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소하지 못한 가슴속 분노는 독 …용서의 지혜 필요해
“구름이 무심(無心)탄 말이 허랑(虛浪)하다/ 중천(中天)에 떠 있어 임의(任意)로 다니면서/ 구태여 광명(光明)한 날빛을 따라가며 덮나니.” 고려 말 충신 이존오(李存吾)가 지은 시다. 여기서 구름은 신돈(辛旽)이고 날빛, 즉 햇빛은 임금의 총명함을 비유한 것이다. 간신 신돈이 왕의 판단력을 흐린다는 소리다. 이존오는 신돈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공민왕의 노여움을 사서 좌천됐다. 이후 낙향해 울분 속에서 살다가 서른한 살의 나이에 울화병으로 죽었다.누구나 받기 마련인 상처
사람은 누구나 살면서 상처를 받는다. 누군가가 우리를 인정해 주지 않거나 또 누군가는 배신을 한다. 부당한 공격을 받아 피해를 보기도 한다. 다행히 상처는 아물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살이가 그리 만만한가. 상처가 아물지 않고 자신의 목적이 좌절되면 마음에 분노가 싹트기 마련이다.
분노 역시 저절로 치유돼 사라질 수도 있다. 긍정적인 마인드로 상대방을 용서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가차 없는 복수로 이어지기도 한다. 문제는 이 분노가 끝끝내 풀리지 않고 안으로 쌓이고 또 쌓여 울화병(鬱火病)으로 발전한 경우다.
사도세자가 그랬다. 당쟁의 한복판에서 세자가 아버지 영조로부터 상습적으로 받은 상처는 컸다. 그가 장인 홍봉한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나는 원래 남모르는 울화의 증세가 있는데다 지금 또 더위를 먹은 가운데 임금을 모시고 나오니 열은 높고 울증은 극에 달해 답답해 미칠 것 같습니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봐야 했던 정조도 비극적인 운명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평생을 암살 위협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왕권 강화를 통한 태평성대는 아득한 꿈이었다. 정조의 비전은 그의 내면의 분노와 복수심, 당쟁에 따른 불안과 불신 속에 매몰됐다. 그는 결국 40대 후반에 울화병으로 요절하면서 크게 빛을 보지 못했다.
홍국영도 비슷하다. 홍국영은 정통성도, 지지 기반도 미약했던 사도세자의 아들 이산의 집권을 위해 목숨을 건다. 당대 최고의 척신(戚臣) 홍국영은 정권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탄핵을 받는다. 홍국영의 낙마에는 그의 힘이 과도해지는 것을 우려한 정조의 뜻이 담겨 있을 것이다. 주군에게 버림받은 홍국영은 서른네 살의 나이에 유배지에서 울분에 쌓여 울화병으로 죽었다.
소설 ‘삼국지’에서 울화병의 주인공은 원소와 원술 형제다. 당대 최고 명문가 출신이었던 원소는 이런 후광을 받아 반(反)동탁연합군의 맹주가 된다. 그러나 헌제를 등에 업고 천하를 호령하기 시작한 조조와 격렬하게 대립한다. 관도대전에서 조조와 총력전을 벌인 원소는 완전히 몰락했다. 패배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울화병에 걸린 원소는 피를 토하며 죽었다.
원소의 배다른 동생 원술. 결과만을 놓고 보면 이 형제는 영화 ‘덤앤더머(DUMB & DUMBER)’를 연상시킨다. ‘멍청한’ 원소와 ‘더 멍청한’ 원술. 원술은 자신의 역량도 모른 채 손책을 통해 얻은 전국옥새를 가지고 스스로 황제를 칭하다가 조조의 공격을 받고 궤멸한다. 역시 울화병에 걸려 어느 시골구석까지 쫓겨 온 원술이 측근에게 “꿀물을 달라”고 했다. “주위에 꿀물은커녕 핏물밖에 없습니다!” 원술은 “내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가”라며 장탄식 끝에 피를 토하고 죽었다.
죽은 아우 관우와 장비의 원수를 갚겠다고 나섰다가 이릉전투에서 회복 불능의 패배를 기록한 유비. 크게 낙담한 유비도 울화병으로 고생하다가 죽는다. 그의 뒤를 이어 촉나라 황제가 됐던 유선은 위나라 군대에 잇달아 패하면서 항복을 결심한다. “할아버지께서 어떻게 세운 나라인데 이리 허망하게 내어 준단 말입니까?” 울분에 가득 찬 유선의 다섯째 아들 유심은 끝까지 싸우자고 주장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유심은 자신의 세 아들을 모두 죽이고 아내까지 목을 벤 뒤 유비의 사당에 가서 대성통곡한 뒤 자결했다.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죽기 원한다”는 말을 연상시키는 유심의 의연한 태도는 백제의 계백장군을 연상시킨다. 망국의 설움을 안고 산속을 떠돌다 죽은 신라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도 떠오른다. 잘 알려진 인물은 아니지만 촉나라가 망하자 망국의 한을 품고 울화병이 들어 죽은 요화(寥化)라는 충신도 있다.
