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현장]
해변에 가득한 쓰레기를 재활용해 가방 제작
‘난민 취업’에 앞장선 유럽 디자이너
(사진)이탈리아 출신 엔조 마리 디자이너가 설립한 난민 공예·디자인 회사 쿠쿨라의 직원들. /김민주 객원기자

[한경비즈니스=헤이그(네덜란드)=김민주 객원기자] 유럽의 디자이너들이 난민의 삶을 개선할 수 있는 창의적인 비즈니스 실험에 나섰다.

네덜란드의 젊은 아티스트 그룹은 난민들이 유럽으로 탈출할 때 타고 온 구명보트와 안전벨트를 배낭으로 만드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네덜란드 출신의 20대 디자이너인 디디와 플로어 씨는 최근 사회적 기업 노매드메이커스를 설립, 백투워크(BAG2WORK)라는 캠페인을 이끌고 있다.

평소 난민 사태를 주시하던 이들 디자이너들은 유럽행 난민들이 대거 거주하고 있는 그리스의 레스보스 섬에서 자원봉사를 하다 해변에 널려 있는 구명조끼와 안전벨트 더미를 보고 이 같은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됐다.

처음에는 난민들이 급하게 집을 떠나오느라 제대로 된 가방이 없다는 점에 주목했고 해변에 가득한 쓰레기들을 재활용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 본격적으로 배낭 디자인에 돌입했다. 레스보스로 다시 돌아온 디자이너 그룹은 난민 캠프에 임시 작업장을 마련하고 난민들에게 고무로 가방을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 가방 판매 이윤은 시민 단체에 기부

가방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장비를 제대로 갖추려면 5000유로(620만원) 정도가 필요했지만 이러한 자금을 모을 여력이 없었던 디디와 플로어 디자이너는 가위와 리벳건 등 30유로(3만7000원) 이하의 저렴한 도구만으로 작업할 수 있도록 가방을 디자인했다.

물론 전기도 필요하지 않은 방식이었다. 이들은 하루라도 일찍 난민들을 도와주는 일을 하고 싶어 가방 제작을 서둘렀다고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가방 제작 워크숍에 참여한 난민들은 이른바 탈출 폐기물을 활용해 심플한 디자인인 포춘 쿠키 모양의 배낭을 손쉽게 제작하는 법을 터득하게 됐다. 난민들이 직접 만든 이 가방은 최소한의 재료로 최대한의 공간을 만들도록 디자인됐다. 보트 고무 1㎡와 구명조끼에 달린 줄 4개가 재료의 전부다. 이렇게 제작된 가방은 현재 98유로(12만원)에 판매되고 있다.

가방 가격이 다소 비싸다는 고객들의 의견에 대해 디디와 플로어 디자이너는 “비록 제작 단가는 3달러에 불과하지만 그리스 현지 제작이어서 운송비가 들고 난민들에 대한 임금, 세금, 카드 수수료, 캠페인 진행비 등도 고려했다”고 했다. 이들은 홈페이지를 통해 가방 판매로 이윤이 생기면 시민 사회단체에 기부하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현재 디디와 플로어 디자이너는 섬에 쌓여 있는 보트와 벨트 폐기물을 암스테르담으로 가져오기 위한 수송비 마련에 주력하고 있다. 이들은 이를 통해 네덜란드에 이미 들어와 있는 많은 난민들이 일할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난민들이 일할 수 있는 생산 시설을 열고 제작에 참여한 난민들에게 임금을 지불할 수 있는 사회적 기업을 만들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자금 확보가 쉽지 않다. 최근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가방 500개를 만들 제작비를 모으려고 했지만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프로젝트를 중단하지 않고 있다.

디디와 플로어 디자이너는 “만약 새 이웃(난민)이 우리와 통합되길 원한다면 ‘백투워크’라는 가방 이름처럼 그들을 일하는 곳으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말했다. 이들은 또한 “가방 제작을 통해 난민들은 자립하게 될 것”이라며 “그리스 해변에 버려진 보트와 구명조끼가 난민들에겐 두 번째 인생을 열어주는 소중한 재료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 난민들에게 가구 디자이너 교육도

한편 이탈리아 출신의 디자이너 엔조 마리 씨는 주로 아프리카에서 독일로 넘어온 난민들이 가구 디자이너가 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그는 자신의 고유한 가구 디자인을 난민들이 자유롭게 제작, 판매할 수 있는 권한을 넘겨줬다.

마리 디자이너는 2013년부터 베를린 기반의 난민 지원 프로젝트를 진행, 난민들이 가구를 만들면서 유럽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이미 유럽 내에선 성공한 난민 지원 사업 중 하나로 평가 받고 있다.

그가 설립한 난민들의 공예 및 디자인 회사 쿠쿨라(CUCULA)에서는 난민들에게 가구 제작 기술을 가르쳐 이들이 재정적·사회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있다. ‘쿠쿨라’라는 말도 ‘서로 돌본다’는 의미의 아프리카어에서 따왔다.

쿠쿨라는 정기적으로 젊은 연수생들을 모집해 최소 3개월간 교육을 진행한다. 난민으로 인정받는다고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취업하기 어려운 이들의 사정을 감안해 이들을 아예 가구 전문가로 키우겠다는 게 이 회사의 목표다. 워크숍에서 마리 디자이너의 디자인 시리즈인 아우토프로제타지오네(Autoprogettazione, 1974)를 주로 가르친다.

쿠쿨라는 연수생들을 위해 숙박시설을 제공하고 비자 신정 과정도 지원한다. 가구의 판매 수익도 난민들의 몫이다. 난민들이 제작한 가구는 이미 베를린을 비롯해 유럽 전역에서 호평을 받고 있다. 난민 디자이너들은 탈출 당시 타고 온 배의 나무 조각을 이탈리아의 섬 람페두사에서 수거해 마리 디자이너의 가구에 접목한 독특한 오브제를 선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