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도시를 바꾸는 힘, 러스트벨트 극복의 조건 - 호주 애들레이드

첨단 제조업 이끄는 톤슬리 혁신 지구
소프트웨어 아닌 제조 기업 육성에 집중

문 닫은 미쓰비시 조립공장이 '호주 최고 혁신단지'로
총면적 24만㎡의 미쓰비시 완성차 조립 공장 부지. 호주 자동차 제조업의 쇠락이 시작된 곳에서 다시 한 번 ‘혁신’의 기운이 살아나고 있다. 그 중심에는 첨단 제조업이 있다.

호주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주의 주도인 애들레이드는 전통 제조업을 넘어 헬스케어·신재생에너지·첨단 기기 등 새로운 제조업의 전초기지로 변신 중이다.

사우스오스테레일리아 주정부는 2008년 가동을 멈춘 미쓰비시 공장 부지를 사들여 호주 최초의 혁신 산업단지인 ‘톤슬리 이노베이션 디스트릭트(Tonsley Innovation District, 이하 톤슬리)’를 만들었다. 이제 이곳에서는 미쓰비시 공장 폐쇄 당시 일하던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일하고 있다.

톤슬리는 20년에 걸친 장기 프로젝트다. 2008년부터 지금까지 절반을 달려온 톤슬리는 아직 곳곳이 공사 중이었다

“지금 보는 모습은 지난 10년 동안 만들어진 것이죠. 전통 제조업에서 첨단 제조업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10년 정도 걸린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일어날 수 없는 일이죠.” 톤슬리를 총괄하는 필립 도텔 이사의 말이다.
문 닫은 미쓰비시 조립공장이 '호주 최고 혁신단지'로
◆연구·생산·주거 결합 단지

호주 정부는 전통 제조업이 더 이상 경쟁력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빨리 깨달았다. 전통 제조업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새로운 산업을 모색하기보다 강력한 기술력을 기반으로 하는 첨단 제조업에 투자했다.

이후 기존 제조업이 가지고 있던 폐쇄적인 기업 문화와 연구·개발(R&D) 방식을 깨고 교류와 협동을 위한 플랫폼 ‘톤슬리’를 만들었다. 톤슬리는 첨단 제조업을 이끄는 대학과 연구기관·스타트업·주거단지·글로벌기업·인큐베이터·문화시설 등이 모여 있는 ‘교류의 장’이자 ‘테스트베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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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7일 톤슬리에 도착하자 건물 외벽에 크게 쓰인 ‘MAB(Main Assembly Building)’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미쓰비시 공장의 메인 생산 건물이었던 이곳은 톤슬리의 심장부다. 자동차 공장은 벨트컨베이어 대신 스타트업·대학·글로벌기업·교육기관으로 채워져 있었다.

넓게 트인 MAB 양 끝에는 플린더스대 톤슬리 캠퍼스와 호주 정부의 직업교육훈련센터인 ‘TAFE’가 자리하고 있다. 한쪽에서는 첨단 기술과 공학에 특화된 연구와 대학 교육을, 다른 한쪽에서는 생산직을 위한 제조업 훈련을 진행한다.

MAB 중앙에는 다양한 제조 기업 사무실과 공유오피스·카페·식당·테니스장·정원이 조성된 광장이 있다. 톤슬리에 입주해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들이 자유롭게 방문해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날도 MAB에 많은 아이들이 방문해 자전거를 타거나 농구를 하고 있었고 그 옆으로 작은 자율주행차가 지나갔다. 톤슬리를 방문한 사람들은 사무실·대학·상업 공간이 모여 있는 MAB를 거칠 수밖에 없다.

