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집의 인문학 속으로]
삶이란 슬픔과 기쁨이 혼재하는 것…남은 슬픔은 즐거움으로 날릴 수 있어
슬픔, 그러나 꼭 슬프지만은 않은
(일러스트 전희성)

[한경비즈니스 칼럼=김경집 인문학자, 전 가톨릭대 인간학교육원 교수] 슬픔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설령 그가 마조히스트라고 하더라도 그에게는 고통과 슬픔이 또 다른 기쁨의 형태로 반응하는 것이다. 슬픔은 말 그대로 슬픈 마음이나 느낌을 뜻한다.

분하고 억울해서 혹은 불쌍하고 안타까워서, 아프고 괴로워서 또는 허무하고 무력해서 느끼는 자연스러운 감정들을 통틀어 우리는 슬픔이라고 지칭한다.

◆슬픔의 다른 면모

하지만 종교에서는 슬픔을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여기지 않는다. 괴롭고 서럽거나 불쌍해 마음이 괴롭고 답답한 게 슬픔의 감정이지만 영적 고난이나 신앙에서의 고통을 슬픔으로 해석하면 오히려 강해지고 정화되는 의미로 확대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불의하게 고난을 겪으면서도 하느님을 생각하는 양심 때문에 그 괴로움을 참아 내면 그것이 바로 은총입니다(베드로1서, 2, 19)”는 메시지는 바로 그러한 의미일 것이다. 슬픔은 극기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대부분의 종교에서 겪어야 할 과정 혹은 정화의 절차라고 본다.

마음이 쏠렸던 것에 대한 상실일수록 슬픔의 부피가 크고 무게가 무겁다. 사랑을 잃는 것에 슬퍼하지 않는 이는 없다. 그것을 슬퍼하지 않는다면 그는 냉혈동물이거나 사랑을 진정으로 대하지 않았던 것일 뿐이다.

그 어떠한 것으로 대체되지 못하고 유일한 존재로 남아 있는 한 슬픔은 치유되지 않는다. 그 슬픔을 견디지 못하면 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 미련 없이 버린다.

그렇다고 모든 이가 슬픔에 속수무책인 것은 아니다. 조지 헨리 루이스는 행동으로 슬픔을 치료해야 한다고 타이르고 펄 벅은 슬픔의 놀라운 연금술을 언급하면서 슬픔은 지혜로 변해 기쁨이나 행복을 가져다준다고도 했다.

그건 호메로스의 생각과도 맞닿아 있다. 그는 자신이 공들이고 견뎌낸 모든 것을 기억하는 사람에게는 슬픔조차 오랜 시간이 지나면 기쁨이 된다고 했다.

하지만 그러려면 그 슬픔을 무조건 잊거나 무시하지 않고 묵묵히 견디는 시간을 거쳐 희석되거나 슬픔 자체를 슬픔의 힘으로 이겨내는 공력이 선행돼야 하는 것이니 깊은 수행이 필요하다. 수도사쯤이 아니고서야 다다르기 쉽지 않다.

그래서 에우리피데스는 지나간 슬픔에 새로운 눈물을 낭비하지 말라고 타이른다. 이도 저도 아닐 바에야 브라우닝처럼 슬픔은 오해된 즐거움일지도 모른다며 도닥일 수도 있다.

◆이겨낼 때 더욱 빛나는 슬픔

기쁨을 멀리하고 슬픔을 기꺼워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그런데도 철학적 사유나 문학적 예지가 기쁨보다 슬픔의 영역에 더 많이 존재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슬픔은 내적 성찰을 수반하기 때문일 것이다.

기쁨은 ‘나누고 싶은’ 마음을 유발한다. 흥이 나면 절로 콧노래가 나오는 것은 밖으로 자기 마음을 표현하고 싶은 욕망에 기인하지만 그것은 누군가에게 자신의 기쁨을 전하고 싶은 마음 혹은 그 마음을 나누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심리학에서는 기쁨이 긍정적인 피드백 메커니즘이라고 기술한다. 그에 반해 슬픔은 부정적인 피드백 메커니즘이 아니라 사유와 성찰의 원천으로 작동된다. 어떠한 기쁨도 오로지 기쁨만 내재할 수는 없다. 기쁨만 반복되거나 일상화되면 그것이 행복인 줄 모른다.

그렇다고 기쁨이 반드시 슬픔을 전제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고통과 슬픔 뒤에 기쁨의 희망을 확고하게 담보해야 한다. 그런 질곡을 넘어선 기쁨은 행복을 극대화한다. 그런 점에서 기쁨은 바로 희망의 등대다.

순수한 슬픔도 순전한 기쁨도 있을 수 없다. 슬픔과 기쁨이 혼재하는 것이 삶이다. 그 총량이 어느 쪽으로 기우느냐 하는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기억의 범위나 느낌의 영역에서 보자면 슬픔이 기쁨보다 더 큰 듯하다.

하지만 짧은 기쁨이 긴 슬픔을 충분히 보상하기 때문에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성공과 승리의 기쁨은 그동안의 고난과 슬픔을 기꺼이 잊어버릴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진정한 기쁨은 자아를 실현하고 보람을 느꼈을 때 이뤄진다.

종교에서는 타인을 행복하게 했을 때 느끼는 기쁨이 훨씬 더 가치 있다고 가르친다. 그런 점에서 기쁨도 고상함과 연결됐을 때 훨씬 더 오래 가고 의미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슬픔이 아직 생생한데 회피하면 문제가 더 악화될 뿐이다. 슬픔이 완전히 소화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래야 남아 있는 슬픔을 즐거움으로 제거할 수 있다." 새뮤얼 존슨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