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제 1111호 (2017년 03월 15일)

[신인맥17]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 자본시장 꽃피운 혁신가로 ‘우뚝’

[대한민국 신인맥 17 - 미래에셋]
국내 금융시장 혁신 이끌어 온 ‘승부사’…한국 넘어 ‘아시아 1위 투자그룹’ 목표



(사진)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 /미래에셋 제공

[한경비즈니스=이정흔 기자] 그야말로 ‘금융시장 개척자’라는 수식어가 딱 맞아떨어진다. 국내 최초의 뮤추얼 펀드(1998년), 국내 최초 랩어카운트 상품(2001년), 국내 최초의 사모펀드(PEF)인 미래에셋 파트너스 1호 출범(2004년), 국내 자산 운용사 최초로 인도와 중국 해외 진출(2005년).

그의 궤적에는 늘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이다. 

월급쟁이 직장인으로 시작해 1997년 미래에셋캐피탈 창업 이후 20년. 자본금 100억원의 벤처캐피털 회사는 그 사이 증권사·자산운용사·보험사 등을 거느린 국내 대표적인 금융그룹으로 성장했다.

국내 금융업계에 ‘새로운 역사’를 써 나가고 있는 박 회장에게 주목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대학 시절부터 명동 증권가 기웃

박 회장의 성공 스토리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은 그의 ‘승부사’ 기질이다. 하지만 그의 ‘과감한 베팅’ 밑바탕에는 어린 시절부터 쌓아 온 국내 자본시장에 대한 관심이 자리 잡고 있다.

그가 주식 투자를 시작한 것은 1979년 대학교 2학년 시절부터다. 고려대 경제학과에 다니며 ‘자본시장의 발전 없이 자본주의도 발전할 수 없다’고 배운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

넉넉하지 않은 생활비를 쪼개 증권 투자를 지속하며 명동의 증권 객장을 기웃거렸다. 1984년 대학원 시절에는 서울 회현동에 내외증권연구소라는 사설 투자 자문 회사를 차려 큰돈을 벌기도 했다. 그의 나이 스물일곱 때였다.

당시 그는 일본의 증권 역사에 대해 공부하기 위해 관련 서적들을 개인적으로 일본어과 학생들에게 번역료를 주고 요약을 맡길 만큼 열정적으로 공부했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일본 자본시장의 발달 과정을 이해할 수 있었고 이를 한국 시장에 대입해 큰 흐름을 읽을 수 있었다.

주식시장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부동산 투자에 대한 감각 역시 그 시절의 경험이 밑바탕이 됐다. 그는 대학 학창 시절부터 스스로 전세 계약을 알아보고 모든 과정을 진행했다. 당시 그가 터득한 부동산 투자의 원칙은 ‘첫째도 입지, 둘째도 입지’였다.

사람들이 일하고 싶고 살고 싶어 하는 곳에 투자하면 반드시 성공한다는 것이다. 지금도 국내나 해외 부동산 투자를 결정할 때 가장 중요한 원칙 중 하나다.

박 회장은 그의 자서전 등을 통해 여러 차례 “내가 모르는 일이나 투자처에는 손을 대지 않는 게 원칙”이라며 “당시의 경험이 자본시장의 흐름을 익히고 원칙을 세우는 데 큰 자산이 됐다”고 말한 바 있다.  

◆‘박현주 펀드’의 성공과 실패

1986년 동원증권에서 첫발을 내디딘 그는 4년 6개월여 만에 서른둘의 나이에 전국 최연소 지점장으로 발탁됐다. 지점장이 된 후 그가 선택한 방법은 ‘관행 타파’였다.

50여 명의 지점 직원을 절반으로 줄이고 지점 조직을 기업분석팀·법인영업팀·관리팀·일선영업팀으로 세분화해 조직을 체계화했다. 이와 함께 영업보다 책을 읽고 기업 분석 보고서를 쓰는 직원 훈련에 집중했다. 그 결과 1년 만에 부실 점포를 전국 1등 점포로 바꿔 놓았다.

