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전략 트렌드]
긴 시간 동안 ‘검증’받은 콘텐츠…‘확장성’ ‘깊이’ ‘완결성’ 지녀야
‘에픽 스토리’  비즈니스의 성패를  좌우하다
(사진) 2016년 개봉돼 무려 2조5000억원의 매출을 올린 월트디즈니의 영화 ‘스타워즈 에피소드 7’.

[허지성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지난 10년간 글로벌 영화 시장 트렌드의 지형은 크게 변했다. 박스오피스모조닷컴(Boxofficemojo.com)에서 집계한 역대 글로벌 영화 매출 순위를 살펴보면 상위 10개 중 9개, 20개 중 17개가 2006년 이후 개봉된 영화들이다.

이 중 20위인 ‘캐리비안의 해적 : 망자의 함(2006년)’의 전 세계 수입은 10억5000만 달러다. 따라서 흥행 순위 20위 안에 들어 있는 지난 10년간 개봉 영화들 각각이 어림잡아도 최소 1조원 이상의 소위 ‘대박’을 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상위 20개 중 무려 17개가 기존 개봉 영화의 속편들이기도 하다. 기존의 영화판 명언 중 하나인 ‘1편보다 나은 속편은 없다’는 공식이 적어도 흥행 측면에서는 지난 10년 동안 완전히 무너졌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반지의 제왕’, ‘배트맨 다크 나이트’, ‘아이언맨’, ‘어벤져스’,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 등 2000년 이후 한국에서도 많은 관객을 불러들였던 할리우드 영화들을 떠올려 보면 쉽게 수긍할 수 있듯이 ‘시리즈’로의 쏠림 현상이 지난 10년간 크게 심화됐다.

재미있는 것은 상위 10개 중 5개, 20편 중 9편을 1개 스튜디오가 제작했다는 사실이다. ‘시리즈 기반의 블록버스터’가 지난 10년간 영화 흥행의 흐름이었다면 그러한 시리즈를 보유한 스튜디오로의 매출 쏠림 현상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성공 신화의 주인공이 한국 사람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는 유서 깊은 4대 스튜디오인 파라마운트·폭스·유니버설·워너브러더스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면 아쉽지만 틀렸다. 영화 가장 앞부분에 나오는 스튜디오 소개 영상들을 떠올려 보면, 중요한 스튜디오 명단 중 하나가 빠져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월트디즈니다.

◆마블 인수로 대박 친 월트디즈니

월트디즈니는 2009년부터 ‘스토리’들을 사들이기 시작했였다. ‘헐크’, ‘아이언맨’, ‘어벤져스’, ‘캡틴 아메리카’, ‘엑스맨’ 등 유서 깊은 코믹스 시리즈의 출판사이자 ‘엑스맨’ 등을 통해 영화 제작에 갓 진출한 마블엔터테인먼트를 40억 달러에 인수했고 2012년에는 ‘스타워즈’ 시리즈의 제작자인 조지 루카스가 설립한 루카스필름 또한 약 40억 달러에 인수했다.

마블은 미국 만화 산업계의 초강자로, 1939년 타임리코믹스란 회사로 시작됐다. 회사 설립 이후 ‘아이언맨’, ‘엑스맨’, ‘헐크’, ‘캡틴 아메리카’, ‘판타스틱4’처럼 이제는 전 세계인에게 친숙한 캐릭터를 만들어 냈다. 이 밖에 아마데우스 조, 아이언 피스트, 퍼니셔, 애비게일, 타노스, 킥애스 등 주연급과 조연급을 합치면 8000여 명에 이르는 캐릭터 군단을 창조해 냈다.

마블엔터테인먼트에 대한 디즈니의 투자는 즉각적인 성공을 가져다줬다. ‘어벤져스’ 시리즈 두 편 만으로 4조원에 가까운 매출을 올린 것을 시작으로 ‘아이언맨’, ‘캡틴 아메리카’, ‘토르’ 등을 합치면 인수가의 몇 배에 달하는 매출을 수 년 만에 달성하는 등 디즈니 수익 개선의 효자 노릇을 톡톡히 했기 때문이다.

루카스필름 인수 건 또한 2015년에 개봉된 ‘스타워즈 에피소드 7’만으로 무려 2조5000억원의 매출을 달성하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디즈니의 변화는 로버트 아이거 최고경영자(CEO)가 부임하면서 시작됐다. 마이클 아이스너에 이어 2005년 대표가 된 로버트 아이거는 2000년대 초반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대성공을 통해 대서사시, 즉 에픽 스토리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이러한 요소를 보유한 영화 프랜차이즈를 사들였던 것이다.

마블엔터테인먼트나 DC코믹스 등에서 발간하는 연재 만화책인 코믹스를 소재로 제작된 영화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큰 이유는 소재의 다양성과 스토리의 깊이다. 우리가 영화를 통해 이름을 자주 들어본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코믹스들은 대부분이 수십 년 전부터 만화로 그려지기 시작해 현재까지도 연재가 이어지고 있는 대작들이다.

다수의 창작자들에 의해 수십 년에 걸쳐 제작되는 코믹스의 특성상 다양한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것이 불가피하며 각 등장인물들의 탄생부터 성장, 위기와 극복 과정, 영웅의 성과 발휘, 그 속에서의 고뇌와 갈등이 개연성 있게 녹아 있다.

또한 빤한 권선징악 위주의 내용에서 벗어나 선한 의도의 악, 또는 악한 의도의 선 등 다층적인 스토리의 구조를 담고 있다는 특징도 지닌다.

