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자로 인정받지 못했던 멘델…포기하지 않는 삶이 주는 교훈

[김경집의 인문학 속으로] 실패한 멘델의 삶, 위대한 진보를 낳다
그는 서른한 살의 나이에 실패자가 돼 빈으로 돌아왔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굶주림과 교육 받지 못한 것이 속상해 수도원에 들어가 사제가 됐던 청년. 운 좋게 청년은 정식 학위를 받을 기회를 얻었다. 주교가 빈의 대학으로 보내 교사 학위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다. 그러나 그는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적어도 학자로서의 삶은 비참하게 마감됐다.

‘지식에 필수적인 명확성과 통찰력이 결핍돼 있다’는 판정을 받고 낙제한 그는 낙담해 다시 수도원으로 돌아가야 했다. 게다가 그가 속한 수도회는 교육을 주로 맡은 단체였기 때문에 교사 학위를 받지 못하고 돌아왔다는 사실은 그를 더욱 난감하게 만들었다. 남은 삶을 실패한 교사로서 보내든지 아니면 다른 일을 해야 했다. 그는 원예를 택했다.


무수한 시험 끝에 나온 ‘멘델의 법칙’
청년은 빈에서 공부할 당시 뛰어난 식물학자 프란츠 웅거의 영향을 받아 생물학적 실험에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학자로서 실패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일을 수행했다. 그는 수도원 정원에 완두콩을 심고 교배 실험을 했다. 당시는 생물학을 사제가 가르치는 것도 허락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는 8년 동안 꼬투리완두콩을 심고 씨의 모양과 색깔, 긴 줄기와 짧은 줄기 등 일곱 가지 특징을 면밀히 관찰하고 조사했다. 그는 키가 큰 완두콩과 작은 완두콩의 교배를 통해 몇몇 특징을 발견했다. 놀라운 일이 생겼다. 잡종이 양친 키의 평균치를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 키가 큰 식물이 된 것이다. 이런 관찰을 계속함으로써 첫 세대의 두 잡종 식물의 4개 인자를 서로 짝지으면 2개의 열성 인자가 합쳐진다는 것도 알았다.

“1064개의 식물 중 787개가 줄기가 길고 277개는 짧다. 상호 비율은 2.84 대 1이 된다. 이 실험의 결과를 전부 합해 본다면 우성과 열성의 숫자 비례는 평균 2.98 대 1 혹은 3 대 1이 된다.”

그는 무수한 실험을 통해 이러한 결과를 도출했다. 오늘날 유전학의 시초가 될 유명한 실험은 이렇게 시작됐다. 그 인물은 바로 그레고르 요한 멘델(Gregor Johann Mendel, 1822~1884년)이다. 그는 뛰어난 교수도 품위 있는 박물학자도 아니고 학자로서 실패한 채소밭의 식물학자에 불과했다. 스스로의 실험을 통해 얻은 놀라운 결과를 1866년 ‘브르노 자연사 학회지’에 발표했지만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는 철저하게 무명의 재야 식물학자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그의 연구 결과를 이해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가 유명한 학자였어도 그랬을까? 그러나 그는 무명의 잡지에 기고한 무명의 사제였을 뿐이다. 2년 뒤 그는 수도원장이 됐다. 수도원의 살림을 꾸리고 이끌어 가야 할 수장이 된 것이다. 그런 멘델에게 더 이상의 식물 실험은 남의 눈총을 사기에 딱 좋은 일이었다.

멘델은 수도원장으로서 남은 생애 동안 열심히 그리고 꼼꼼히 자신의 의무를 수행했다. 하지만 실험에 대한 욕망을 완전히 잠재울 수 없었다. 그는 벌꿀 실험을 통해 혈통 좋은 벌을 교배해 잡종을 만들어 내기까지 했지만 오히려 이 벌들이 너무 포악해 먼 곳까지 날아가 사람들까지 괴롭혔다. 결국 이 벌들을 모두 잡아 죽일 수밖에 없었다. 멘델은 다시 식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 당시는 어느 누구도 유전자에 대해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들어본 적도 없던 때였다. 그러나 멘델은 자신의 실험을 통해 완두콩이 갖는 7개의 염색채 쌍의 특징을 찾아냈다. 그는 통계와 명료한 설명 그리고 대수적 상징 등을 총동원해 이것을 풀어 나갔다. 그것은 그대로 현대 유전학이다. 무명의 실패한 학자가 찾아낸 위대한 발견이고 인류의 문명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킨 업적이다.

