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 변화 따라잡지 못해…저가와 프리미엄 사이에서 정체성 상실
‘129년 역사’ 네덜란드 V&D백화점의 쓸쓸한 퇴장
[ 헤이그(네덜란드)=김민주 객원기자] 지난 3월 1일 오전 11시, 네덜란드 로테르담의 번화가 벌스역 인근에 자리 잡은 유명 백화점 브룸앤드드레스만(V&D)의 입구엔 철제 셔터가 내려져 있었다.

이곳을 지나던 쇼핑객들은 굳게 문이 잠긴 V&D가 어색하다는 표정이다. 129년 전통의 V&D는 지난해 말 파산 신청을 했고 마땅한 인수자를 찾지 못해 2월 중순부터 영업을 중단했다.

V&D 측은 인수 협상을 위해 최대 6주 동안 영업을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백화점 앞에서 만난 한 노인은 “젊은 시절 이곳에서 계산원으로 근무했었다”며 “네덜란드인이라면 누구나 V&D에 얽힌 추억 하나쯤은 있을 텐데 갑자기 문을 닫는다고 하니 안타깝다”고 말했다.

네덜란드인들의 소박한 소비 취향에 걸맞게 매장의 규모는 작았지만 대중적으로 친숙한 백화점으로 통했던 V&D가 경영난을 이유로 지난해 12월 31일 법원에 파산 신청을 했다. 이후로도 한 달가량 ‘70% 할인 판매’로 영업을 이어 가던 V&D는 지난 2월 전국 63개 지점의 문을 일제히 닫았다.

파산은 V&D와 자체 레스토랑 브랜드인 라 플레이스에서 일하는 근로자 1만300여 명이 실직자가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나마 네덜란드 슈퍼마켓 체인 점보가 라 플레이스를 인수하기로 결정하면서 이곳 직원 3000명은 계속 일을 할 수 있게 됐다.

◆인수 협상도 불발…1만3000명 일자리 잃어

유력 인수 기업들과의 협상은 불발로 끝났다. 협상에 참여한 V&D 관계자는 성명을 통해 “잠재적인 인수자와 건물주, 은행 간에 얽힌 퍼즐을 푸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인수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기업은 쿨인베스트먼트·허드슨베이컴퍼니 두 곳이었다.

쿨캣·MS모드·아메리칸투데이 등 네덜란드의 여러 패션 브랜드를 거느린 의류 업체이자 부동산 투자 업체인 쿨인베스트먼트의 로널드 칸 대표는 V&D의 전체 매장 가운데 75%만 인수하려고 했다. 하지만 일부 건물주와 은행들이 쿨인베스트먼트의 재정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협상이 결국 실패로 끝났다.

캐나다 유통 업체인 허드슨베이컴퍼니 역시 V&D가 파산을 선언한 직후부터 해당 기업 관계자들과 업체 인수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의해 왔다. 주로 북미권에서 사업을 펼친 허드슨베이컴퍼니는 최근 유럽 시장 진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 기업은 지난해 9월 독일의 백화점인 카우프호프와 벨기에의 쇼핑센터인 갤러리아이노를 사들였다.

네덜란드 시장에도 관심을 기울이던 허드슨베이컴퍼니는 V&D의 자리에 큰 매력을 느꼈다. 전통적으로 V&D는 도시의 중심부에 매장을 여는 운영 방칙을 고수해 왔다. 현재 네덜란드 대도시의 노른자위 땅에는 여지없이 V&D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 때문에 허드슨베이컴퍼니는 V&D의 빌딩을 인수해 유럽 내 성장 전략의 일환으로 활용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 협상 역시 별다른 소득 없이 끝난 것으로 보도됐다.

이처럼 V&D의 새로운 주인이 나타나지 않게 되자 라 플레이스를 4800만 유로(약 648억원)에 인수한 점보는 난처한 상황에 처했다. 라 플레이스 대부분이 V&D 내에 자리하고 있어 백화점이 영업을 중단한 상태에서는 레스토랑 운영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1887년 암스테르담에서 창립된 V&D는 미국계 사모 펀드인 선캐피털파트너스가 2010년부터 운영해 왔다. V&D는 2014년 매출 6억400만 유로(8158억원)에 영업 적자 4900만 유로(661억원)를 기록했고 최근 수차례 재정 위기를 겪었다.

이에 따라 지난해 직원들의 연봉을 5.8% 삭감했고 뒤이어 400명을 감원했다. 또한 건물주들에게 빌딩 임대료를 인하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금난이 해결되지 않자 경영에서 손을 떼기로 결정했다.

V&D의 현 소유주는 지난해 연말 성명을 통해 “그동안 회사가 몇 차례 어려움을 겪어 왔고 지난해 11월과 12월의 따뜻한 날씨(겨울 의류 판매 저조)와 예기치 못한 돌발 상황들이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고 말했다.

◆100년 기업도 혁신 없으면 살아남지 못해

하지만 V&D의 위기에 대해 전문가들은 기성 업체가 소비자들의 급격한 쇼핑 패턴 변화에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최근 수년간 패션 시장은 SPA(제조·패션 일괄 의류) 브랜드들이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네덜란드에서도 자라·H&M 등 저가 제품을 찾는 소비자의 수요가 빠르게 늘었다. 최근에는 영국의 저가 의류 소매 체인인 프라이마크도 네덜란드에서 사세를 확장하며 기존 업체들의 자리를 넘보고 있다.

이처럼 저가 패스트 패션 브랜드가 강세를 보이면서 이들 업체보다 가격이 비싼 V&D는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패션 시장이 저가 브랜드와 프리미엄 시장으로 재편되고 있는데 V&D는 명확한 정체성을 갖지 못했다. 또 다른 백화점인 바이엔코르프(De Bijenkorf)가 고급화 전략을 구사하면서 고객 확보에 나선 것과 차이를 보인 것이다.

이와 함께 온라인 쇼핑을 즐기는 소비자들이 증가한 것도 V&D의 매출 하락에 영향을 미쳤다. 무엇보다 장기 불황의 여파로 검소한 생활을 하는 이들이 더 많이 늘어난 것도 V&D엔 악재였다.

KOTRA 자료에 따르면 네덜란드의 리테일 시장 중에서도 패션 시장 규모는 2014년까지 5년간 20%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아무리 대중적이고 역사가 오래된 브랜드라고 할지라도 혁신적인 변화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실에 네덜란드의 소매·유통 업체들은 바짝 긴장하고 있다.

V&D의 파산은 해결해야 할 많은 숙제를 남겼다. 앞으로 마땅한 인수자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V&D의 기존 직원 8000여 명의 고용 승계는 불투명한 상황이다. 기존 경영진은 유동 자금 확보의 어려움을 호소했고 직원들의 1월 월급도 네덜란드 국영 고용센터(UWV)가 지급했다.

V&D에 납품하던 중소 업체들의 피해도 만만치 않아 이들은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자국 브랜드에 대한 애착이 남다른 네덜란드인들도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자신들과 함께해 온 V&D의 쓸쓸한 퇴장을 아쉬워하고 있다.

vitamjk@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