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크놀로지 제 1200호 (2018년 11월 28일)

혁신 잃은 대기업이 ‘창업정신’ 살리려면

[경영전략]
-‘사내벤처’ 활성화가 회사와 구성원의 가장 현실적 대안



[한경비즈니스 칼럼=박찬희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 경영학 책에는 혁신에 관한 아름다운 사례가 넘쳐난다. 하지만 사람이든 조직이든 새로운 일은 힘들고 괴로운 데다 잘된다는 보장도 없다. 자리 잡은 대기업은 이미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 더욱 어렵다.

창업자야 남다른 재능과 열정, 맷집이 있었겠지만 그 뒤에는 곱게 큰 2세 경영인이나 조직을 무난히 운영하며 성장한 관리자의 성격이 더 크기 마련이다. 쉽게 생각해 보자. 삼성전자나 SK텔레콤에 지원하는 사람이 ‘든든한 대기업의 안정된 직장인’을 기대할까, 아니면 ‘세계에 도전하는 사업 의지’로 가득 차 있을까.

대기업은 혁신하기에 적합한 조직이 아니다. 복잡해진 사업구조와 방대한 조직은 구석에 숨어 ‘천수(天壽)를 누릴’ 곳이 많은 데다 서로 얽힌 관계 속에서 끼리끼리 공생을 도모하는 ‘조직의 현실’이 작동한다. 카리스마 넘치는 경영자로 지면을 장식하는 인물도 실제로는 이렇게 실타래처럼 얽힌 구조에 얹혀 있는 사례가 제법 많다.

창의적 아이디어로 새로운 사업에 도전하는 것은 원래 창업 기업(스타트업)의 몫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정말로 새로운 시도와 새로운 사업을 해서 크게 성공하고 싶은 사람은 자기가 직접 할 테니까 말이다.

그러면 대기업은 앉아서 시들어 가다가 죽으라는 얘기인가. 그렇지 않다. 대기업을 중심으로 얽혀 있는(망하면 같이 죽는) 이해관계의 구조는 막강한 생존력을 갖고 있다. 시간을 두고 다져진 사업 기반과 경험, 자원 동원 능력은 현실의 경영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이런 기반과 역량은 스타트업에 가장 부족한 부분이다.

대기업의 기반과 역량에 스타트업의 아이디어와 사업 의지를 더하면 어떨까. 대기업은 항공모함이 되고 스타트업은 여기에서 이륙하는 신형 전투기가 되는 셈이다. 사내벤처는 이를 위한 효과적 수단이 될 수 있다.

◆혁신 기업 인수 vs 독립 창업

안정된 사업 기반과 경험, 자금 동원 능력을 갖춘 대기업에는 ‘유망한 미래 사업’에 대한 제안서가 끝없이 들어온다. 그런데 이 중에는 만만한 대기업을 등쳐보려는 사기꾼이거나 대기업의 후광으로 편히 사업하려는 영악한 사람이 제법 많다.

정말 좋은 사업 아이템이라면 전 세계의 돈과 사람이 찾아오는 세상에 대기업 신사업 담당자 책상에 올 정도면 적어도 ‘정말 훌륭한 사업’일 가능성이 낮을 수밖에 없다. 해당 사업에 투자를 권유하는 벤처캐피털도 정말 좋으면 자기가 돈을 조달해 투자했을 것이다. 만에 하나 흙 속의 진주라고 해도 그 가치를 알아보기에는 불확실한 점이 너무 많다.

현실의 예를 생각해 보자. 인터넷 혁명과 벤처 열풍 속에서 신사업 진출을 모색하던 S그룹은 시도하는 신사업마다 실패를 겪으면서 ‘믿을 곳 없는 혁신의 세계’를 그야말로 매로 배우고 있었다. 일단 회사 안에서 사업 모델을 만들어 키우고 적절한 시점에 회사가 투자자로 남는 방법이 적어도 ‘눈 뜨고 당할’ 가능성이 낮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세상이 달라져 ‘회사를 위해 새로운 도전에 나서는’ 순진한 직원은 없었다. 조용히 다니면 아무런 부족함이 없는 좋은 직장에서 구태여 새로운 사업을 하려는 구성원도 별로 없거니와 조금 사업이 진전되면 오히려 빨리 탈출해 원래 부서로 돌아가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적어도 ‘자기 지분을 갖고 직접 경영하는 회사’가 돼야만 용기를 내는 세상이 된 것이다. 섣불리 나가 독립 창업을 해보자니 세상이 만만치 않고 회사로서도 아는 직원이 조금씩 키워낸 사업이면 훨씬 믿을 만하다. 몇 안 되는 국내 기업의 사내벤처는 이렇게 시작됐다.

