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 리포트]-상반기 벤처투자금액 역대 최대…‘전문 VC’ 늘고 금융그룹도 눈독
[한경비즈니스=이정흔 기자]최근 국내 아홉째 유니콘 기업(기업 가치 10억 달러 이상의 스타트업)이 탄생했다. ‘꿀광마스크’로 유명한 화장품 업체 지피클럽이 그 주인공이다. 이처럼 국내 스타트업계에 ‘유니콘 풍년’이 가능했던 데는 국내 벤처캐피털(VC)업계가 든든하게 뒷받침해 준 영향이 크다. 벤처기업을 위한 전문 투자 기관인 VC들은 그 어느 때보다 풍부한 자금을 바탕으로 가능성 있는 스타트업들이 탄탄히 뿌리 내릴 수 있도록 멘토이자 동반자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며 ‘신르네상스’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스타트업의 성장과 함께 국내 VC업계의 ‘판’이 커지면서 최근에는 금융지주 회사들도 벤처 투자시장에 뛰어들며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심사역 절반이 20~30대’…돈·인재 몰리는 벤처캐피털

◆‘제2의 벤처 붐’은 이제 시작

국내 VC업계의 중흥기를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지표는 단연 ‘신규 벤처 투자금액’이다.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2018년 한 해 동안 국내 베처 투자업계에 유입된 신규 투자금액은 총 3조4249억원으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2017년 신규 벤처 투자금액인 2조3803억원을 훌쩍 뛰어넘은 것은 물론 2014년 신규 벤처 투자금액이 1조6393억원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무려 2배 이상 늘어난 셈이다. 신규 벤처 투자금액뿐만이 아니다. 2018년 신규로 결정된 벤처펀드 규모는 4조6868억원으로 2017년의 4조6087억원을 소폭 넘어섰고 회수 총액 또한 2조6780억원으로 전년 대비 49.1% 증가했다. 벤처 투자시장의 주요 지표인 신규 벤처 투자금액, 벤처펀드 결정, 회수 총액 모두 사상 최대치다.

이와 같은 분위기는 2019년에도 이어지고 있다. 중소벤처기업부와 한국벤처캐피탈협회가 7월 18일 발표한 ‘2019년 상반기 벤처 투자 동향’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신규 벤처 투자금액은 총 1조8996억원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상반기 투자액인 1조6327억원과 비교해 16.3% 증가한 규모로 역대 최대치다. 지난해 전체 투자액(3조4249억원)과 비교하더라도 이미 절반을 넘어선 금액이 투자된 만큼 현재 상승세를 감안할 때 2019년 전체 신규 벤처 투자금액은 4조원을 무난히 넘어설 것이라는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

한철호 KB인베스트먼트 투자관리그룹장(본부장)은 “국내 VC 시장은 지난 5년간 지속적인 성장세를 이어 왔다”며 “특히 양적인 성장뿐만 아니라 최근 들어 VC업계에 우수한 젊은 인력이 많이 유입되는 등 질적 성장도 눈에 띄는 추세”라고 말했다. 이는 실제 수치로도 나타난다. 7월 5일 한국벤처캐피탈협회의 발표에 따르면 국내 VC에서 신규 투자 기업을 발굴·심사하는 투자심사역은 지난해 말 기준 1001명으로 집계됐는데 이 중 483명(48.3%)이 20~30대다.

한 그룹장은 “ ‘풍부한 자본금’과 ‘우수한 인력’이라는 가장 중요한 토양이 갖춰졌다”며 “지금이야말로 국내 VC업계가 성장할 만한 가장 중요한 계기를 맞은 것은 분명하다”고 강조했다. 흔히 말하는 ‘제2의 벤처 붐’은 이미 시작됐다는 얘기다.

이와 같은 분위기를 타고 국내 VC들의 숫자도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한국벤처협회에 따르면 2019년 5월 말 현재 국내에 등록돼 있는 VC의 숫자는 모두 135개사로 파악된다. 2015년 국내 등록된 VC는 2015년부터 2017년까지 115~120여 개 정도로 비슷했지만 지난해 133개로 크게 늘었다. 실제로 2018년 한 해 동안 새롭게 등록된 VC만 하더라도 20개 정도로 파악된다.
VC가 증가한 만큼 VC들이 차별화를 내세우는 곳도 늘어나고 있다. 1990년대 후반 혹은 2000년대 초반부터 오랫동안 활약해 온 전통 VC들 외에 국내 1세대 창업자들이 ‘후배 양성’을 위해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곳도 적지 않다. 다음커뮤니케이션을 설립한 이재웅 대표가 대표적이다. 그는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뒤 소풍을 비롯해 3개의 투자회사를 설립했다.

