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리한 反이슬람 주장에 여론 등 돌려…지지율 작년 8월 이후 최저치 추락}

[워싱턴=박수진 한국경제 특파원] 미국 역사상 최악의 총기 사고로 기록된 플로리다 주 올랜도 참사로 미국 대통령 선거 판이 요동치고 있다.

참사 후 논의의 프레임이 총기 규제 쪽으로 맞춰지면서 민주당 대통령 선거 후보로 사실상 결정된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은 ‘안도의 한숨’을, 공화당의 사실상 대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이 역대 미 대선의 가장 큰 이슈 중 하나인 테러 대응 문제와 연계돼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 올랜도 사고 수사 과정에서 어떤 결과가 나오느냐에 따라 판세가 또다시 뒤엎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분석이다.

◆총기 규제냐 이민 규제냐

미국 플로리다 주 올랜도의 한 게이 나이트클럽에서 지난 6월 12일 새벽 발생한 총기 테러 사건으로 최소한 50명이 사망하고 53명이 다쳤다. 희생자 규모는 2007년 버지니아공대 총기 난사 사건(32명 사망, 30명 부상)을 크게 웃도는 미국 역사상 최악의 총기 사건으로 기록됐다.

이번 사건은 단순한 총기 사건이 아니라 극단주의 무장 단체인 이슬람국가(IS)를 추종하는 이민 가정 출신자의 ‘자생적 테러’라는 점에서 문제가 한층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사건의 성격이 총기 규제 미흡으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테러 대응 부족으로 인한 것인지에 따라 책임 소재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백악관과 민주당, 공화당은 사건 직후부터 사건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초반 분위기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공세적 발언으로 여론을 주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번 사건을 자생적 테러로 규정하면서도 사건의 본질이 총기 규제 미흡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사고의 원인이 미흡한 테러 대응으로 귀결되면 그가 추진하고 있는 이민법 개혁은 물론이고 후계 정권 창출도 어렵게 된다. 민주당 지도부도 같은 상황 인식 아래 총기 규제 강화 법안 처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6월 18일 주례 연설에서 “테러에 강경하게 대응한다는 것은 미국인을 살해할 의도를 가진 사람이 수십 명을 짧은 시간에 살상할 수 있는 공격용 무기를 손에 넣기 어렵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고 말했다.

그는 앞서 6월 16일 올랜도 사고 현장을 방문했을 때도 “그들(주요 총기 참사 범인)이 사용한 죽음의 도구는 흡사했다”며 “우리가 지금 (총기 규제 강화에) 나서지 않으면 이런 학살극을 더 많이 보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미 상원에는 현재 2건의 총기 규제 법안이 계류 중이다. 요주의 인물이나 감시 명단에 오른 인물이 총기를 살 수 없게 규제하자는 법안(다이앤 파인스타인 캘리포니아 주 상원의원 발의)과 총기 박람회 및 인터넷 공간에서 총기를 사고팔 때 구매자의 신원을 의무적으로 조회하도록 하는 법안(크리스 머피 코네티컷 주 상원의원)이 그것이다.

머피 의원은 6월 15일 총기 규제 강화 법안 처리를 촉구하며 장장 14시간 50분에 걸친 필리버스터 연설을 강행했다. 필리버스터 연설은 상대당의 법안 처리를 방해하기 위한 무제한 토론이다.

머피 의원은 공화당 측이 주도하는 예산안 처리를 방해하기 위해 6월 15일 오전 11시 21분부터 다음 날 16일 오전 2시 11분까지 총기 규제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토론을 벌였고 공화당 측에서 법안 처리에 협조하겠다는 약속을 받은 후 단상에서 내려왔다.

머피 의원은 “이 단상에 올라 2시간, 6시간, 14시간 무제한 토론을 이어 가는 데는 별다른 용기가 필요하지 않지만 여섯 살짜리 총기 사건 희생자의 팔을 감싸안고 그의 죽음을 그저 받아들이는 대신 총격범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공화당은 총기 소지의 자유를 규정한 수정 헌법 2조를 들어 그동안 총기 규제에 강력히 반대해 왔다.

하지만 올랜도 테러 이후 총기 규제 강화를 촉구하는 여론이 확산되는 데다 공화당의 사실상 대선 후보인 트럼프도 ‘테러리스트 총기 구입 금지’ 등 부분적 규제 강화 필요성에 동조함에 따라 표결 방침으로 선회한 것으로 알려졌다. 공화당은 수정 법안을 제출해 표결에 부칠 방침이다.

◆테러 대응 부실 공격도 안 통해

트럼프 후보는 올랜도 참사를 계기로 본토 내 테러 위험이 증가하고 있는 현실을 강조하며 보수층의 결집을 노리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과 클린턴 전 국무장관의 테러 위협에 대한 무른 대응이 결국 본토 내 테러 위협을 가중시키면서 미국 전체를 위험에 빠뜨렸다는 논리다.

트럼프 후보는 6월 16일 텍사스 유세 때 “오바마 대통령이 테러 문제를 총기 문제로 바꾸려 한다”며 “문제의 핵심은 총기가 아니라 테러”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튿날 트위터에 “사람들은 ‘사기꾼’ 힐러리와 오바마의 직무 및 안전 조치에 대해 불만을 느끼고 있다”며 “올랜도에 이어 더 많은 공격이 (추가로)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양측의 주장이 맞부딪치고 있지만 여론의 흐름은 트럼프 후보에게 불리하게 흐르고 있다. 6월 18일 미국 정치 전문 매체 리얼클리어폴리틱스 집계에 따르면 클린턴 전 장관의 지지율은 테러 전날인 6월 11일 43.7%였지만 5일 후인 16일엔 44.1%로 소폭 상승했다.

반면 트럼프 후보의 지지율은 같은 기간 동안 39.2%에서 38.3%로 떨어졌다. 트럼프 후보의 지지율 38.3%는 각종 여론조사 결과를 집계해 산출하는 리얼클리어폴리틱스 집계 기준으로 지난해 8월 이후 최저치다.

이는 오바마 정부를 겨냥한 테러 부실 대응 공격이 잘 먹히지 않는 영향도 있지만 트럼프 자신이 이슬람교도(무슬림) 이민 통제 강화 등의 무리한 주장으로 여론을 등 돌리게 만든 영향도 큰 것으로 분석된다.

한편 트럼프 후보는 지난 6월 20일 대선 출마 전부터 자신을 도와 온 코리 르완도우스키 선거대책본부장을 전격 경질했다. ‘심복’ 르완도우스키의 경질은 캠프 내 권력투쟁의 결과물이라는 해석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최근 지지율 하락에 따른 문책 성격이 크다는 게 워싱턴 정가의 해석이다.

ps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