로버트 버겔만 스탠퍼드대 교수는 사내벤처를 대기업의 전략 방향이 실천되는 톱다운 과정과 구성원의 자율적 의지가 제안되는 보텀업 과정이 균형을 이루는 대표적 사례라고 봤다. 쉽게 말해 시키는 일만 해서는 망하고 그렇다고 아무 일이나 마구 벌여도 망하는 양극단의 현실을 놓고 답을 찾는 경영자의 고민을 회사 안에서 작은 일부터 시작해 키워 가는 방식으로 풀어보려는 노력이다.

◆사내벤처의 속사정

사내벤처는 현실에서는 이미 익숙한 개념이다. 일제강점기 마음씨 좋은 쌀가게 주인이 성실한 점원에게 가게를 차려줬다는 미담을 생각해 보자. 젊은이를 키우는 착한 마음도 있지만 사실은 종로에서 사업하는 쌀가게 주인이 점원을 독립시키면서 지분을 투자하고 손이 닿지 않는 을지로 지역으로 사업 기반을 넓히는 전략일 수도 있다. 유능한 점원은 빨리 돈을 벌어 원래 주인집 지분을 좋은 값에 인수해 주기도 한다.

봉건영주들의 영토 확장도 크게 다르지 않다. 기사들이 목숨을 걸고 적진에 돌격하는 것은 공주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지를 얻어 자립하기 위해서다. 기사가 영주가 돼야만 그의 시종도 기사가 될 수 있다. 기사를 후원하던 상인들도 사업권이 생긴다.

기사의 용맹이 창업의 의지이고 혼신의 힘을 다해 짜낸 무기와 전술이 혁신의 성과물이다. 유능한 영주는 기사에게 병력과 식량을 밀어주고 늘어난 영토에 대한 지배력을 기사와 나눈다. 사내벤처를 후원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업 기반을 넓히는 유능한 대기업 경영자와 다르지 않다.

용맹한 기사가 반란을 일으킬까 걱정돼 만만한 부하만 거느리고 그것도 부족해 성문을 닫아걸고 웅크리는 영주는 이런 유능한 경영자와 투지 넘치는 기사에게 영지와 백성을 빼앗기게 된다. 기사와 백성을 실컷 부려먹고 늘어난 영지는 자기 마음대로 나눠 주는 영주는 인재가 떠나 쇠락해지거나 그전에 반란군에 땅을 잃고 쫓겨나게 된다. 무능한 영주는 기사와 백성, 상인 모두에게 기생충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말끝마다 ‘○○가족’을 외치면서 막상 대주주의 무능한 자식들에게 무한 충성을 강요하고 주인의식을 강조하면서도 주인의 권리는 하나도 주지 않는 회사. 매우 낯익은 장면이다. 이런 회사에서는 시키는 일이나 소리 없이 하는 ‘맹목적 근면성’이 생존의 덕목이다. S전자가 휴대전화 시장을 석권하는 데 독창적 문자 입력 체계가 크게 기여했지만 이것을 만든 팀은 고작 4000만원의 성과 보수를 받았을 뿐이다. 애플이나 구글이었으면 팔자를 고쳤을 텐데 말이다.
이제 세상이 달라졌다. 묵묵히 성과를 만들어 낸 만큼 회장님이나 사장님이 기억해 주고 동료들이 인정해 줘 행복한 사람은 없다. 만에 하나 그런 천사와 같은 인재가 있더라도 같이 밤을 새워 줄 사람이 없다.

사내벤처는 그래도 뭔가 새로운 사업을 해보자는 대기업이 구성원의 창업 의지를 살려 결과를 만들 수 있는 현실적 수단이다. 창의와 열정을 가진 구성원이 회사의 기반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고 회사는 후원자이자 투자자로서 그 성과를 함께 나눌 수 있다. 지분 매각이나 기업공개를 통한 투자수익 확보가 대표적 경우다.