이 밖에 기존의 VC에서 오랫동안 업계의 경력과 네트워크를 쌓은 전문 투자심사역 등의 전문 인력들이 독립해 VC를 설립하는 곳도 점차 늘고 있는 추세다. 이들은 대형 VC와 경쟁하기 위해 ‘전문 VC’를 내세우기도 한다. 2015년 설립돼 올해로 3년 차를 맞은 피앤아이(P&I)인베스트먼트가 대표적이다. 2015년 초까지 CJ와 연관된 VC로 알려진 산수벤처스에서 오랫동안 문화 콘텐츠 투자 심의를 담당했던 이승휘 대표가 직접 지휘를 맡고 있는 P&I인베스트는 짧은 시간 안에 ‘문화 전문 VC’로 업계에 안정적으로 안착했다는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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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운용사·금융지주도 VC 전쟁 가세

최근에는 금융권의 VC업계 진출이 두드러지고 있다. 이미 국내 VC업계에서는 벤처 투자에 최대 자금을 운용하고 있는 한국투자파트너스, 1990년 설립 이후 올해로 30년 가까운 업력을 자랑하는 KB인베스트먼트·우아한형제들·비바리퍼블리카 등 굵직굵직한 스타트업을 발굴하며 국내 VC업계의 중흥기를 이끌어 온 KTB네트워크 등 대표 선수들의 활약이 상당하다.

국내 VC 투자 중흥기를 맞아 이미 기존 시장의 선두 주자로 자리매김한 이들의 활약에 자극을 받은 은행과 자산운용사 등이 공격적으로 이 시장에 출사표를 던지고 있다. ‘단순 펀드 출자자’의 역할을 뛰어넘어 직접 ‘투자 기업을 발굴’하는 역할까지 도맡겠다는 것이다.

VC업계에 자산운용사의 진출은 이미 1~2년 전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투자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하는 차원에서 자산운용사들이 스타트업 투자를 확대하는 곳이 있는 반면 직접 VC를 설립하는 곳도 점점 더 자주 눈에 띈다. 올해 초 부동산 자산운용사인 이지스자산운용은 디캠프(은행청년창업재단)와 업무 협약을 맺고 스타트업 행사를 개최하는 등 스타트업 투자를 위한 네트워크 쌓기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며 눈길을 끌었다. 지난해 10월에는 전문 사모 운용사인 밸류시스템자산운용이 지주사 골든에그를 통해 VC 자회사 ‘에이벤처스’를 설립했고 7월 초에는 쿼드자산운용이 자본금 20억원을 출자해 쿼드벤처스를 설립했다.

최근에는 은행들의 VC 진출 선언이 잇따르며 눈길을 끌고 있다. 지난해 12월 하나금융지주가 하나벤처스를 설립하고 7월 초 1000억원 규모의 블라인드 펀드 ‘하나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 펀드’를 설립했다. 향후 3년 동안 누적 운용 자산 1조원 달성을 목표로 하는 등 ‘공격적인 투자’를 예고하고 있다. 최근에는 NH금융·우리금융·신한금융지주 등도 최근 VC 설립 검토에 나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은 이미 VC 설립과 관련해 한국벤처투자(모태펀드) 등 관계 기관과 미팅을 갖거나 관련 인력 확보에 나서는 등 올해 안에 VC 설립을 목표로 구체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이렇게 되면 KB를 비롯해 국내 5대 금융지주사 모두 VC 조직을 갖추게 되는 셈이다.
국내 금융지주사들이 일제히 VC에 관심을 두는 이유는 사실 분명하다. ‘혁신 성장’을 강조하는 정부 정책의 방향과 함께 최근 금융위를 비롯한 금융 당국은 국내 금융지주들의 기술 금융 투자 확대를 독려해 왔다. 이와 같은 분위기와 맞물려 주요 금융그룹의 은행들 또한 2015년 이후 기술 금융 실적 달성을 위해 기술금융투자펀드(TCB펀드) 출자를 지속적으로 확대하는 중이다. 이와 함께 중소기업 육성과 기업 고객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이들이 벤처 투자를 확대하는 이유다. 한 본부장은 “특히 금융그룹들 계열사 간의 시너지를 확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금융지주들도 이를 기회로 바라보는 인식이 커지고 있다”며 “예를 들어 스타트업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초기에 벤처 투자를 받은 기업이 자연스럽게 여신이 필요할 때 계열사의 은행으로 연결되고 또 기업공개(IPO) 시기가 되면 증권사로 연결되는 등 투자를 받는 스타트업에도 장점이 클 수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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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콘의 탄생’은 계속될까

