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 제 1191호 (2018년 09월 19일)

“‘자부심과 고귀함’, 3대째 양복에 목숨 거는 이유예요."

[스페셜리포트 Ⅰ ‘땀과 시간의 결정체’ 서울의 전통 장인들②]
-3대째 102년간 서울 지킨 ‘종로양복점’ 이경주 대표의 ‘至誠無息’ 양복론 

[한경비즈니스=김영은 기자] 순수한 노동이 쌓이고 쌓여 ‘최고 경지’에 올랐다. 한 분야나 기술에 전념하며 그 일에 정통한 사람. 우리는 그를 장인(匠人)이라고 부른다. 하루아침에 장인이 되지는 못한다. 매일 갈고닦고 만들어 낸다. 

오랜 세월 부단한 성실함으로 하루하루에 충실해 온 서울의 장인들을 만났다. 
그들은 말했다. “먹고살려고 시작했지.” 

이경주 종로양복점 대표가 옷감을 보여주고 있다./ 김기남 기자



“양복장이가 뭐긴 뭐야, 양복에 목숨 거는 사람들이지.” 
102년. 한 세기를 관통하는 시간 동안 바느질을 이어 오고 있는 양복점이 있다.

현존하는 최고(最古) 양복점인 ‘종로양복점’이다. 양복에 목숨 걸던 장인 정신은 3대에 걸쳐 내려왔고 한국 양복업의 역사와 그 삶을 나란히 하고 있다. 이시영 초대 부통령, 김성진 전 문화부 장관, 김두한 전 국회의원 등 종로양복점 단골손님 명단으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써내려갈 수 있을 정도다. 

원조 골뱅이 골목으로 불리는 을지로3가. 종로양복점은 허름한 노포와 높이 솟은 오피스 빌딩이 공존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피란길에도 이어진 종로양복점 

“원래 우리 할아버지가 종로 보신각 근처에서 처음 문을 열었어요. 당시 사업도 확장하고 부지도 넓혀 갔는데 그 일대가 재개발되면서 광화문으로 옮겼고 그곳에서도 사정이 여의치 않아 7년 전 을지로로 옮길 수밖에 없었죠.” 

이경주(73) 종로양복점 대표는 도심 재개발과 맞춤 양복업 쇠퇴기를 겪으면서도 지난 50여 년의 세월 동안 묵묵히 종로양복점을 지켜 왔다. 이 대표는 ‘자부심’과 ‘고귀함’이라는 단어로 100년의 의미를 설명했다. 

이 대표의 할아버지인 고(故) 이두용 창업자는 30대에 일본으로 건너가 전문 양복 제작 기술을 배워 종로양복점을 차렸다. 일본인과 중국인이 운영하는 양복점이 대부분이었던 1910년대 서울에서 한국인이 만든 몇 안 되는 양복점 중 하나였다.

“할아버지가 경성 멋쟁이, 모던보이로도 유명했죠. 종로양복점이 최고로 성업했을 때이기도 했고요. 작업실에 200명이 근무했으니 규모가 꽤 컸어요. 그때는 양복뿐만 아니라 학생복도 했죠. 조선학교 학생들이 일본 양복점 대신 우리 양복점을 찾아주며 입소문이 났고요.”

1945년 창업자의 4남이자 이 대표의 아버지인 이해주 대표가 가게를 이어 갔다. 6·25전쟁의 포화도 이들의 맥을 끊어 놓지 못했다. 6·25전쟁이 발발하고 온 가족이 경북 경산 자인면으로 피란을 떠날 때 열차 한 칸을 빌려 재봉틀과 옷감을 모두 싣고 갔다.  

“내가 초등학생 때였는데도 피란 갈 때 생각이 나요. 열차에 옷감과 도구들을 싣고 사람들이 들고 지고 피란을 갔어요. 경북 자인면에서도 종로양복점 간판을 걸어 놓고 장사를 했어요. 난리통에 누가 양복을 지어 입어요. 인근 부대 군인들의 옷을 수선해 주고 바지를 줄여 주면서 살았죠.”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한 그는 1968년 공군 제대 후 본격적으로 양복점 일을 시작했다. 아버지의 권유 때문이었다.

“원래 양복은 어렸을 때부터 배워야 하는 건데 저는 20대 때부터 배웠어요. 배우고 배워도 부족해 어떤 손님은 자기 몸에 맞지 않는다고 제 앞에서 양복을 찢기도 했어요. 정말 혹독하게 배우며 종로양복점을 지켜 왔죠. 할아버지 때부터 이어져 온 시간이 너무 고귀하잖아요.”

이 대표는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지성무식(至誠無息)’ 정신을 되새겼다. ‘쉼 없이 정성을 다하자’는 지성무식은 할아버지에서 아버지에게로, 아버지에게서 이 대표에게로 내려온 종로양복점의 정신이다. 

사진



◆‘비스포크’ 인기지만 ‘후계자’가 고민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종로양복점에는 명절 대목이 아니라도 손님들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졌다. 하루에 10벌, 한 달로 치면 300~400벌을 만들던 시절도 있었다. 

“그때는 짜장면 한 그릇 먹을 시간도 없었죠. 5남 1녀였는데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 결혼식에도 나만 못 갔어요. 지금은 그때의 10분의 1도 못 만들지만 그때보다 사람들의 인식이나 옷 자체가 고급화됐죠.”  

50여 년간 양복과 함께해 온 그는 한 사람만을 위해 손으로 한 땀 한 땀 만드는 정성이 곧 가치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사람마다 체형이 다르고 취향도 다르잖아요. 어떤 사람은 신체적 특징 때문에, 어떤 사람은 직업적 특징 때문에 특별히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이 있거든요. 수십 년을 입어도 모양 변화가 없어 오래 입을 수 있고요. 자신에게만 꼭 맞는 옷을 맞춰 자신을 가장 빛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게 맞춤 양복의 가치고 매력이죠.” 

최근 개성을 중시하는 젊은 세대 사이에서 ‘비스포크(맞춤)’ 열풍이 불면서 후계자를 자처하며 찾아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하지만 이 대표는 아직까지 진정성 있는 후계자를 찾지 못했다. 슬하에 1남 1녀를 두고 있고 모두 예술적 감각을 물려받았지만 대를 이어 주기는 어렵다고 했다. 

“나는 가업이라 물려받았지만 요즘은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하잖아요. 아들이 화가인데 그림 그릴 때 제일 행복하다는데 양복점을 강요할 수는 없죠. 그 대신 내가 죽기 직전까지 가게를 지켜야죠.” 

한국 양복 역사의 탄생과 함께하는 종로양복점은 양복을 맞추러 오는 고객뿐만 아니라 역사를 찾고 시간을 기억하려는 사람들에게까지 의미 있는 곳이 되고 있다. 이 대표는 젊은 세대 사이에 불고 있는 비스포크 열풍이 반갑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도 있다. 

“요즘 가게만 그럴싸하게 열고 싼값에 양복을 맞춰 주는 곳들이 많아요. 그냥 치수 재고 원단만 고른 다음 공장에서 옷을 찍어오는 거예요. 사람들이 맞춤 양복을 그런 식으로 접하다 보면 실망하게 돼요. 기껏 돌아온 관심이 다시 떠나버리는 거죠. 양복에 목숨 걸 수 있는 진정성 있는 양복장이들이 많아졌으면 해요.”

 kye0218@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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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두는 49년간 쌓아온 제 자존심입니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191호(2018.09.17 ~ 2018.09.23)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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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일시 : 2018-09-18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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