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를 식민사관 재료로 삼은 일제…텍스트 속 이면 살펴야

[김경집의 인문학 속으로] 경애왕은 포석정서 술을 마시고 있었나
국보 1호는 숭례문, 보물 1호는 흥인지문(興仁之門:동대문)이다. 그러면 사적 1호는 무엇일까. 아마 모르는 이가 대부분일 것이다. 사적 1호는 포석정이다. 그런데 우리가 모르는 사실이 더 있다. 이들 국보와 사적들이 모두 식민사관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특히 포석정은 ‘삼국유사’가 악용됐다는 사실이다. 1933년 일본의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문화재를 조사, 보물 등으로 지정해 그 다음해에 공포했다. 보물 1호는 남대문, 보물 2호는 동대문, 고적 1호는 포석정이었다. 지금과 달리 ‘국보’가 없는 것은 ‘식민지에 무슨 국보가 있을 수 있느냐’는 논리다. 그리고 사적이 아니라 고적인 것은 그저 오래된 유적이라는 뜻이다.


포석정이 사적 1호된 진짜 이유
일제는 조선을 점령한 뒤 대부분의 읍성을 무너뜨렸다. 읍성은 그 지역 사람들에게 역사적·공간적 정체성의 근거였기 때문이다. 읍성이 무너지고 새로운 시가지가 만들어졌을 때 당시 조선 사람들이 느꼈을 당혹감과 역사적·공간적 상실감을 짐작해 보라. 오늘날 원형을 그대로 남긴 읍성은 고작 세 개뿐이다. 바로 낙안·고창·해미의 읍성들이다. 이곳들은 모두 일본인들이 들어가 살 필요가 별로 없었기에 살아남았다.

경성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양도성을 모두 무너뜨렸고 사대문도 허물었다. 사실 남대문이나 동대문도 그렇게 될 운명이었다. 그런데 그 두 문으로 일본의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가 출입했다는 이유로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그런데 그것들이 광복 이후에도 여전히 국보 1호와 보물 1호로 지정돼 오늘에 이른다.

그렇다면 왜 포석정은 고적 1호였고 지금도 사적 1호일까. 우리가 알고 있는 포석정 이야기는 대략 왕과 귀족들이 술 마시고 놀던 유희의 장소라는 것이다. 신라의 경애왕은 견훤이 국토를 유린하고 수도를 함락하기 직전임에도 불구하고 궁녀들을 데리고 포석정에서 술 마시고 놀다가 결국 경주가 함락된 뒤 견훤의 강요로 자진(自盡)했다는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이다. ‘삼국유사’에 그렇게 쓰여 있다. 간악한 일제는 그 부분만 떼어내 나라가 함락 직전임에도 불구하고 임금이 주연에 빠져 있는 족속이니 국가를 운영할 자질을 갖추지 못한 민족이라는, 전형적인 식민사관으로 분칠해 버렸다.

그러나 ‘삼국유사’를 제대로 읽었다면 결코 이런 엉터리 사관은 성립될 수 없다. 견훤이 신라를 침공한 것은 9월(물론 당연히 음력이다)이었고 지금의 영주를 점령하자 신라는 급히 고려에 원군을 요청했다. 하지만 원병이 오기 전 11월에 수도 경주가 함락됐다. ‘삼국유사’에 분명히 11월이라고 쓰여 있다. 생각해 보라. 어느 누가 그 엄동에 야외에 나가 주연을 즐겼겠는가.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억지 주장일 뿐이다.

여러 차례 언급했지만 고전을 읽을 때 결코 그 무게에 눌려서는 안 된다. 주눅 들지 말라는 말이다. 왜 이런 이야기가 쓰였고 왜 그것을 변조해 식민사관을 강화했을지 생각해 봐야 한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삼국유사’는 고려 때 쓰였다.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가 자신들의 정통성을 부각하기 위해 썼다. 경순왕은 왕건이 경주를 방문했을 때 “견 씨(견훤)가 침략했을 때는 승냥이·이리와 같더니 왕 장군이 오시니 어버이 같습니다”라고 말했다고 설명한 대목만 봐도 이런 경향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삼국유사’에 ‘11월’이라고 한 기록만 유심히 봤어도 이런 질문이 가능할 것이다.

“그 추운 겨울에 야외에서 주연을 베풀며 놀았을까. 그리고 아무리 한심한 임금이라고 할지라도 남의 나라에 원병을 청할 만큼 위급한 상황에서 그럴 수 있을까.”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경애왕은 왜 포석정에 갔을까. 그곳에는 포석사라는 ‘사당’이 있었다. 포석사는 모든 화랑의 모범으로 추앙 받던 문노(文弩)를 모신 사당이었다. 그러니 포석사는 성지였고 경애왕은 바로 포석사에서 문노에게 나라를 지켜 달라고 제사를 지내러 갔던 것이며 경주의 도읍 백성들에게 문노를 본받아 신라를 지켜내자는 일종의 정치적 이벤트를 하러 갔던 것이다. 술판을 벌이고 무희들과 희롱하던 게 아니다.