국내 VC업계의 이와 같은 폭발적인 성장은 국내 스타트업 생태계의 발전과 떼려야 뗄 수 없다. 아홉째 유니콘 탄생이 보여주듯 국내에 투자 대상이 되는 ‘스타트업들의 수준’이 높아지면서 VC업계로 돈이 모여들고 이 돈이 또 될성부른 스타트업에 확실한 물줄기를 터주는 선순환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한 본부장은 “VC뿐만 아니라 스타트업에 뛰어드는 젊은 인력들의 수준이 높아지면서 실제로 예전과 비교하면 투자할 만한 대상들이 확연히 늘었다”며 “오히려 지금은 VC들의 숫자가 많아지면서 가능성 있는 스타트업 한 군데를 두고 여러 개의 VC들이 달라붙어 치열하게 눈치 싸움을 벌이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VC가 스타트업에 잘 보여야 ‘더 좋은 투자 포트폴리오’를 확보할 수 있는 만큼 ‘좋은 투자 대상’을 먼저 발굴하기 위한 물밑 경쟁이 매우 치열하다.

그렇다면 국내에 유니콘의 탄생은 계속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VC업계 전문가들은 망설임 없이 “그렇다”고 대답한다.

지금 이 시기에 유니콘 기업이 증가하는 데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가장 먼저 VC 펀드의 대형화를 꼽을 수 있다. VC업계의 자금력이 풍부해지면서 예전에 비해 스타트업에 보다 ‘과감한 투자’를 실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스타트업을 대상으로 하는 VC는 기본적으로 ‘인내’와 ‘과감’함이 필요하다. 스타트업이 어느 정도 시장 내에서 안정적인 지위를 확보할 때까지 장기적 관점에서 투자가 진행돼야 한다. 과거에는 국내 VC 시장의 규모 자체가 작았기 때문에 아무리 가능성이 높은 스타트업이라고 하더라도 국내 VC로부터 충분한 지원을 받는 게 불가능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 VC 시장의 투자 규모 자체가 커지면서 스타트업이 ‘데스 밸리’를 지나 시장에 안정적으로 정착할 때까지 충분한 자금을 공급하는 게 가능해진 것이다.

VC업계에 이와 같은 충분한 자금 조달이 가능해진 데는 정부의 적극적인 정책 자금 지원과 함께 민간 부분의 투자 또한 활성화된 영향이다. 한 본부장은 “아무래도 벤처투자의 물꼬를 트는 데는 정부의 정책 자금의 역할이 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기존에는 1년에 몇 십억 단위의 정책 자금 지원이 이뤄졌다면 최근 2~3년 사이에는 ‘3년에 10조원’ 등 그 투자 규모가 상당히 커졌다. 그만큼 스타트업 시장 육성에 대한 정부의 확실한 의지를 ‘강력한 시그널’로 시장에 보여준 것이다. 실제로 민간 또한 ‘정부의 강력한 시그널’에 화답하며 투자 규모가 크게 확대되는 분위기다. 벤처 투자업계에 대한 정부의 정책 자금 규모는 커진 반면 전체 펀드에서 정책 자금이 차지하는 비율이 낮아진 것이 이를 보여준다.

한 본부장은 “최근 유니콘 기업의 탄생은 무엇보다 한국경제 ‘주도산업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전통적인 한국의 주도산업이라고 할 수 있는 제조업의 성장은 정체기에 접어들었다. 기존에는 투자자들이 대기업 중심의 전통 산업에 투자하는 것이 투자의 수익성과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주도산업’의 변화가 빠르게 이뤄지고 있다.

한 본부장은 “실제 VC업계의 투자 흐름을 보더라도 바이오·정보통신기술(ICT) 서비스 등의 비율 증가는 이미 국내 주도산업의 흐름이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며 “이와 같은 흐름을 고려할 때 향후에는 핀테크·인공지능(AI)·소셜임팩트 투자의 중요성이 더욱 크게 부각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vivajh@hankyung.com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35호(2019.07.29 ~ 2019.08.04)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