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녹슨 도시를 바꾸는 힘, 러스트벨트 극복의 조건⑤ 미국 피츠버그]
-철강 산업 메카에서 첨단 로봇 도시로 탈바꿈…산학협동이 위기 극복 원동력


20세기 미국 철강 산업의 중심지였던 피츠버그는 1960년대부터 철강 산업이 쇠퇴하면서 수십년간 쇠퇴의 길을 걸었다. 주력 산업이 무너지자 많은 실업자가 생겨나면서 다양한 사회문제가 발생했고 ‘녹슨 지대(rust belt)’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지역 경제도 크게 위축됐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피츠버그는 펜실베이니아 주정부의 전폭적인 투자와 지원,
지역의 대학과 기업들의 적극적인 산학협동에 힘입어 첨단 로봇 산업의 중심지로 변모했다.
‘대학이 성장 엔진’…AI·생명과학 키우니 기업 몰려
“사람들은 종종 피츠버그를 디트로이트와 비교합니다. 디트로이트도 러스트벨트 문제로 고생했지만 피츠버그만큼 혜택을 받지 못한 것은 미시간대 같은 좋은 대학이 도시 안에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피츠버그에서 주목할 점은 피츠버그대(UPITT)와 카네기멜론대(CMU)를 비롯해 많은 학교들이 도시 안에 있어 교육·연구 분야의 발전과 성장에서 지역도 혜택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대학의 경쟁력이 경제성장의 엔진이 된 셈이죠. 펜실베이니아 주의 다른 작은 도시들 중에서도 대학이 있는 도시가 그렇지 않은 곳보다 더 나은 성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피츠버그대의 사회·도시연구센터(UCSUR)에서 도시와 지역을 연구하는 크리스토퍼 브리엠 교수는 피츠버그의 러스트벨트 위기 극복의 성공 요인으로 가장 먼저 ‘대학’을 꼽았다. 피츠버그에는 컴퓨터 과학대로 유명한 카네기멜론대와 생명과학으로 유명한 피츠버그대가 있다. 도시가 대학을 품고 있어 대학의 성장이 가져온 발전을 지역도 충분히 누릴 수 있었다.

일자리와 삶의 질을 높이는 노력도 주효했다. 1980년대까지 철강 생산의 중심지였던 피츠버그는 산업 패러다임이 바뀌면서 일자리가 사라지자 실업과 사회문제가 발생했다. 기존 제조업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다른 지역으로 빠져나갔다.
‘대학이 성장 엔진’…AI·생명과학 키우니 기업 몰려
톰 머피 피츠버그 전 시장은 12년의 재임 기간 동안 지역 대학 연구소에 지속적으로 투자하고 불황의 영향을 덜 받는 교육과 의료 산업 육성에 집중했다. 그 결과 제조업 중심 도시에서 소프트웨어·생명공학 관련 산업을 중심으로 교육·의료·4차 산업도시로 변신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강가에 인접한 토지인 워터프런트 지역을 개발하고 도시환경을 재정비해 사람들이 피츠버그에 살고 싶어 하도록 만들었다. 피츠버그는 새로운 회사를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대학을 핵심 축으로 교육·의료·4차 산업 기술 연구의 퍼스트 무버가 되자 인재를 영입하거나 연구 교류를 하기 위해 기업들이 앞다퉈 지사를 세우기 시작했다.

브리엠 교수는 “피츠버그는 실리콘밸리가 되지 못했지만, 많은 회사가 대학 인재를 영입하기 위해 피츠버그에 지사를 설립하게 만들었다”며 “카네기멜론대 출신의 아르고AI와 듀오링고는 예외적인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대학이 성장 엔진’…AI·생명과학 키우니 기업 몰려
◆ AI·머신러닝…대학이 경제 성장 엔진

피츠버그가 ‘철강 도시’에서 ‘첨단 로봇 도시’로 탈바꿈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은 한 곳은 바로 카네기멜론대의 컴퓨터과학대(School of Computer Science)다. 이곳에는 인공지능(AI)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로 CMU의 머신러닝과를 만든 톰 미첼 교수가 있다.

미첼 교수에 따르면 피츠버그의 재탄생은 기술과 신기술을 연구, 활용하는 수많은 기업들에 의해 가능했다. 카네기멜론대는 그 기술 발전의 중심에 있었다. 여기에는 로보틱스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컴퓨터공학과 엔지니어링 분야가 포함된다.

정부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카네기멜론대는 1970년대 연방 정부의 컴퓨터 공학과 AI 분야 기초 연구에 대한 지원에 힘 입어 로보틱스를 처음 독립된 연구 분야로 만들어 낸 대학이다.

