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크놀로지]
-100유로면 누구나 전자영주권 받을 수 있어…정부 서비스 99% 온라인화
‘e레지던시’로 디지털 국경 넓히는 에스토니아
[한경비즈니스=(에스토니아)정동훈 광운대 교수] 경상도와 전라도를 합친 것보다 작은 4만5000㎢의 넓이에 서울시 송파구와 강서구의 주민 수를 합친 정도밖에 안 되는 인구 130만 명의 소국. 유럽의 변방에 자리해 있고 발트 3국으로 불리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작은 나라. 이름 한 번 들어본 적 없을 듯한 국가, 에스토니아가 디지털 국경을 확장 중이다.

우리에게는 딱히 이렇다 할 대표적인 볼거리나 쓸거리가 없어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수도 탈린의 올드타운 전체가 1997년 유네스코 중세도시로 선정될 만큼 중세도시의 모습을 그대로 잘 보존하고 있어 전 세계 관광객의 많은 사랑을 받는 곳이다.

또한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알리고 교육하는 기관인 ‘세종학당’이 2015년 7월 에스토니아 유일의 공과대학인 탈린공대에 설립됨으로써 최근 한국과의 관계가 더욱 깊어지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EU 진출 노리는 사업가들에게 인기

지리적으로도 그리고 관계에 있어서도 멀리 떨어져 있는 국가이지만 지난 몇 년 동안 에스토니아는 정보통신기술(ICT)업계에 있는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방문하는 국가가 됐다.

세계 경제 포럼 선정 ‘기업가 정신’ 1위, 글로벌 IT 리포트 선정 ‘모바일 네트워크 커버리지’ 1위, 미국 세금 재단 선정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조세 경쟁력’ 1위,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 선정 ‘디지털 경제·사회·행정 서비스 지수’ 2위, 프리덤하우스 선정 ‘경제자유지수’ 9위, 세계은행 선정 ‘사업하기 쉬운 국가’ 12위 등 셀 수 없이 많은 성과가 ICT 강국 에스토니아를 찾게 되는 이유를 잘 설명해 준다.

비록 국가나 인구 규모와 같은 물리적 차이뿐만 아니라 문화적 차이가 작지 않아 그들의 선례를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일 수도 있지만 4차 산업혁명을 준비하는 대한민국의 디지털 혁신이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e에스토니아’가 갖고 있는 의미는 작지 않다.

최근에는 ‘e레지던시’를 강조하며 국경조차 허물고자 하는 에스토니아와 비교해 보면 여전히 규제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대한민국의 미래는 암울하다.

e레지던시는 쉽게 말해 전자영주권이다. 전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에스토니아의 전자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국경 없는 디지털 사회를 만들었다. 이미 135개국에서 3만8000명 이상의 전자영주권자가 생겼고 5700개가 넘는 회사가 이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e레지던시 신청자는 에스토니아 정부가 제공하는 디지털 ID를 받게 되고 이것을 통해 신원 확인을 하며 서비스를 제공받는다. e레지던시를 통해 에스토니아 정부가 제공하는 모든 서비스를 사용할 수 있다.

가장 큰 장점은 비즈니스다. EU에서 비즈니스를 하려는 전 세계에 있는 사람들은 무료로 제공되는 이러한 서비스를 통해 에스토니아를 기반으로 한 비즈니스를 할 수 있다.

기업을 만드는 데 하루도 걸리지 않고 온라인으로 연결만 돼 있으면 전 세계 어디에서나 일할 수 있으며 은행 계좌는 물론 신용카드를 발행할 수도 있게 되니 EU를 대상으로 비즈니스를 하려는 사람들에게는 큰 장점이다.

매우 경제적이면서도 귀찮은 과정 없이 쉽고 편리하게 할 수 있으니 시험 삼아 한번 신청해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e레지던시’로 디지털 국경 넓히는 에스토니아
신청 과정은 이렇다. 우선 온라인으로 신청한다. 신청비용은 100유로다. 개인 정보와 신청 이유를 간단히 적으면 대부분 승인된다. 승인 통보를 e메일로 받으면 서울에 있는 발급센터를 방문해 실물 ID 카드와 카드 판독기를 직접 수령해야 한다.

이때 보안상의 이유로 지문 인식과 사진 촬영을 하게 되고 3만5800원을 지불하면 에스토니아의 전자영주권자가 되는 것이다.

지하자원이 없고 자연환경도 열악한 에스토니아는 제한된 환경의 어려움을 이러한 혁신적인 제도를 통해 디지털 경제 대국으로 발전하고자 한다.

전자영주권자의 수가 늘고 이들이 에스토니아를 기반으로 창업하게 되면 채용과 투자가 늘게 되며 이는 자연스럽게 국가적으로는 세금을 확보할 수 있고 또한 에스토니아라는 국가 브랜드를 홍보할 수 있으니 새로운 디지털 경제 생태계가 조성되는 것이다.