조조의 장남 조비(曹丕)는 치열한 경쟁을 뚫고 조조의 후계자가 된다. 황제가 될 수 있었지만 위왕(魏王)의 자리에 만족한 조조와 달리 조비는 후한의 마지막 황제 헌제를 몰아내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그러나 후계 경쟁 시 막강한 라이벌이었던 동생 조식(曹植)이 눈엣가시였다. 글재주가 탁월한데다 생전에 조조가 유달리 조식을 총애했기 때문이다.
울화병 삭이며 명저 남긴 다산
설상가상으로 측근들이 조식을 모함했다. 조비가 조식을 불렀다. “네가 그리 문재가 뛰어나다고 하니 일곱 걸음을 떼기 전에 시를 하나 지어라. 그리하면 네 죄를 용서해 주겠다.” 조식은 기가 찼다. “형님이 나를 죽이려고 꼼수를 부리는구나!” 조조가 살아 있었다면 셰익스피어 희곡 속의 주인공 ‘리어왕’처럼 울화병에 걸려 죽을 일이었다.
“콩대를 때서 콩을 삶으니(煮豆燃豆 )/ 솥 안의 콩은 울고 있다(豆在釜中泣)/ 본래 한 뿌리에서 났건만(本是同根生)/ 어찌 이리 급하게 삶아대는가(相煎何太急).”
조식은 일곱 걸음을 떼기 전에 시를 완성했다. 이것이 유명한 ‘칠보시(七步詩)’다. 양심의 가책을 받은 조비가 조식을 살려줬다. 그러나 시골에 은거하던 조식은 울화병으로 요절한다.
조조 생전에 최고 참모였던 순유(荀攸)도 여포를 죽이고 관도대전에서 승리를 거두는 데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적벽대전을 앞두고 “필히 화공을 해 올 것입니다. 이에 대비해야 합니다”라고 진언했다. 승리를 자신하던 조조는 이를 묵살했다. 순유는 결정적으로 “왕이 되겠다”는 조조를 만류하다가 쫓겨났다. 낙담한 순유 역시 울화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상처가 아물지 않고 분노가 되고 그 분노가 쌓여 울화병이 되고 그로 인해 죽음을 맞는 것은 여러 가지 경로 중의 하나일 뿐이다. 모든 사람들이 그리 되는 것은 아니다. 역시 정조의 심복으로 홍국영처럼 유배 생활을 했지만 다산 정약용은 달랐다.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의 탁월한 저서가 모두 그의 18년 유배 기간에 나왔다. 쌓인 원한과 분노를, 울체된 마음속 화기를 삭이면서 말이다.
궁형(宮刑)이라는 치욕적인 형벌을 감수하고 울화병으로 스러지지 않고 ‘사기(史記)’를 완성한 사마천은 다산과 닮은 구석이 있다. 다산과 사마천은 전국시대 초나라 시인 굴원(屈原)과는 뚜렷이 구별된다. 뛰어난 학식과 문재를 자랑했던 굴원은 왕 주변 신하들의 중상모략에 강남으로 유배를 갔다가 울화병에 걸려 지금의 호남성에 자리한 멱라강에 돌덩이를 안고 투신했다.
사족. 울화병·울화증은 ‘화병(火病)’ 혹은 ‘화증(火證)’이라고도 한다. 명나라 때 장경악이 쓴 ‘경악전서(景岳全書)’에 처음 나왔다. 옛날 우리 조상들은 가슴이 답답하고 울화통이 터지면 가슴을 치며 그 답답함을 풀곤 했다. 주먹을 쥐고 치던 가슴 부위를 단중혈이라고 부른다. 양쪽 젖꼭지를 이은 선의 정중앙이다. 누군가 내게 상처를 주어 분노가 쌓이기 시작하면 즉각 가슴을 치면서 “내 탓이오”든 “네 탓이오”든 외치면서 화기가 울체되지 않도록 할 일이다.
이 험난한 환란의 세월을 울화병에 걸리지 않고 무사히 통과하기 위해선 각자 나름의 지혜가 필요하다. 다산이나 사마천의 길을 걸을 것인가, 홍국영이나 굴원의 길을 갈 것인가는 우리의 몫이다.
김진국 칼럼니스트, ‘재벌총수는 왜 폐암에 잘 걸릴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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