이후 그는 압구정지점장에 이어 이사급인 강남본부장으로 승진하며 승승장구했다. 증권업계 최연소 임원이었다.

한창 잘나가던 때 박 회장은 1997년 미래에셋창업투자 설립에 뛰어든다. 미래에셋은 운용사 인허가의 어려움으로 벤처캐피털로부터 시작됐고 이듬해 외환위기 구조 개혁 차원에서 자산운용업의 설립 규정이 자본금 100억원으로 낮아지면서 미래에셋자산운용이 설립됐다.

‘박현주’라는 이름 석 자를 가장 크게 알린 것은 아무래도 ‘박현주 펀드 1호’의 성공이다. 미래에셋 설립 직후 내놓은 첫 상품은 폐쇄형 뮤추얼 펀드였다. 뮤추얼 펀드는 투자자들의 자금을 모아 투자회사를 설립해 주식·채권·선물옵션 등에 투자한 후 이익을 나눠 주는 투자신탁을 말한다.

특히 ‘박현주 1호’는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직후 투자자들의 불안과 공포가 여전히 남아있던 데다 환금성이 낮은 폐쇄형이라는 점 때문에 우려가 더욱 컸다. 막상 뚜껑을 열고보니 판매 시작 2시간 30여 분 만에 500억원어치를 ‘완판’됐다.

외환위기 직후 투자신탁 회사들의 신뢰가 떨어진 이유는 불투명한 운용 방식에 있다고 진단하고 ‘투명한 운용’에 초점을 맞춘 것이 적중한 것이다.

하지만 큰 성공을 거둔 직후 쓰디쓴 실패도 곧바로 따라왔다. 1999년 내놓은 ‘박현주 2호’는 3000억원에 달하는 개인 자금이 몰릴 만큼 큰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2000년 벤처 거품이 꺼지고 증시가 내리막길을 타면서 2000년 11월 운용을 마칠 당시 수익률은 마이너스 44.92%를 기록했다. 투자자들의 원금이 반 토막이 난 것이다. 박 회장 스스로도 투자자들의 항의가 빗발쳤던 2000년 주주총회를 잊지 못할 기억의 하나로 꼽는다.

그때의 실패로 국내 주식시장의 한계를 절감하고 투자 전략을 근본적으로 재점검할 필요를 느낀 박 회장은 2001년 하버드대 비즈니스스쿨 최고경영자과정에 들어가며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이곳에서 그는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얻은 것은 물론 한국 금융 기업들의 해외시장 진출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미래에셋을 아시아 1위 투자 그룹으로 만들겠다’는 청사진을 다시 그린 것이다.

이후 박 회장은 자신이 직접 ‘국제부 팀장’ 역할을 자처할 만큼 해외 진출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국내 자산 운용사 처음으로 인도와 홍콩에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

미래에셋은 1999년 미래에셋증권을 설립하고 2005년 미래에셋생명을 출범하는 등 금융그룹으로서의 면모를 갖춰 나갔다. 그 과정에서도 박 회장의 승부사 면모가 곳곳에서 잘 나타난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미래에셋증권 설립 17년 만에 자기자본 규모 1위의 거대 증권사로 거듭나게 된 ‘KDB대우증권 인수전’이다. 2015년 당시 KDB대우증권의 인수가는 2조원대 안팎으로 예상됐지만 박 회장은 ‘2조4000억원’의 통 큰 베팅으로 KDB대우증권을 품에 안았다.
 
박 회장은 인수 직전까지 KDB대우증권에 대한 욕심을 숨기며 철저히 전략적으로 인수전에 임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박 회장은 인수 확정 후 기자회견에서 “2015년 신년사에서 미래에셋그룹의 자기자본을 3년 내 10조원까지 만든다고 한 게 사실은 KDB대우증권 얘기였다”고 말하기도 했다.

