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가 철강재 유입에 미 업계 위기감…중국의 반도체 투자도 견제 나서}

[워싱턴(미국)=박수진 한국경제 특파원] 세계 1, 2위 경제 대국인 미국과 중국이 ‘산업의 쌀’로 불리는 철강과 반도체를 놓고 ‘무역 전쟁’을 벌이고 있다. 전 세계적인 경기 침체로 수요가 감소하는데 공급을 제때 줄이지 못해 생긴 ‘초과 공급’ 문제가 세계 최대 수입국과 최대 수출국 사이에서 터지고 있다.

미국은 밀려드는 중국산 저가 제품으로부터 국내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중국은 미처 줄이지 못한 초과 생산량을 어떻게든 소화해 내기 위해 서로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을 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전문가들은 “언젠가는 터질 게 터졌다”는 평가다.
‘철강에서 반도체로’ 확산되는 미중 무역 전쟁
◆미국 철강 업계 “중국 덤핑에 망할 판”

미국 상무부는 5월 17일 중국산 냉연강판에 522%의 반덤핑관세를, 25일엔 중국산 내부식성 철강 제품(도금판재류)에 최대 451%의 반덤핑관세를 각각 부과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이례적인 초고율 관세로, 사실상 중국산 주요 철강 제품에 대해 수입 금지령으로 해석된다.

미 국제무역위원회(ITC)는 이어 5월 26일 중국 최대 철강 업체인 바오강을 포함한 40개 업체를 가격 담합 혐의 등으로 조사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이는 39년 만에 처음으로 관세법 337조를 근거로 실시하는 조사라는 측면에서 주목된다.

혐의가 확정되면 반덤핑관세나 상계관세가 아니라 해당 물품에 대한 수입 배제 명령(exclusion order)과 유통 중인 제품의 압류 및 판매 정지 명령(cease and desist order)까지 내릴 수 있게 된다. 미국이 이처럼 중국산 철강 제품에 대해 이례적으로 초강경 대응하는 배경에는 중국산 제품을 가만뒀다가는 미국 철강 업계 전체가 공멸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있다.

미국은 값싼 중국산 철강의 유입으로 업계 전체가 휘청거리고 있다. 미국 철강 업계 1위인 US스틸은 지난 4월 미국 내 공장 2개를 폐쇄한다고 발표했다.

토머스 깁슨 미 철강협회 회장은 “2015년부터 1년 반 동안 미국 철강 업계에서 1만3500명이 일자리를 잃었고 5월 현재 설비 가동률은 70%로 떨어졌다”며 “이대로 있다가는 미국 철강 업계 전체가 무너질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중국 반도체 과잉투자는 재앙”

미국은 중국의 반도체 투자를 가만뒀다가는 반도체 시장에서도 철강 시장에서와 똑같은 일이 벌어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 중국은 매년 2000억 달러어치의 반도체를 수입하는 세계 최대 수입국이다. 중국은 반도체 조달에 문제가 생기면 산업 전체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그래서 2014년 ‘반도체 독립’을 외치며 반도체 펀드를 만들었다. 정부와 국영기업·국책은행 등 16개 기관이 2020년까지 560억 달러를 모을 계획이다. 중국은 이 돈을 반도체 기업에 투입하고 있다.

지난 3월 XMC가 착공한 우한 3차원(3D) 낸드플래시 공장에 상당액이 들어가고 있다. 작년 칭화유니그룹이 미국 반도체 회사 마이크론 인수를 추진할 때도 펀드에서 투자를 약속했다.

미국은 올 초 세계무역기구(WTO)에 ‘중국 반도체 펀드가 WTO에서 금지하는 국가 보조금에 해당하는지 확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WTO는 정부가 보조금을 특정 기업에 직접 주면 보고하도록 하고 있다. 미국은 한국·일본·대만·중국·유럽연합(EU) 등 6개국으로 이뤄진 세계반도체협회(WSC)를 통해서도 문제를 제기할 계획이다.

미국의 중국 공포는 대통령 선거 과정에도 투영되고 있다. KOTRA 워싱턴무역관은 최근 ‘트럼프 행정부의 통상정책 전망과 미국이 활용 가능한 보호무역 수단’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공화당 대선 주자인 트럼프가 집권한다면 행정명령을 통해 ‘슈퍼 301조’ 부활을 추진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슈퍼 301조는 불공정 무역 국가와 협상을 진행했는데도 비관세장벽 등이 해소되지 않는다면 일방적인 보복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통상 보복 무기다.

◆중국, 미국에 법적 대응하며 구조조정

중국은 이런 미국의 움직임에 ‘발끈’하고 있다. 중국은 미국이 중국 주요 철강 업체의 가격 담합을 조사하겠다고 나서자 WTO 제소로 맞설 것을 암시했다. 차이나데일리 등 중국 언론에 따르면 중국 상무부는 지난 5월 27일 성명을 통해 “사태 추이를 예의 주시하면서 WTO 관련 규정을 이용해 중국 철강 기업의 정당한 권익이 보호받도록 지원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상무부가 ‘WTO 관련 규정’을 언급한 것은 경우에 따라 미국의 가격 담합 조사를 WTO에 제소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라고 중국 현지 언론들은 분석했다.

중국도 초과 공급 문제의 심각성을 잘 인식하고 있다. 중국철강협회 산하 101개 회원사 중 50%에 달하는 51곳이 지난해 적자를 냈다. 중국 정부는 지난 2월 발표한 ‘철강 산업 과잉설비 해소 방안’에서 2020년까지 현행 철강 생산능력의 10%(1억~1억5000만 톤)를 감축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 같은 과잉설비 감축 계획이 효과를 발휘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당분간은 해외 수출 확대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포스코경영연구원은 “중국의 경제성장세 둔화로 올해도 중국 내 철강 제품 수요는 많지 않을 것”이라며 “올해는 철강 제품을 둘러싼 통상 마찰이 더욱 격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국과 중국은 6월 6~7일 이틀 동안 중국 베이징에서 8차 전략·경제대화(S&ED)를 갖고 철강 공급과잉 문제 등을 논의할 예정이다. 그러나 미국이 철강에 이어 반도체 등으로 ‘전선’을 확대하고 있어 양국이 해법을 찾기보다 견해차를 확인하는 자리가 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ps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