물어야 답을 찾는다. 묻지 않고 그저 쓰인 글자만 따라가면서 외우기 급급하다면 자칫 그것은 텍스트라는 무게 속에 함몰돼 오히려 악영향을 미치기 쉽다. ‘삼국유사’ 탓이 아니다. 그것을 왜곡해 분탕질한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그들의 식민사관을 지금까지 그대로 답습한 역사학계의 탓이다. 그러나 이를 아무 의문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우리에게도 무관심과 순응이라는 허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제대로 물어야 답을 찾는다
경문왕 설화도 잘 알려진 이야기다. 바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그 유명한 이야기다. ‘삼국유사’에 실린 ‘여이설화(驢耳說話)’에 따르면 신라시대 희강왕의 손자였지만 왕위 계승자가 아니었던 화랑 응렴(膺廉)은 헌안왕의 질문에 현명하게 대답함으로써 사위가 됐고 나중에 왕위를 계승해 경문왕이 됐다. 경문왕은 임금 자리에 오른 뒤 갑자기 귀가 길어져 나귀처럼 됐다고 한다.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으나 오직 왕의 복두장만은 알고 있었다. 왕은 자신의 약점을 감추기 위해 언제나 귀를 덮는 모자를 주문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것은 경문왕이 실제로 당나귀 귀를 가졌다기보다 왕위 계승의 정통 적자가 아니라는 열등감, 즉 정통성에 대한 불안을 상징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당연히 왕은 자신의 귀에 대해 발설하면 복두장이를 죽일 것이라고 경고했고 그는 평생 그 사실을 감히 발설하지 못하다가 죽을 때에 이르러 도림사라는 절의 대밭 속에 들어가 대나무를 향해 “임금님 귀는 나귀 귀처럼 생겼다”라고 소리쳤다. 그 뒤부터 바람이 불면 대밭에서 ‘임금님 귀는 나귀 귀처럼 생겼다’는 소리가 났다. 왕은 이것을 싫어해 대를 베어 버리고 산수유를 심게 했지만 그 소리는 여전했다고 한다. 아무리 억눌러도 진실은 끝내 밝혀지는 법이다. 요즘은 어떨까. 듣기 고깝거나 불리하다고 여기는 말을 막으려고 하는 이들이 여전히 설친다.

누구나 감추고 싶은 부분이 있다. 특히 자신의 정체성·정통성과 관련되면 예민할 수밖에 없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감추거나 왜곡하고 싶어진다. 그가 쥔 막강한 권력은 그런 수단을 제공해 줄 수 있고 그의 권력의 혜택을 받으면서 정통성에 대한 불안감을 공유한 자들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 똘똘 뭉쳐 방어한다.

이 이야기는 설화성이 매우 풍부해 널리 구전되고 있고 또한 그 분포 지역이 국내뿐만 아니라 범세계적이라는 점에서 일찍부터 국내외 학자들의 연구거리가 돼 왔다. 당나귀 귀 이야기는 프랑스·루마니아·러시아·그리스·아일랜드·칠레 등에서도 나타나는데, 당나귀 대신 말이나 산양의 귀로 변형되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대부분이 그 귀는 치부를 상징하는 것이고 감추려고 애쓰는 권력의 작용도 동일하다.

‘삼국유사’에 나타난 경문왕의 당나귀 귀 이야기는 그의 정통성 문제일 수도 있고 혹은 실정과 비리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겸손하고 의로운 사람인 것처럼 보여 헌안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지만 집권하자마자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렸다. 개혁을 내세워 지나친 강압 정치를 폈고 헌안왕의 첫째 공주와 결혼했지만 박색이라 거들떠보지도 않고 미모의 둘째 공주를 왕비로 맞는다. 또 그 와중에 간통해 아들까지 낳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 그 아들을 죽이려 했는데, 그가 바로 궁예다. 신라인들은 이런 경문왕의 허위의식을 당나귀 귀 설화로 표현해 낸 것이다.

만약 경문왕이 허물을 인정하고 그것을 고치려고 했다면 그는 성군이 됐을지도 모르고 ‘삼국유사’에서 그렇게 우스꽝스러운 임금으로 묘사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허물과 부족한 점을 인정하는 것만큼 용기 있는 일도 없다. 제대로 읽고 분별해야 제대로 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