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전략]
-상대에게 휘둘리지 않으려면 ‘갈아탈 수 있는 대안’ 반드시 지녀야


[한경비즈니스 칼럼=이태석 IGM 세계경영연구원 교수] 아파트 경기가 달아오르고 있다. 자고 나면 집값이 오를 정도다. 매물이 귀해 부동산 중개업소마다 잡기만 하면 돈이 된다는 상황이다.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A는 마음이 급해졌다. 전세 만기가 곧 돌아오기 때문이다. 지난 주말에도 인근 부동산 중개업소를 기웃거렸지만 매물 찾기가 어려웠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이번 주에는 월요일부터 나섰다. 마침 한 업소에 전세 물건이 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현장을 확인하니 마음에 쏙 들었다.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집주인이 제시한 가격이 걸림돌이었다. 중개업자에게 가격을 깎을 수 있느냐고 말을 건넸지만 “오늘 오전에도 다른 사람이 보고 갔다”는 한마디에 곧바로 꼬리를 내리고 말았다. 협상의 여지가 더 이상 없었기 때문이다.

협상에서 상대에게 휘둘리지 않는 좋은 무기가 있다. 바로 자신이 협상 대안을 갖는 것이다. 여기에서 대안은 협상하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나 다른 조건으로 갈아탈 수 있는 옵션을 뜻한다. 하버드대의 로저 피셔 교수와 윌리엄 유리 교수는 이 대안을 ‘BATNA(Best Alternative to a Negotiated Agreement)’라고 표현했다. 협상이 결렬될 경우 자신이 택할 수 있는 최선의 대안이라는 뜻이다.

협상에서 이 요소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심지어 BATNA가 없다면 협상을 포기하라고까지 얘기한다. 대안이 없다면 상대 요구에 끌려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상대와의 협상에서 주도권을 갖고 싶다면 BATNA를 최대한 확보하고 이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 협상력의 차이는 BATNA로부터 출발한다. 다음 사례를 보자.

◆국산 신약으로 주도권 쥔 건보공단
LTE 망 반값에 구축한 LG유플러스의 절묘한 협상술
2017년 11월 국민건강보험공단(이하 건보공단)과 다국적 제약사 아스트라제네카가 수개월째 끌어 온 폐암 신약 ‘타그리소’의 약가 협상이 극적으로 타결됐다. 국내 환자단체연합회는 이 결과에 대해 “말기 비소세포폐암 환자의 생명을 살리는 타결 결과를 환영한다”는 논평을 냈다. 타그리소가 건강보험에 등재되면 말기 폐암 환자들은 약값의 5%만 지불하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협상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국민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하는 건보공단은 하루라도 빨리 보험 등재를 하고 싶었지만 글로벌 제약사를 상대로 협상의 주도권을 쥔다는 게 만만치 않았다. 결국 공단은 제삼의 카드를 확보했다. 한미약품이 개발한 경쟁 약 ‘올리타’였다. 올리타는 약효가 타그리소와 완벽하게 동일하지는 않지만 대체 약품으로 인정받았고 약값도 현저히 낮았다. 건보공단으로서는 훌륭한 BATNA를 가진 셈이었다. 건보공단은 타그리소 약가 협상에 올리타를 적극 활용했고 아스트라제네카는 약값을 대폭 인하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부분은 한미약품이 약가 협상 5개월 뒤인 올해 4월 올리타의 임상 3상을 중단하기로 최종 결정했다는 점이다. 경쟁 약이 건강보험 급여를 받게 되면서 자사 약품의 가치 하락이 확실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한미약품은 엄청난 연구·개발(R&D) 투자금을 날리고 말았지만 글로벌 제약사의 약가 인하에 결정적으로 공헌했다는 점은 인정해 줘야 한다.

◆BATNA 활용해 세계 최초가 된 LG유플러스
LTE 망 반값에 구축한 LG유플러스의 절묘한 협상술
2011년 통신업계 후발 주자였던 LG유플러스는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결정적 한 방이 필요했다. 때마침 4세대 롱텀에볼루션(LTE)망이 시장에 등장할 무렵이었고 LG유플러스는 ‘국내 최초 LTE 전국 서비스’라는 타이틀이 절실했다. LG유플러스는 LTE를 구축하는 장비 공급 업체로 에릭슨LG·삼성전자·노키아지멘스네트웍스를 최종 선정하고 평가 작업에 착수했다. 이 분야에 관한 한 국내에서는 삼성전자, 글로벌 시장에서는 스웨덴 에릭슨이 전통 강자였지만 문제는 금액이었다. 장비 가격이 상당히 고가였기 때문이다.