도텔 이사는 “다양한 분야의 협력을 통한 혁신을 위해서는 물리적 공간을 합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며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마주치고 새로운 사람들과 대화를 시작할 수 있는 장을 만드는 게 핵심”이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 톤슬리는 수시로 다양한 행사를 열어 이곳에 입주한 스타트업들이 네트워크를 넓혀 갈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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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에 있는 다양한 혁신 지구가 주로 전자 상거래나 소프트웨어 기업에 투자하고 있지만 톤슬리는 제조업 기업에 집중했다. 전통 제조업 회사가 하나둘 문을 닫았지만 제조 기술이나 연구 인력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톤슬리에 입주한 호주의 헬스케어 스타트업 ‘마이크로-X’는 현재 홀덴에서 일했던 기술자들을 고용하고 있다.

도텔 이사는 “마이크로-X가 홀덴 기술자들에게 요구한 것은 마술이 아니라 자동차 대신 엑스레이를 만드는 것이었다”며 “완성품을 생산하던 제조 회사가 사라졌다면 이 기술을 유지하면서 더 실용적이고 고도화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변형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주정부가 사들인 공장, 지역공동체도 참여

톤슬리가 집중하는 4개의 주요 사업 분야는 헬스케어와 의료기기, 클린테크와 재생 가능 에너지, 자동화 기술, 광업과 에너지 공급이다.

도텔 이사는 “이곳이 50년 동안 무언가를 만들고 생산하던 공간이었기 때문에 앞으로 50년 동안도 무엇이든 만드는 공간이 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첨단 제조업을 통해 높은 부가가치를 생산하기 위해서다. 제조 스타트업뿐만 아니라 글로벌 제조 기업이나 대기업 역시 입주해 있다.

호주에서 가장 큰 재생에너지 회사인 ‘젠에너지(SIMEC ZEN Energy)’와 호주에서 가장 큰 광전자 제조 기업 ‘자이스(ZEISS)’, 글로벌 기업인 지멘스가 입주해 있고 곧 테슬라가 입주한다. 테슬라가 미국이 아닌 다른 곳에 정비 중심지를 세우는 것은 최초다.

톤슬리는 현재 65%가 완공된 상태다. 35개 기업이 직접 투자해 입주했고 공유오피스에 입주한 스타트업까지 합치면 100여 개 기업이 자리 잡고 있다.

플린더스대 톤슬리 캠퍼스와 TAFE에서는 매년 6000~8000명이 공부하고 있다. 톤슬리는 혁신적인 기업을 입주시킨 후 기업들이 기술을 마음껏 테스트하고 다른 기업과 협력할 수 있는 오픈 이노베이션의 장을 마련해 준다.

도텔 이사는 “톤슬리는 정부가 소유한 땅이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하지 못하는 스케일이 큰 시험들을 진행할 수 있다”며 “주택지구와 보행자 구역, 상업용 공간이 마련돼 있기 때문에 IT·스마트시티·이동성·기술 적용성 등 다양한 테스트를 진행할 수 있는 하나의 도시이자 놀이터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문 닫은 미쓰비시 조립공장이 '호주 최고 혁신단지'로
톤슬리의 마지막 역할은 바로 미래를 향한 여정에 지역공동체를 동참시키는 일이다. 이곳이 크라이슬러와 미쓰비시 공장으로 이용됐던 50년 동안은 부지 전체를 둘러싸는 울타리가 있었다. 일반인들은 들어올 수 없던 공간이었지만 지금은 아이들이 웃으며 뛰어다니고 가족들이 모여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도텔 이사는 “사람들은 대개 혁신 단지라고 하면 큰 보안경이나 실험실 가운을 입고 좀비처럼 다니는 사람들을 떠올린다”며 “톤슬리는 기업이나 연구기관뿐만 아니라 신기술을 두려워하는 일반인들과 지역공동체에도 혁신의 경험을 제공한다. 수소가 미래를 움직일 중요한 키라면 지역 주민들을 직접 자율주행차에 태우거나 수소 바비큐를 이용해 혁신을 직접 경험하게 해주는 게 우리의 일”이라고 설명했다.

호주 애들레이드=김영은 기자, 후원=한국언론진흥재단 kye0218@hankyung.com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37호(2019.08.12 ~ 2019.08.18)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