US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가 매년 발표하는 대학 평가에서 카네기멜론대는 AI 분야 1위 대학으로 꼽힌다. 그것은 하루 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라, 1979년의 매우 이른 로보틱스 분야 개발에서 기인한다.

물론 장기간에 걸친 프로젝트인 만큼 대학 혼자 이룬 성과는 아니었다. 피츠버그의 부활은 주정부·대학·기업 등 다양한 참여자의 팀워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여전히 카네기멜론대에는 AI 연구를 선도하는 머신 러닝 분야 최고의 박사들과 교수진이 있다. 미첼 교수는 “기초 연구에 대한 연방 정부의 25년간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이것들을 이뤄내지 못했을 것”이라며 “정부의 지속적인 지원이 큰 변화를 만들어 냈다”고 말했다.

민간 투자 재단은 첨단 기술 연구뿐만 아니라 카네기뮤직홀을 통한 심포니, 오페라 공연 등 문화적 인프라 구축도 가능하게 했다. 마지막으로 벤처 자금 지원이 있다. 미첼 교수는 “벤처 자금을 지원받기가 쉽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지만 만약 누군가 좋은 아이디어가 있고 피츠버그에서 회사를 시작한다면 벤처 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학이 성장 엔진’…AI·생명과학 키우니 기업 몰려
◆ ‘카네기 문화’…경쟁력의 비밀

피츠버그의 재도약에는 무엇보다 경쟁력 있는 대학의 존재가 중요했다. 대학의 경쟁력은 어디서 온 것일까. 전문가들은 ‘카네기 문화’를 꼽는다. 카네기멜론대는 다른 대학·연구소·기업과 가장 활발하게 교류하는 대학이다.

원하는 연구 분야를 학교에 제안하면 가장 빨리 연구에 착수할 수 있고 분야를 막론하고 관련 학계와 자유롭게 소통하고 협업할 수 있다. 처음에는 다소 엉뚱해 보이는 분야 간의 협업에서 중요한 기술이 발견되기도 한다.

학교가 연구에 대해 전폭적인 지지와 지원을 해주기 때문에 이런 고유한 문화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 미첼 교수가 카네기멜론대에서 처음 머신러닝과를 만들고 AI 연구를 선도할 수 있었던 것도 ‘카네기 문화’라는 DNA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미첼 교수가 처음 머신러닝학과를 제안했을 때 학교 측은 앞으로 100년간 지속될 연구 분야가 아니면 대학에 새로운 학과를 만들 수 없다고 말했다.

미첼 교수와 동료들은 왜 머신 러닝이 중요한지, 어떠한 흥미로운 학문적 과제가 있는지, 이것이 왜 사회에 중요하며 앞으로 100년간 이곳에 존재할 것인지를 담은 ‘머신러닝 훈련(discipline in machine learning)’이라는 보고서를 학교에 제출했다.

미첼 교수는 “다른 대학과 경쟁하려면 고유의 강점이 있어야 한다”며 “최고의 교수를 채용하기 위해 지금도 스탠퍼드대·매사추세츠공과대(MIT)와 경쟁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들에게 없는 머신러닝 학과가 있다”고 강조했다.

미첼 교수는 “카네기멜론대에서는 언제든 다른 분야 전문가들과 대화하고 협업할 수 있다”며 “이것은 카네기만의 문화”라고 말했다.미술 전공자로 현재 카네기멜론대 컴퓨터과학대에서 강의하는 강은수 교수(미디어 아티스트)도 이 같은 카네기 문화의 수혜자 중 한 명이다.

강 교수는 “카네기멜론대의 가장 큰 장점은 사람들이 새로운 시도에 항상 열려 있고 지지하는 자세를 취한다는 점”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미첼 교수가 세계 최초로 머신러닝 학과를 만들 때처럼 미술대학 교수였던 나 역시 컴퓨터과학대에서 예술과 머신러닝을 연계하는 수업을 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며 “학교가 적극적으로 지원해 준 덕분에 현재 학생들에게 ‘예술과 머신러닝(Art and Machine Learning)’에 이어 ‘인공지능 크리에이티브(Creative AI)’를 가르치고 있다”고 말했다.
‘대학이 성장 엔진’…AI·생명과학 키우니 기업 몰려
생명과학 분야와도 다양한 협업이 이뤄지고 있다. 특히 생명과학 분야에서 명성이 높은 피츠버그대 맥고완 재생 의학연구소가 대표적이다. 피츠버그대는 상위 20개 공립 대학이지만, 생명과학 분야로 보면 전미에서 탑 대학 중 하나다. 병원과 의대는 미국국립보건원(NIH) 펀딩에서 4위를 차지했다.

미국의 다국적 제약기업인 화이자 제약, 벡톤 디킨슨, 메드트로닉, 애보트 등이 맥고완 연구소에 투자하거나 협업해왔다. 피츠버그에 오피스가 있는 필립스 레스피로닉스도 그중 하나다.