따라서 유명 만화를 소재로 한 영화는 120여 분의 일반적인 러닝타임에 모든 이야기 담을 수 없다는 사실을 관객들도 알고 있어 스토리 전체를 시간을 들여 예습하고 영화를 보기도 한다. 이러한 특성이 마치 ‘에픽’이라고 불리는 대서사시의 특성과도 일치하기 때문에 최근에는 이러한 코믹스 기반의 스토리들을 ‘현대판 에픽’이라고 부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미디어 환경의 변화가 ‘에픽’ 선호도 높여

‘에픽(Epic)’, 즉 대서사시는 신화와 전설, 역사, 인류의 운명 등을 장편의 이야기에 담고 있다. 서사시의 출발점이자 전쟁에 얽힌 신화와 역사 서술 문학의 기원으로 일컬어지는 호메로스(호머)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보면 영웅의 모습이 서술 형식(narrative form)을 통해 기술돼 있다.

대체적으로 영웅의 활약상이 강조되고 장시(長詩)로 이뤄져 배경을 이루는 이야기가 강력한 인과관계를 기반으로 자세히 풀어져 있다는 특성을 지닌다. 이에 따라 완결성을 지녀야 하는 스토리텔링의 벤치마킹 대상으로 에픽이 거론되기도 한다.

현대의 소설뿐만 아니라 영화나 드라마에서부터 노래에 이르기까지 최근의 콘텐츠에 꼭 필요한 것은 스토리텔링이라고 강조되는 시대 속에서 에픽의 중요성이 부상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에픽 스토리의 부상은 미디어 환경의 변화와도 관련이 깊다. 우선 소비자 간의 연결성이 커졌다.

과거에는 영화의 완성도가 상대적으로 높지 않더라도 엄청난 마케팅비를 투입하거나 영화관에 오랫동안 걸면 등장인물의 스타 파워 등을 기반으로 어느 정도의 성과를 기대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최근에는 소비자 간의 연결성, 소비자들의 정보 접근성의 향상으로 인해 이러한 방식의 사용이 어려워졌다.

또한 콘텐츠를 시청할 수 있는 미디어 채널이 많아지고 콘텐츠 제작비도 낮아져 소비자의 관심을 확보하기 위한 경쟁도 심화됐다.

대형 영화 제작 스튜디오로서는 소위 ‘대박 아니면 쪽박’의 극단적인 흥행 결과를 쥐게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소비자의 관심을 지속적으로 이끌어 낼 수 있는 슈퍼 블록버스터, ‘현대판 에픽’ 시리즈가 안정적인 흥행의 보증수표로 부상한 것이다.

과거에는 영화나 드라마를 만들 때 1탄·시즌1을 만든 후 성공하면 그 뒤 2탄·시즌2를 만들곤 했다. 1탄의 인기에 부합해 2탄은 얹혀 탄생하곤 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스토리가 상대적으로 빈곤하거나 억지스러운 영화가 탄생하기도 했다. 1편을 보고 만족한 관객들이 속편을 보고 실망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최근에는 1탄이 성공하면 어떻게든지 투자를 다시 받아 2탄을 만드는 방식에 기대기에는 시장의 쏠림 현상이 너무 심해졌다.

반면 마블이나 DC코믹스가 보유한 에픽 스토리들은 수십 년간 쌓여 있는 스토리의 양 자체가 엄청나고 이러한 스토리들 간의 개연성도 높기 때문에 큰 그림의 이야기를 모두 그려놓은 뒤 1탄에는 어디까지, 2탄에는 또 다른 어디까지 담겠다는 분할 기획이 가능하다.

에픽 스토리가 이미 수십 년의 역사에 기반 한 탄탄한 팬덤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도 중요하다. 수십 년 동안 코믹스를 읽으면서 자란 세대들에게 에픽 스토리에 기반 한 영화들은 큰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영화 관람하는 모습이나 자신이 사랑하는 등장인물에 대한 코스프레 사진을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 등에 올릴 수도 있고 복잡하게 얽혀 있는 오리지널 코믹스에서의 스토리가 영화에 어떻게 구현됐는지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포스팅을 통해 자랑스럽게 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에픽 스토리’  비즈니스의 성패를  좌우하다
◆럭셔리 브랜드들의 전략과 매우 비슷해

제품의 품질에 대해 소비자들의 안목이 까다로워지는 특징은 스토리를 기반으로 하는 콘텐츠 사업에서도 예외일 수 없다. 최근의 소비자들은 눈앞에 펼쳐지는 콘텐츠의 가벼운 껍데기 외에도 그 이면의 잘 짜인 스토리, 즉 보다 심층적인 뿌리 깊은 스토리를 구분해 낼 수 있는 강력한 정보 소스를 보유하고 있다.

변화하는 미디어 환경에서 에피소드 위주로 각 편을 만들어 내는 기존의 콘텐츠 제작 방식으로는 성공을 담보하기 힘들어진 것이 사실이다.

긴 이야기를 담고 있는 에픽을 기반으로 1탄·2탄·3탄 등 시퀄(sequel : 후속편)과 프리퀄(prequel : 앞서 개봉된 영화에 선행하는 사건을 담은 영화), 스핀오프(메인 영화 스토리에 등장하는 주변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 등의 영화와 드라마, 게임을 제작해 소비자들의 미디어 사용 패턴의 요소요소에 배치하는 방식으로 콘텐츠 흥행 공식이 진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패션 분야나 자동차 분야 등의 럭셔리 브랜드가 전통(heritage)을 중시하듯이 콘텐츠 산업에서도 긴 시간을 거쳐 검증 받아 온 스토리의 역사 자체가 콘텐츠에 대한 소비자의 선택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에픽 스토리와 같은 대서사시가 보유한 확장성·깊이·완결성을 지닌 소재에 대한 콘텐츠 기업들의 갈망은 앞으로 더 심해질 전망이다. 바야흐로 스토리의 전성시대가 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