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크놀로지]
-현재는 사전 프로그램된 특정 규격 부품만 처리 가능
'융통성 갖춘' 작업 로봇 개발 경쟁...‘빈 피킹’ 기술을 잡아라
[한경비즈니스=진석용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 1960년대에 태동한 산업용 로봇 시장은 소수의 글로벌 기업들이 과점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현재의 과점 체제가 상당히 공고하기는 하지만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장담하기는 힘들다. 시장의 경쟁 구도는 신기술·신제품들로 인해 언제든지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산업용 로봇 시장의 혁신을 몰고 올 아이템 중에는 눈여겨볼 기술이 있다.

산업용 로봇은 공장자동화 산업의 하위 분야 중 하나다. 그래서 로봇 산업의 속성은 여타 장비 산업과 유사한 점이 많다. 기업들은 장비 교체에 따른 위험이 너무 커 한 번 채택한 장비를 쉽게 바꾸지 않듯이 일단 신뢰성이 확인된 로봇도 계속 사용한다. 그렇다 보니 로봇 시장의 경쟁 구도가 하루아침에 변하기는 어렵다고 볼 수 있다.

현재 산업용 로봇 시장은 빅4로 표현할 수 있는 화낙·ABB·야스카와·쿠카 증 4개 기업이 시장의 4분의 3을 차지하는 과점화 양상을 보인다. 새로 시장에 진입한 기업들이 다양한 신제품을 출시하고 있지만 시장 구도는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 과점 체제가 변화하려면 새 제품들이 일선에서 장기간에 걸쳐 사용되고 충분한 신뢰성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시장 구도를 바꿀 강력한 변수의 등장
물론 기존 시장 구도의 변화가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천재지변, 관련 법·제도의 변화와 같은 외생적 환경 변수나 신기술·신제품에 의한 내재적 변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특히 기존 기업들이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 문제나 고객사의 잠재 수요를 충족시켜 주는 신기술과 신제품의 출현은 상당히 강력한 변수가 될 수 있다. 기존 제품 중에는 경쟁재가 없을 것이므로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강력한 시장 입지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산업용 로봇 시장에서도 내재적 변수가 등장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빈 피킹(Bin picking, Random Bin picking)은 로봇이 무작위로 놓인 임의의 물체들을 형태·재료 등 물체 본연의 속성에 따라 구분해 인식하고 각각의 용도나 목적에 맞게 다룰 수 있도록 하는 기술이다. 예를 들어 크기·길이가 각각 부품들이 섞여 있는 상자 안에서 로봇이 특정 규격의 부품만 골라낸다거나 부품을 삽입할 구멍이 사전에 정해진 위치와 다른 곳에 뚫려 있더라도 로봇이 정확한 위치를 찾아 작업하도록 만드는 것이 빈 피킹 기술이다. 한마디로 로봇이 마치 인간처럼 융통성 있게 알아서 작업하게 만드는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의 산업용 로봇은 작업 상황의 변화에 맞춰 융통성 있게 대응하지 못한다. 사전에 프로그래밍된 동작 외에는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사전에 계획된 작업 조건이나 환경이 조금만 달라져도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다. 특정한 작업을 수행하는 로봇 사례를 통해 현장에서 접할 수 있는 다양한 한계 상황을 보다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볼트 체결 작업에 투입된 로봇이 임무를 수행하려면 반드시 크기·길이·굵기 등 모든 규격이 동일한 볼트들만 제공돼야 한다. 만일 규격이 다른 볼트·너트·나사 등 다른 종류의 부품들이 동시에 제공되면 로봇은 작업을 수행하지 못한다. 인간처럼 볼트만 골라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설령 동일한 규격의 볼트들이 제공되더라도 반드시 규칙적으로 정렬돼 있어야 한다. 볼트가 거꾸로 뒤집어져 있거나 조금이라도 흐트러져 있으면 정해진 각도로만 작동하는 로봇의 엔드 이펙터(end effector)가 볼트를 들어 올리지 못한다. 또 볼트를 체결하는 구멍이 예정된 위치와 조금만 다른 곳에 있어도 작업 결과는 불량품으로 나올 것이다. 로봇이 바뀐 체결 위치를 스스로 찾아 작업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현재의 로봇은 작업 과정 전반에 걸쳐 계획과 다른 상황에 맞닥뜨리면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다. 산업용 로봇의 용도가 여전히 용접·절단·운반 등 일부 작업 위주로 한정돼 있는 것도 로봇의 자율적인 판단과 동작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로봇 분야의 오랜 숙원이기도 한 작업의 융통성 문제를 해결해 주는 기술이 바로 빈 피킹이다.

로봇의 능력을 한 차원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만큼 빈 피킹 기술의 활용도는 무궁무진하다. 빈 피킹 기술의 수준이 높아지면 로봇은 마치 인간처럼 다양한 물체들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된다. 결과적으로 빈 피킹 기술은 로봇의 활동 영역을 확장하게 될 것이다. 다양한 규격의 물체들이 불규칙적으로 혼재돼 있는 물류 작업장에도 로봇이 투입될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한 부품들을 동시에 다뤄야 하는 혼류 공정, 복잡다단한 조립 작업에도 로봇을 도입될 수 있다. 지금까지 자동화하기 어려웠던 업무 중 많은 분야에 산업용 로봇이 진출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빈 피킹 기술은 제조·물류 분야의 혁신 기반이자 산업용 로봇 시장의 게임 체인저가 될 것이란 큰 기대를 받고 있다.