사내벤처로 성공한 사업이 일정 궤도에 오르면 다시 회사 사업부로 인수시킬 수도 있다. 사내벤처로 독립했던 경영자는 계속 전문 경영인으로 해당 사업을 맡을 수도 있다. SK에너지의 사내벤처로 독립했다가 다시 SK그룹에 인수됐던 SK엔카가 이런 사례에 해당한다. 이후 대기업 업종 제한 규정으로 다시 사모펀드로 넘어갔지만 말이다.

◆‘주인의식’이 아닌 진짜 주인으로

하지만 이런 사례가 현실에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맨바닥에서 천신만고 끝에 사업을 일군 회장의 눈에는 회사에서 월급을 받는 것은 물론 사무실에 기자재까지 다 쓰면서 뭐 하나 만들고는 자기 것이라며 회사에 돈까지 달라는 ‘아주 나쁜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다. 열심히 밤새워 연구·개발하는 다른 직원들은 뭐가 되느냐는 반문도 충분히 나올 수 있다.

채용 공고만 내면 수만 명이 ‘뭐든 하겠다’고 아우성이고 제아무리 잘났다는 중역도 무한 충성을 다짐하는 세상에 뭐가 아쉬워 지분까지 줘야 하는지 황당한 소리로 들릴 수도 있다. 회사에서는 권력과 동의어인 지분을 요구한다는 사실 하나로 ‘불경스러운’ 일이 되기도 한다. 나름 이해는 가는 얘기지만 그렇다고 늘 하던 식으로는 뭐가 달라질지 잘 모르겠다.

물려받은 대기업 권력을 대대손손 누리려 들면 맹목적 근면성이 생존의 덕목이 된다. 창의와 혁신은 설 자리가 없어진다. 천천히 망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어서 덜 유능한 경영자도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서로 아는 구성원이 만드는 신사업이 나은 점도 있지 않을까. 재벌 일변도의 경제를 넘어 ‘새로운 사업 생태계’를 만든다는 다양한 정책들, 사실 나랏돈 풀어 공모전 벌이고 경영 역량을 키운다며 창업 강사 일자리나 만드는 일도 많다. 사내벤처는 적어도 이런 ‘취로사업(생계 지원 사업)’보다는 낫지 않을까.

다만 사내벤처는 나름 의미 있는 시도지만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기술이나 사업 모델에 따라서는 기업의 운영체제를 떠나 독립하기 어려운 것도 있다. D램 반도체의 생산 공정이나 자동차의 생산 기술이 대표적 예인데, 남들은 소소한 아이템으로 팔자를 고치는 반면 묵묵히 회사의 체제 속에서만 가치를 발휘하니 억울할 수도 있다. 마치 개업이 어려운 심장외과 의사들의 고민과 비슷하다. 이들에 대한 보상을 별도로 생각하지 못하면 조직이 흔들리게 된다.

사내벤처가 회사의 기술과 사업 모델을 빼돌리는 데 악용될 수도 있다. 대주주 일가나 실세 경영자가 될 만한 사업을 골라 회사의 힘으로 적극 키운 후 독립시키고 다시 후한 값에 지분을 인수하는 방법이 가능하다. 적절한 감시와 견제가 작동하지 않으면 지금 이슈가 되는 ‘일감 몰아주기’보다 수십 배 효과적인 빼돌리기가 될 수 있다.

무적의 불침항모(不沈航母)는 없지만 항공모함의 힘은 무시할 수 없다. 신형 전투기를 함재기로 더하면 더욱 강력해진다. 전투기도 더 넓은 작전 범위를 갖게 된다. 사내벤처는 잘 운영하면 항공모함과 전투기의 상승효과를 만들 수 있다. 물론 잘하려면 매우 높은 수준의 사업적 판단이 필요하다. ‘다른 유능한 사람들’의 마음도 헤아려야 한다. 남들도 다 쉽게 잘하는 일은 경쟁의 수단이 될 수 없듯이 사내벤처도 더 잘하는 회사와 경영자에게 더 큰 가치를 만들어 준다. 해먹고 빼돌리려 들면 한도 끝도 없지만 말이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00호(2018.11.26 ~ 2018.12.02)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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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일시 : 2018-12-06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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