LG유플러스는 일단 LTE 설치 예정 지역을 수도권·호남권·영남권으로 삼등분했다. 삼성전자와 에릭슨을 불러들여 서로 경쟁을 붙이고 가격 협상을 시도했다.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최초 제안 금액에서 10~15% 할인해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아무리 달래고 밀어붙여도 더 이상 물러서지 않았다. 난감했다. 여전히 내부 예산 범위를 웃도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좋은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끝에 LG유플러스는 노키아를 불러들였다. 당시 노키아는 통신 장비 시장에서 상대적으로 약자였다. 전후 사정을 설명하고 장비 납품 금액을 반값 정도에 공급해 줄 수 있는지 역제안했다. 노키아는 펄쩍 뛰었다. 그 금액이면 손해를 본다는 것이었다. 노키아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LG유플러스는 그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기가 막힌 제안을 한다.

“귀사는 손해라고 말하는데 손해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만약 이번에 LTE 장비를 깔게 되면 전 세계 최초가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시장 선점 효과로 글로벌 시장에 엄청난 파장이 생길 것이고요. 한국은 땅 덩어리가 작습니다. 미국이나 유럽에 비하면 설치 금액이 1%도 안 됩니다. 그런데 그 1% 때문에 99%를 놓치겠습니까.”

한동안 생각에 잠긴 노키아 대표는 “이번 계약에 한해 제조원가를 생각하지 않겠다”며 “귀사의 요구대로 반값에 장비를 공급하겠다”고 약속했다.

LG유플러스의 설득이 제대로 먹힌 것이다. 그리고 노키아라는 훌륭한 BATNA를 확보한 셈이다. 이제 활용하기만 하면 된다.

LG유플러스는 삼성전자와 에릭슨을 다시 불렀다. 노키아로부터 받은 제안을 슬쩍 흘리면서 금액을 그 수준까지 낮출 것을 종용했다. 두 회사는 장비의 품질이 다르다며 어떻게 같이 비교할 수 있느냐고 항변했다.

◆BATNA는 주어지기보다 개발하는 것
LTE 망 반값에 구축한 LG유플러스의 절묘한 협상술
LG유플러스는 노키아 통신 장비의 사양을 제시하며 품질 면에서 다를 바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양 사는 이미 동종업계 참고 가격이 생겨 버린 상황도 더 이상 무시하기 힘들었다. 두 회사는 마침내 금액을 추가로 낮췄고 최종적으로 LG유플러스는 3개 사와 공급 계약을 체결, 세계 최초로 LTE망을 구축할 수 있었다.

LG유플러스가 통신 장비 강자들을 상대로 협상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은 노키아라는 BATNA를 잘 활용했기 때문이다. 노키아로서도 이 계약을 단기 이익보다 장기적인 비즈니스에 초점을 맞췄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후 LTE가 본격적으로 전 세계에 보급되면서 노키아는 글로벌 시장점유율이 2015년 29%까지 상승, 1위인 에릭슨(33%)에 이어 2위로 올라서게 된다.

LG유플러스는 저비용으로 세계 최초 전국 LTE망을 구축했고 경쟁 회사를 제치고 가입자 수를 크게 늘리는 데 성공했다. 어떤가.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양 사는 ‘윈-윈 협상’을 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정리해 보자. 당신의 협상력을 올리는 데 BATNA만큼 강력한 것은 없다. 상대에게 끌려다니지 않고 자신 있게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사항은 BATNA는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개발해야 한다’는 점이다.

언뜻 생각하기에 대안은 항상 곁에 있는 것 아니냐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대안이 없는 경우가 오히려 더 많다. 대안이 없을 때 더 이상 찾아보거나 개발하지 않고 스스로 포기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대기업을 상대로 영업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호소하는 점이 바로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위의 두 가지 사례를 자세히 보라. 건보공단은 시간을 끌어가며 한미약품의 올리타를 활용했고 LG유플러스는 계약을 서두르지 않고 노키아를 활용했다. 운이 좋은 것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운도 노력하지 않으면 따라오지 않는다. 어떻게 노력하고 개발·활용하느냐에 따라 당신의 협상력이 좌우된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188호(2018.09.03 ~ 2018.09.09)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