시각 인식과 기구부의 조화
인간이나 로봇이 물체를 다루는 과정을 감안하면 빈 피킹 기술이 해결해야 할 주요 과제를 대략 정형·비정형 등 물체의 형태 인식과 물체의 배열 상태 인식, 물체의 파지로 정리할 수 있다. 인간이 어떤 물체를 다룰 때는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직접 만지면서 먼저 물체의 속성을 파악하기 마련이다. 일단 물체의 정체를 파악하고 나면 손으로 잡는 파지 동작을 하기 때문에 알맞은 위치를 고르고 경도(hardness)에 맞게 적정한 힘을 줘 손으로 잡고 작업을 하게 된다.

빈 피킹 기술의 작동 과정도 인간의 동작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빈 피킹도 시각 중심의 각종 인식 기술과 기구부 기술이 뒷받침돼야 한다. 인간이 보고 만지면서 물체의 속성을 파악하듯이 로봇도 각종 비전 센서나 3D 스캐너, 3D 카메라 등을 통해 획득한 이미지 정보로 물체의 형태와 색상을 파악하고 직접 만져 수집하는 촉각 정보 등을 통해 물체의 경도를 인식한다. 각 센서를 통해 수집된 각종 데이터들은 딥 러닝 등 머신 러닝 기반의 인공지능(AI)을 거쳐 적절한 명령 정보로 가공되고 물리적 행동을 구현하는 기구부로 전달된다.

다음 단계에서는 인간이 손으로 물체를 잡듯이 로봇도 각 작업에 적합한 구조의 기구부인 다양한 엔드 이펙터로 물체를 잡는다. 물체를 잡는 과정에서는 AI를 통해 전달받은 정보에 따라 힘을 적절하게 제어하는 기술도 필수적이다. 이처럼 빈 피킹은 물체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각종 센서와 물체를 인식하는 AI, 물체를 물리적으로 잡는 기구부와 제어 기술이 조화롭게 결합돼야 하는 복잡한 기술이다. 따라서 완전한 수준의 빈 피킹 기술을 구현하려면 앞으로도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빈 피킹 기술 개발에는 주요 로봇 기업들 외에 센서, 엔드 이펙터 전문 업체들과 연구 기관들도 빈 피킹의 개발 경쟁에 대거 참여하고 있다. 빅4에 속하는 화낙과 야스카와 등은 3차원 빈 피킹 모듈을 개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높은 정밀도를 자랑하는 고급 산업용 로봇 전문 업체 스토블리는 2018년 자사의 로봇 TX60L에 다양한 부품들을 식별할 수 있는 3D 비전 기술을 탑재한 빈 피킹 로봇을 공개하기도 했다. 사람의 손처럼 물체를 감싸 쥘 수 있는 그리퍼 등 각종 엔드 이펙터를 생산하는 셩크도 빈 피킹 기술 개발에 적극적이다.

셩크는 기존 엔드 이펙터에 다양한 센서와 이미지 처리 모듈을 추가해 빈 피킹 작업을 할 수 있는 제품을 개발하고 있다. 새로운 소재의 엔드 이펙터 기술로 빈 피킹 분야에 도전하는 사례도 있다. 매사추세츠공과대(MIT)와 하버드대의 공동 연구팀은 신축성 있는 소재로 된 원뿔 모양의 엔드 이펙터를 유튜브를 통해 공개했다. 연구팀은 종이를 접는 식으로 작동하는 신형 엔드 이펙터가 사람의 손 모양으로 된 그리퍼 방식의 엔드 이펙터보다 훨씬 우수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암치와 와인 잔뿐만 아니라 사람의 손으로도 손상시키지 않고 잡기 어려운 브로콜리와 작은 꽃도 쉽게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창고용 물류 로봇 키바(Kiva)를 보유한 아마존은 빈 피킹 기술에 대한 잠재적 수요가 큰 유통·물류업에 기반을 둔 회사이므로 빈 피킹 기술 개발을 촉진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아마존은 다양한 아이디어를 모아 기술 개발을 가속화하는 방위고등연구계획국(DARPA)의 경쟁 프로그램을 도입한 아마존 피킹 챌린지란 행사를 수차례 진행했다. 아마존 피킹 챌린지는 실제 작업 현장에서 가장 많이 하는 작업을 과제화해 가장 짧은 시간 내에 완료하는 팀이 우승하는 식으로 진행됐다.

먼저 짐을 싣는 작업(stow task)으로 일차 승부를 가렸다. 바구니에 담긴 물건들을 각각의 분류 기준에 맞춰 옮겨 담는 과제다. 뽑기 과제(pick task)는 선반 위에 다양한 물체들과 섞여 있는 목표물을 정확히 골라내는 과제다. 각 과제들에서 제시된 물건들은 책·박스·옷 등 실제로 아마존의 물류센터에서 가장 많이 다루는 상품들을 중심으로 구성됐다. 아마존 챌린지에 참여한 팀들은 각 과제의 물체들에 맞게 사람의 손 모양으로 된 그리퍼나 진공 그리퍼 등 다양한 엔드 이펙터들을 사용해 과제를 수행했다.
'융통성 갖춘' 작업 로봇 개발 경쟁...‘빈 피킹’ 기술을 잡아라
'융통성 갖춘' 작업 로봇 개발 경쟁...‘빈 피킹’ 기술을 잡아라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18호(2019.04.01 ~ 2019.04.07)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