미래에셋의 보험업 진출은 2005년 SK생명 인수를 통해 이뤄졌다. 보험은 가장 장기적인 성격을 지닌 금융 상품인 만큼 금융그룹에 필수적인 요소라는 판단이 뒷받침된 것이다.

실제로 미래에셋생명은 ‘장기 투자형 보험’인 변액보험으로 차별화에 성공하며 안정적으로 보험업계에 자리 잡았다. 2016년 11월 PCA생명 인수를 통해 대형 생보사로 한 단계 도약의 계기를 마련했다.

◆‘국내 최대 증권사’ 오너 된 샐러리맨 신화

“한국 금융과 자본시장의 DNA를 바꾸겠다.” 박 회장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와 같은 목표를 강조해 왔다. 단순히 ‘돈을 많이 버는’ 투자가 아니라 ‘자본시장을 꽃피우는’ 혁신을 하겠다는 것이다.

그 본격적인 출발점이 2016년 12월 29일 합병을 완료한 통합 미래에셋대우다. 자기자본 7조8000억원, 고객 자산 230조원, 국내 지점 178개, 14개 해외 법인과 4개의 해외 사무소, 임직원 수 4800명이 넘는 초대형 증권사다.

미래에셋대우는 ‘토종 초대형 투자은행(IB)’으로 성장하고 새로운 수익원을 찾기 위해 다양한 사업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박 회장은 2016년 12월 네이버·셀트리온 등과 손잡고 ‘매년 1조원씩 벤처 펀드를 조성하겠다’고 밝히며 화제를 모은 바 있다. 미래에셋의 시작이 벤처캐피털인 만큼 국내 벤처기업의 성장이 경제성장의 원동력이 될 것이란 강한 믿음이다.

실제로 박 회장은 1999년 다음커뮤니케이션과 한국정보공학 등에 투자해 1000억원이 넘는 대박 수익을 거둬들인 경험이 있다.

강한 추진력으로 지금까지 미래에셋의 성장을 이끌어 오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한 박 회장은 평소에는 직원들과의 소통에 적극적이다. 미래에셋의 중요한 변곡점이 있을 때마다 임직원들에게 편지를 자주 쓰고 해외 지사 직원들과 진한 회식 자리를 갖기도 한다.

중요한 결정이 있을 때는 회장실이 아닌 실무 담당자가 있는 사무실로 직접 내려가 스탠딩 회의를 갖는다. 그 일을 직접 담당하는 과장·대리급의 실무자와 직접적으로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서다.

박 회장이 이렇듯 직원들과의 스킨십을 중요하게 여기는 데는 미래에셋의 기본적인 ‘투자 철학’을 심어주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박 회장이 늘 강조하는 두 가지 투자 원칙은 ‘고객 우선’과 ‘장기적인 관점’이다.

평소에도 그는 “투자를 위해 중요한 것은 수익이 아니라 치명적 실수를 하지 않는 것”이라며 “단순히 매출을 높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고객을 위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야 성장을 말할 수 있다”고 피력해 왔다. 

적립식 펀드를 비롯해 국내 ‘펀드 문화의 대중화’를 이끌어 온 박 회장은 앞으로도 미래에셋의 글로벌 투자 전문성을 확보하는 데 중점을 둘 계획이다.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 약력]
1958년생. 1983년 고려대 경영학과 졸업. 1986년 동원증권 입사. 1997년 미래에셋벤처캐피탈 설립. 1997년 미래에셋자산운용 설립. 1999년 미래에셋증권 설립. 2001년 미래에셋 회장. 2002년 하버드대 비즈니스스쿨 최고경영자과정 수료. 2005년 미래에셋생명 출범. 2016년 미래에셋대우 회장(현)

vivajh@hankyung.com

[기사인덱스]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 자본시장 꽃피운 혁신가로 '우뚝'
-미래에셋 임원 60%가 '50대 중반'
-'글로벌IB'를 향한 미래에셋의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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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일시 : 2017-03-13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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