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집의 인문학 속으로]
산티아고 순례길이든 제주 올레길이든 모든 길의 공통점은 ‘열려있음’
공적이며 사적인 ‘길’에서 관용을 찾다
(사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한국경제신문

[한경비즈니스 칼럼=김경집 인문학자, 전 가톨릭대 인간학교육원 교수] 누구나 길을 누릴 수 있다. 물론 고속도로처럼 사용하는 비용을 지불해야 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길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길은 평등하고 관용적이다.

제주의 올레길이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까지 가는 ‘카미노 데 산티아고’)에서 영감을 얻어 언론인이던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이 공들여 만들어 낸 길이라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는 일이다. 그의 노고 덕택에 수많은 이들이 제주의 아름다운 길을 행복하게 걷고 위안을 얻고 힘을 받는다.

물론 제주의 길 자체가 워낙 아름다워 사람을 저절로 이끄는 매력이 넘치기는 하지만 나는 그 길을 걸을 때마다 그 남매가 그냥 길을 지도에서 점들을 콕콕 찍어 선을 쓱쓱 이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수많은 그 길 주변에 사는 이들을 설득했을 노고가 떠오른다.

골목은 내 집은 아니어도 공적 공간의 은밀한 사적 전용(轉用)의 전용(專用) 공간이라는 모호하고 살가운 곳이다. 골목은 내 집 마당의 연결점이다. 따라서 내 집 앞의 골목은 옷매무시를 다듬지 않고도 잠깐쯤 아무렇지도 않게 휘저을 수 있는 공간이다.

파자마 차림으로 잠시 배회해도 허물이 되지 않는 ‘공적이며 사적인 도로’다. 그런 길을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허구한 날 아무런 예고도 없이 오가는 일은 불편하다.

올레길에 예쁜 카페도 있고 아름다운 게스트하우스도 있으며 이런저런 가게들이 방문객들의 지갑 덕을 보기는 하겠지만 그 동네에 사는 토박이 시민들에게는 딱히 무슨 경제적 이익이 돌아가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그이들은 길을 내줬다.

모두가 쉽게 동의하지는 않았을 것이니 서 이사장 남매가 설득에 들였을 공은 결코 작지 않았을 것은 자명하다. 그 길을 내달라고 설득한 사람이나 결국 내준 사람들이나 모두 나 하나보다 많은 이들이 누릴 행복과 위안을 위해 오랫동안 공들인 결실이 바로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걸어 다닐 수 있는 올레길이다.

◆내주고 품는 힘을 배워야

산티아고 순례길은 야고보(스페인어로 산티아고) 성인의 무덤을 찾아가는 길이다. 그러나 그 길이 가톨릭 신자들만 갈 수 있는 길은 아니다. 중간 곳곳의 성당과 교회, 병원과 다리, ‘알베르게’라는 여행자 숙소들이 그들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누구나 이용할 수 있도록 건설된 구조물들이다. 처음부터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모한 십자군 전쟁의 길이기도 했을 것이고 수많은 종교재판으로 처형된 이들이 끌려갔을 길이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어리석음과 폐쇄성을 걷어내고 관용의 길로 서서히 바뀌었을 것이다.

내 길을 내주는 것은 내 마음을 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금도 수많은 이들이 그 길을 걸으며 삶의 흐름을 바꾸기도 하고 깊은 성찰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 길에는 그런 너그러움이 깃들어 있다. 그 길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그 너그러움이다.

둘레길도 그렇고 마실길도 그렇지만 나는 올레길을 걸을 때마다 골목마다 고샅고샅 밴 동네 사람들의 삶과 너그러움을 느낀다.

지인 한 사람이 북한산 둘레길 초입에 사는데 처음에는 불쑥불쑥 찾아오는 사람들과 소음 때문에 미칠 것 같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사람들에게 자신의 집 앞을 지날 때 축복하는 마음을 가졌더니 조금도 시끄럽지 않더라고 하는 말에 뭉클하게 공감한 적이 있다.

둘레길이나 올레길이 걷기에 만만해 우르르 몰려갈 게 아니다. 그 길을 내준 동네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과 그들이 베푼 관용에 대한 공감을 담아 가야 한다.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같은 방향으로만 걷지 않는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걷기 때문에 마주치기도 하고 그래서 서로 손을 흔들거나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나눌 수 있다.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그게 길의 관용이 주는 즐거움이다.

올레길이나 둘레길을 걸을 때 그냥 풍경에만 취할 게 아니라 그 길을 내준 그곳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공존과 관용의 가치를 다시 한 번 곱씹으며 걸어볼 일이다.

관용의 가치를 깨달으며 걸으려면 존 스튜어트 밀의 책을 먼저 읽어 보면 좋을 것이다. 밀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데서 자유가 끝난다고 말했다. 관용이 사라지면 ‘자유로운 개인’의 준거도 사라진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저주만 퍼붓거나 원망과 분노만 토해내는 것만큼 야만적인 것은 없다. 21세기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