맥고완 연구소의 윌리엄 와그너 소장은 현재 카네기멜론대 연구팀과 로봇을 개발하고 있다. 와그너 소장이 개발 중인 로봇은 뱀처럼 심장에 들어가 주어진 패턴대로 주사를 놓는 로봇이다.

와그너 소장은 “이 로봇에 대한 아이디어는 카네기 로보틱스에서 나왔다”며 “우리는 로봇을 이용한 수술 기술에 관심이 있고 카네기 로보틱스에는 의료 시술 로봇을 연구하는 팀이 있기 때문에 앞으로 더 가깝게 교류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카네기멜론대는 사립대, 피츠버그대는 공립대로 두 학교는 매우 다르지만, 경쟁 대신 협업이 이뤄지고 있다. 또 지리적으로도 가깝다.

와그너 소장은 “맥고완 연구소의 10~12명의 교수가 현재 카네기멜론대에서도 교수직을 맡고 있다. 나도 최근 카네기멜론대에서 생의학 강연을 했다”며 “우리 팀의 절반은 카네기멜론대 교수이며 나머지는 피츠버그대 교수다. 두 대학은 경쟁보다 협업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고 말했다.
‘대학이 성장 엔진’…AI·생명과학 키우니 기업 몰려
[인터뷰] 톰 미첼 카네기멜론대 교수

“신기술을 향해 기존 산업을 뛰어넘어라”

톰 미첼 교수는 인공지능(AI)의 세계적인 권위자로 카네기멜론대에 세계 최초로 머신러닝과를 만들었다. 그는 제조업 몰락으로 위기를 겪고 있는 한국에 대해 “현재의 기술을 사용해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며 “산업을 뛰어넘으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피츠버그의 부활은 언제 시작됐나.

“이전에는 카네기멜론대가 우수한 인재들을 배출해도 피츠버그에 일자리가 없었기 때문에 학생들이 졸업 후 피츠버그를 떠났다. 하지만 2000년대에 굉장히 중요한 순간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구글이 피츠버그에 기술센터를 열기로 결정한 순간이다. 현재 수백 명이 그곳에서 일한다. 구글 기술센터는 다른 큰 회사들이 피츠버그에 들어오는 움직임을 만들었다. 현재 피츠버그에는 구글·애플·아마존·페이스북과 같은 많은 첨단 기술 회사들이 있다. 이들이 많은 일자리를 만들었다. 카네기멜론대 졸업생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 다른 국가에서 많은 사람을 데려오기도 했다. 이는 매우 중대한 변화였다. 통계를 보면 피츠버그에는 로보틱스 분야에서만 20개가 넘는 회사가 있다. 그리고 이 분야에서만 2011년부터 고용률이 3배로 증가했다. 이제는 이러한 변화가 가속화되고 있다. 1990년대에는 피츠버그가 지금과 같이 인재들을 붙잡고 일자리를 줄 생태계가 형성돼 있지 않았다.”

-학교에 창업을 지원하는 제도가 있나?

“학생이나 교수가 연구나 창업을 할때 벤처회사들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카네기멜론대 비즈니스 대학 안에는 슈와츠 센터라는 카네기멜론대 학생과 교수들의 기업 활동을 장려하는 센터가 있다. 컴퓨터 과학대학도 컴퓨터 공학 중심의 스타트업을 도와주려고 노력한다. 누군가 스타트업을 시작한다면 이러한 센터들에서 사업 시작에 대한 코칭을 받을 수 있고 벤처 자금 투자를 받기 위한 발표(피치)를 어떻게 해야할 지 배울 수 있다.”

-한국이 전통 제조업의 몰락을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산업을 뛰어넘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현재의 기술을 사용해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기에 다음 세대로 뛰어넘어야 한다. 한국과 같은 나라들이 미국이 기존 기술에 투자할 때 기술을 발전시켜 한순간에 미국을 뛰어넘었고 그것이 피츠버그가 러스트벨트를 겪은 이유이기도 하다. 새로운 기술이 존재할 수도 있다. 따라서 만약 다시 한 번 그런 발전을 이루고 싶다면 한국은 산업을 뛰어넘어야 한다.”
‘대학이 성장 엔진’…AI·생명과학 키우니 기업 몰려
피츠버그(미국) =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 후원 한국언론진흥재단


[특별기획-녹슨 도시를 바꾸는 힘, 러스트벨트 극복의 조건⑤ 미국 피츠버그 기사 인덱스]
-대학이 성장 엔진’…AI·생명과학 키우니 기업 몰려
-피츠버그에 글로벌 기업·스타트업 모이는 이유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44호(2019.09.30 ~ 2019.10.06)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