‘자식이 어떻게 부모의 특징을 닮는가’하는 문제는 이미 오래전부터 학자들이 풀고자 했던 숙제였다. 이러한 유전 현상을 설명하려면 두 가지 문제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첫째, 부모든 자식이든 그들이 가지고 있는 형질이 어떻게 해서 나타나는가. 또는 그 형질이 나타나도록 하는 것은 무엇인가. 둘째, 부모의 형질은 어떻게 자식에게 전달되는가. 이러한 내용을 담은 근대적인 의미의 유전 법칙을 처음으로 제안한 사람은 오스트리아의 수도원 사제였던 멘델이다.

당시 식물학자들은 교배가 양친의 두 성격 사이의 어떤 요소를 만들어 낸다고 믿었다. 이런 시대에 시골의 한 수도원장이 대담하게도 형질은 ‘전부 아니면 무’라는 형태로 분리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물론 아무도 그의 주장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학계는 고사하고 멘델이 속해 있던 수도회에서도 그는 마뜩하지 않은 존재였다. 사제와 수사들도 수도원장의 실험을 알고 있었지만 당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수도원장의 처신에 맞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자칫 성서적 가르침에도 위배될 수 있는 위험한 실험을 호의적으로 보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결국 주교로부터 경고를 받았다. 그가 찰스 다윈의 ‘진화론’에 관한 책을 읽는 것도 도무지 그냥 넘기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도 멘델은 포기하지 않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실험과 관찰을 정리했다. 물론 여전히 그는 무명의 그리고 요상한 식물학자에 불과했다.


현대 유전학의 효시가 되다
멘델이 죽었을 때 수도원의 사제와 수사들이 선출한 새 수도원장은 멘델의 논문을 전부 불태워 버렸다. 그렇게 30년이 흘렀다. 멘델의 논문에 다시 관심이 쏠리기 시작한 것은 1900년에 이르러서였다. 여러 과학자들이 독립적으로 연구한 결과들이 놀랍게도 멘델의 실험과 일치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예언자였던 것이다. 유전학 연구는 그렇게 20세기 들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러니까 멘델은 19세기를 살았지만 20세기의 연구를 선구적으로 수행한 셈이다. 멘델은 개체나 종에 형태·색·행동의 다양성은 유전자가 짝지어짐으로써 이뤄진다고 추측했고 이것은 현대 유전학에서 그대로 입증됐다.

훗날 구조화학의 천재 라이너스 폴링이 삼중 나선형 모델을 제시하고 그 다음해 크릴과 왓슨이 그것의 결함을 발견하고 이중나선을 발견해 냄으로써 유전학은 획기적이고 혁명적인 발전을 거뒀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지속되고 있다. 그런데 그 발단을 바로 무명의 실패한 학자인 멘델이 마련했던 것이다. 그의 삶은 적어도 학자로서는 실패였고 수도원장으로서도 그다지 호평을 받지 못했으며 죽고 나선 논문까지 불태워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의 발견은 위대한 인류 문명사와 지성의 거보였다. 실패가 끝까지 실패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멘델의 사례가 확실히 보여준다. 유전학의 창립자이며 모든 근대 생명과학의 시조가 됐지만 빈대학에서는 제대로 된 교육도 거의 받지 못했고 끝까지 무명의 학자로 살았다. 하지만 그가 포기하지 않고 실험하고 관찰, 분석한 토대가 지금 우리의 과학을 발전시켰다.

멘델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는 것 중 하나는 그가 강한 신념과 따뜻한 인격을 지닌 인물이었다는 사실이다. 멘델은 체코의 혁명 동지들을 종종 수도원에 숨겨 줬고 그로 인해 황제의 비밀 경찰에게 의심스러운 자로 지목되기도 했다. 1874년에는 오스트리아 의회가 수도원으로부터 세금을 징수한다는 법률을 제정하자 10년간 철회를 위한 투쟁을 이어 가기도 했다. 1884년 그가 세상을 떠나자 체코의 위대한 작곡가 레오스 야나체크는 그의 장례식에 참석해 오르간을 연주하기도 했다. 그가 혁명 동지들로부터 얼마나 신뢰와 존경을 받았는지 상징하는 사례다. 학자로서는 당대에 철저히 무시됐지만 약자를 보호하고 부당한 간섭에 저항하는 행동인이 바로 멘델이었다.

1900년에 이르러 카를 코렌스, 드 브리스, 에리히 폰 체르마크가 멘델의 완두콩 실험과 같은 실험에 나섰다. 그리고 똑같은 유전의 법칙을 발견하고선 최초 발견자인 멘델의 이름을 기념해 ‘멘델의 법칙’이라고 부르게 됐다. 멘델은 끝내 자신의 연구 결과가 무시돼 실망한 채 죽음을 맞았지만 만년에 “나의 시대는 반드시 온다”고 언제나 말했다고 한다. 오늘날 교회 뒤뜰의 멘델의 대리석상 아래에도 이 말이 기록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