창업을 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닐 필요 없이 온라인에서 몇 시간만 작업하면 그만이고 매우 편리한 세금 체계를 운영하고 있으며 2020년까지 100% 세금 신고 자동화를 목표로 하고 있기도 하다.

사업하기 가장 좋은 나라를 만드는 것과 동시에 완벽한 세금 징수를 이루게 되니 국가 차원에서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e레지던시의 배경은 전자 ID 카드다. 에스토니아는 2002년부터 전자 ID 카드를 보급하기 시작했고 에스토니아 정부 서비스의 99%를 온라인으로 제공하고 있다.

단지 결혼이나 이혼 그리고 부동산 취득과 관련된 것만 오프라인으로 확인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러한 사회 환경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은 ‘인터넷은 사회적 권리(social right)’라는 이들의 태도에 있다.

에스토니아는 ‘e솔루션’이라고 불리는 인터넷으로 일을 해결하는 것에 대한 신뢰도가 높다. 프리덤하우스에서 주관하는 인터넷 자유지수 평가에서 늘 1, 2위를 놓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생애 한 번만 등록하면 디지털로 신원을 확인할 수 있게 해 디지털로 일을 처리하는 데 문제가 없게 만든다.

e레지던시는 바로 이러한 디지털 개인 신원에 대한 권리를 전 세계인으로 확대한 것이다. 기술에 대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지리적 경계를 뛰어넘는 과감한 디지털 영토 확장을 선언한 것이다.

◆모든 데이터 공개하고 작은 정부 지향

에스토니아 국민들이 정부가 추진하는 ‘e에스토니아’에 대한 신뢰를 갖게 된 원인은 보안 기술과 정부의 노력 그리고 실질적 혜택에 있다.

정부가 먼저 투명하게 모든 데이터를 공개하고 작은 정부를 지향했고 전자정부 시스템이 갖고 있는 장점을 지속적으로 제공함으로써 신뢰의 기반을 쌓았다.

무엇보다 보안 문제 해결이 가장 중요한데 이를 위해 전자카드와 엑스로드(X-road) 그리고 KSI(Keyless Signature Infrastructure) 블록체인을 통한 3단계 보안 과정을 거치게 했다.

이러한 기술 발전과 함께 정부가 개인 정보를 잘 관리하고 있다는 점을 국민들에게 안심시키기 위해 법과 제도를 고쳤다.

누구라도 개인 정보를 보게 된다면 자동으로 e메일을 받을 수 있도록 제도를 만들고 만일 정부가 관리하는 개인 정보를 누군가 불법적으로 보게 된다면 중대한 범법 행위로 다스려진다.

또한 인터넷을 안전하게 사용하는 법에 대한 교육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민·관 협력으로 만든 교육과정을 거치게 함으로써 개인 정보 보안에 대한 사회적 가치를 함양시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과정에서 경제적 효과를 피부로 느끼게 했다. 디지털 서명은 국내총생산(GDP)의 2%, 전자 선거는 2.5배의 비용이 절약됐고 병원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3분의 1로 줄었다.

세금 환급은 3일 만에 받게 되고 ID 카드를 이용해 대중교통을 사용하게 하니 사용자가 증가했고 이는 수도 탈린의 대중교통을 무료로 제공하는 선순환을 이끌었다.

경제 활동을 위한 최고의 환경(zero-bureaucracy)을 갖추기 위해 정부가 전념하는 것을 국민이 체감하게 만든 것이다.

1인당 GDP가 1990년대 중반 5000달러에서 현재 약 2만 달러까지 크게 뛰었고 IT 분야는 에스토니아 GDP의 7%(한국과 비슷)를 차지할 정도로 성장했으니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에 대한 국민의 지지는 거의 절대적이다.

지난 20여 년간 높은 경제성장률을 이룸으로써 전반적인 생활수준이 향상됐지만 이에 따라 부수적인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에스토니아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일할 수 있는 젊은 사람들이 없다는 것이다.

자국어를 비롯해 영어·러시아어·스웨덴어 등 많은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어렸을 때부터 프로그래밍 언어를 배워 높은 기술 수준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외국계 기업의 선호가 높을 수밖에 없다.

에스토니아는 이러한 문제가 매우 자연스러운 과정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e레지던시를 통해 새로운 경제 생태계를 만들려고 한다.

지난 6월 27일 문재인 대통령 주재로 열릴 예정이던 규제 혁신 점검회의가 회의 3시간 전에 ‘내용 미흡’을 이유로 연기됐다.

지지부진한 규제 개혁의 현실을 단편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다. 4차 산업혁명을 준비하는 우리에게 에스토니아는 많은 점을 일깨워 준다.

창업하기 쉽고 경제 활동을 하기 좋으며 규제를 최소화하되 혜택이 많은 나라. 강대국에 둘어싸여 있는 변방의 작은 나라가 대한민국에 전하는 간결하면서도 핵심적인 메시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