도다. 그런 온도를 만들어 내려면 가마를 만드는 기술이 뛰어나야 한다. 그리고 그 온도까지 올라가려면 적어도 사흘 내내 장작을 때야 한다. 이런 기술은 경험과 과학 그리고 끈질긴 탐구의 결과물일 수밖에 없다.

그 옛날 도공들은 이런 고급 기술을 어떻게 개발했을까. 이를 알기 위해선 도자기를 누가 주문했는지부터 따져봐야 한다. 당시 도자기의 주요 수요층은 당연히 왕족이나 귀족 등 지배계급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지위가 높다고 하더라도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못하다면 사치스러운 상감청자를 마음껏 누리지는 못한다. 물론 경제적 요인만 있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그 가치를 누릴 수 있는 안목과 식견을 갖춰야 했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11~12세기 고려가 경제적으로도 풍족했고 지배계급의 문화 수준도 높았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벽란도를 통한 무역으로 경제적 윤택을 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상업은 농업이나 공업보다 이익을 더 많이 그리고 쉽게 얻을 수 있다.

실제로 12세기 후반에서 13세기에 접어들면 뜻밖에 고려청자의 수준이 떨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왜 그랬을까. 바로 무신정권의 지배와 원나라의 침입 때문이다. 평화롭고 윤택할 때는 문화가 세련되고 성숙해지지만 불안하고 피폐해지면 당장의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이 되지 못하니 문화가 퇴보하게 된다. 가난하고 정치가 불안정한 나라에서 문화가 성장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고려 말에 가면 청자의 전성기는 완전히 막을 내리고 쇠퇴하다가 조선시대가 되면 그 맥이 거의 완전히 끊어지고 만다. 물론 조선은 유교적 가치를 내세운 왕조였기 때문에 사치와 화려함보다 질박하고 담백한 것을 추구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청자의 맥이 끊어진 것은 두고두고 아쉬운 일이다,


열린 시각은 다양함에서 온다
이런 상상도 가능하지 않을까. 일반 서민들은 어쩌면 청자에 대해 그리 탐탁하지 않게 여겼을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라. 사람들 땔감도 넉넉하지 않은데 청자를 굽기 위해 사흘 동안 가마에 엄청난 소나무 장작을 넣으니 말이다. 그 나무들이 서민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었을 것이다. 자신들은 구경도 하지 못할 그릇을 굽는 데 사용되기 위해 숲이 황폐해지고 땔감이 부족하니 얼마나 삶이 곤궁했겠는가. 이렇게 누군가가 누리는 행복을 위해 다른 누군가가 불행을 겪어야 하는 것이 공정한 일은 아니다. 게다가 소수의 행복을 위해 다수의 불행을 감당해야 하는 것은 더더욱 그렇다. 아무리 그게 옛날이라고 해도 그 판단이 바뀌지 않는다.

정치는 백성들의 마음을 얻어야 하는 것이라고 공자와 맹자는 가르쳤다. 물론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는 범위에서 문화를 누리는 것은 비난할 일이 아니라 칭찬할 일이다. 고려청자가 번창한 것은 어쩌면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정치적으로도 안정됐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렇게 도자기 하나를 통해 우리가 살펴보고 생각할 수 있는 갈래들은 뜻밖에 많다.
[김경집의 인문학 속으로] 신비로운 고려청자는 왜 사라졌나
예술적인 감상도 빼놓을 수 없다. 국보 95호 청자투각칠보문향로를 보자. 칠보문은 일곱 가지 귀한 보물에서 유래한 말인데, 나중에 차차 길상(행운) 무늬로 형상화된 것이다. 투각된 뚜껑과 연꽃 문양의 몸체, 세 마리 토끼가 받치고 있는 판형 받침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매우 화려하면서도 완벽한 균형을 갖추고 있다. 특히 받침대의 토끼 눈에는 검은 철화 점을 찍어 마치 살아 있는 느낌과 영특한 느낌이 들게 한다. 화룡점정(畵龍點睛)이란 말이 있다. 거창하게 용의 눈동자를 그린 것보다 이 귀여운 토끼의 눈동자를 붓끝으로 ‘톡’ 쳐서 그려 낸 이 소박하면서도 깔끔하고 재치 있으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모습에서 절로 행복한 웃음이 느껴진다.

몸통의 꽃잎 하나하나는 모두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 송나라에서 파견된 사신 서긍(徐兢)은 고려의 청자를 보고 깜짝 놀라 높은 평가와 감탄을 멈추지 않았다. 이런 작품들이 바로 12세기 상감청자 전성기 때 엄청나게 생산됐다는 것은 그만큼 고려의 문화 수준이 대단했다는 증거다.

시 한 편, 저술 한 권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도 시대를 읽어 내고 맥락을 더듬어 찾아내야 한다. 두보와 이백의 시도, 이이와 정약용의 저술도 그 배경을 읽어 내야 제대로 맛과 의미 그리고 가치를 읽어 낼 수 있다. 역사의 유산은 그것이 어떤 분야건 반드시 시간과 공간의 맥락과 배경 속에서 읽어야 하고 그것을 현대의 그것들에 비춰 재해석해야 한다. 이러한 태도와 방식은 비단 오래된 과거의 일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현대사에서도 동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