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현장]
환율 조작국 지정 임박…멕시코엔 NAFTA 재협상과 국경세 카드

[워싱턴(미국)=박수진 한국경제 특파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서프라이즈’ 행진이 계속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월 20일 취임한 이 후 열흘여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미국 사회를 이전과 180도 다른 방향으로 이끄는 행정명령을 계속 내놓고 있다.

멕시코 장벽 설치, 테러 의심국 국민의 미국 입국 금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탈퇴 선언,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재협상 선언, 키스톤X 파이프라인 건설 허용, 규제 철폐(1규제 도입 시 2규제 폐지) 등이다.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내놓았던 공약(公約) 그대로다. 선거가 끝나면 공약은 공약(空約)에 그치고 현실에 맞는 새로운 정책이 나올 것이라는 전망을 뒤집는 행보다.

그는 백악관에서 지난 1월 31일 대법관 후보를 지명하면서 “나는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라며 “지켜보라”고 강조했다.

◆ 미국 행정부 지도부 총출동 ‘맹공’

트럼프 대통령은 1월 31일 또 하나의 충격을 전 세계에 던졌다. 대미 무역수지 흑자 1~3위인 중국·일본·독일을 상대로 동시다발적인 ‘통화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3개국이 자국의 통화가치를 인위적으로 떨어뜨리는 환율 조작으로 미국에 피해를 주고 있다고 맹렬히 비난했다. 한국은 환율 조작 언급에서 빠졌지만 강대국 간 환율 전쟁의 불똥이 언제 한국으로 튈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이 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백악관에서 7개 글로벌 제약업체 최고경영자(CEO)들과 만난 자리에서 “중국과 일본(정부)이 시장에 개입해 자국의 통화가치를 떨어뜨려 미국과의 교역에서 이익을 취하지만 우리는 바보들(dummies)처럼 보고만 있다”고 말했다.

미국의 무역정책을 총괄하는 피터 나바로 국가무역위원회(NTC) 위원장도 가세했다. 그는 같은 날 대미 무역 흑자 3위국인 독일을 새로운 타깃으로 잡았다.

그는 파이낸셜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유로화는 사실상 독일 마르크화와 같다”며 “독일이 크게 저평가된 유로화를 활용해 미국은 물론 유럽연합(EU) 교역국들을 착취하고 있다”고 날을 세웠다.

미국은 중국·일본·독일 등 3국에 대해 우선 환율 조작국 지정을 검토할 것으로 보인다. 미 재무부는 지난해 10월 발간한 환율 정책 보고서에서 중국·일본·대만·독일·한국 등 5개국을 환율 조작국 이전 단계인 환율 관찰 대상국으로 지정했다.

환율 시장 개입 여부와 대미 흑자 규모, 경상수지 흑자 규모 등을 지켜볼 테니 알아서 잘 관리하라는 일종의 경고장이다.

2016년 개정된 무역촉진법상 환율 조작국 지정 요건은 복잡하다. 하지만 1988년 제정된 종합무역법이 살아 있어 마음만 먹으면 세 나라를 환율 조작국으로 지정할 수 있다. 미 재무부는 오는 4월 환율 정책 보고서를 내놓는다.

트럼프 대통령은 환율 조작국 지정 외에 외교·안보 분야에서의 지렛대를 활용해 대미 흑자 조정 압력을 가할 것으로 관측된다. 중국에 대해서는 외교 원칙인 ‘하나의 중국’을 불인정하겠다는 위협으로, 일본에 대해서는 미일 안보 협력 체계를 강화하는 조건으로 통상에서 요구 조건을 들이밀 가능성이 높다.

◆ 독일 “트럼프가 희생양을 찾고 있다”
3국(중국·일본·독일)에 환율전쟁 선포한 트럼프
독일과 일본은 놀란 표정이다. 스웨덴을 방문 중인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이날 나바로 위원장의 발언에 대해 “독일 정부는 유로화와 그 가치문제와 관련해 유럽중앙은행(ECB)이 독립적으로 정책을 잘 결정할 수 있게끔 노력했을 뿐 유로화 환율 정책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않고 있다”고 반박했다.

독일 언론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경제정책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그는 희생양을 찾을 것”이라며 “독일 기업들이 희생양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했다. 도날트 투스크 유럽연합(EU) 정상회의 의장은 EU 정상회의 개최를 앞두고 회원국들에 보낸 서한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EU에 최대 위협이 되고 있다”고 역공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도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2월 1일 트럼프 대통령의 환율 조작 지적에 “그런 비판은 맞지 않는다”며 “필요하면 트럼프 대통령에게 설명하겠다”고 말했다. 일본 정부는 미국에서 고속철도와 에너지·인공지능(AI) 등의 분야에 투자해 수십만 명의 고용을 창출하는 포괄적 정책 패키지를 ‘선물’로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은 ‘해볼 테면 해봐라’는 입장이다. 미국 국채 매도, 미국산 수입품과 미국 기업들의 중국 내 판매 규제 등 쓸 카드가 많다며 전면전을 준비하고 있다.

미국은 대미 흑자 4위국인 멕시코에 대해서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재협상과 국경세 부과라는 카드를 꺼내들었다. NAFTA에 대해서는 멕시코가 재협상에 응하지 않으면 탈퇴하겠다는 강수를 뒀다.

미국은 멕시코 수출의 80%, 수입의 50%(2015년 기준)를 차지하는 최대 무역국이다. 미국이 재채기를 하면 멕시코는 감기에 걸릴 정도로 대미 의존도가 심각한 상황이다.

논란이 되고 있는 국경세 카드도 가다듬고 있다. 나바로 위원장은 “미국 내 제조업체들이 외국산이 아니라 미국산 부품을 쓰게 해 미국인의 일자리를 늘리고 임금을 높여 나가야 한다”며 “하원에서 마련 중인 ‘국경조정세’가 하나의 옵션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국경조정세는 수출에 따른 기업 수익에는 세금을 면제하고 수입 부품을 쓸 때는 비용으로 인정하지 않아 세금을 더 내게 하는 과세 방안이다. 수입 억제, 수출 독려형 세제다.

당초 트럼프 대통령은 멕시코산 수입품에 대해 35%의 관세를 매기자는 공약을 내놓았지만 세계무역기구(WTO) 체제하에서는 불가능한 시나리오라는 지적에 따라 한 발 물러서는 모양새다.

미국이 주요 교역국들을 상대로 강공으로 나오는 이유는 미국의 녹록하지 않은 경제 상황 때문으로 풀이된다. 미국은 지난해 4분기 성장률이 1.9%에 그쳤다. 전 분기 3.5%에서 크게 떨어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수출 증대와 내수 부양 등으로 연 3.5~4% 경제성장과 일자리 2500만 개 창출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이런 공약을 이행하고 내년 중간선거와 2020년 대선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강(强)달러 해소가 ‘발등의 불’이다.

ps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