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현장]
네덜란드 캐릭터 ‘미피’ 작가 딕 브루너 별세…‘선의 경제’로 전 세계 정복
작고 하얀 토끼, 가장 유명한 수출품 되다
(사진) 미피를 탄생시킨 작가 딕 브루너. /김민주 객원기자

[헤이그(네덜란드)=김민주 객원기자] 지난 2월 25일 네덜란드 로테르담 중심가에 있는 대형 서점 안에 한 삽화가의 추모 코너가 마련됐다. 유명 토끼 캐릭터 미피(Miffy)를 그린 네덜란드 아동작가 딕 브루너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지난 2월 16일 고향 위트레흐트의 자택에서 8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2011년 발표한 마지막 미피 책을 포함해 평생 총 124권의 작품을 남겼다.

◆네덜란드를 슬픔에 빠뜨린 노작가의 죽음

서점에 마련된 딕 브루너 특별 추모 코너에는 노작가의 온화한 얼굴이 담긴 사진과 함께 눈물을 흘리고 있는 미피 캐릭터가 실려 독자들의 발길을 잡았다. 이곳에는 미피와 관련된 서적과 캐릭터 인형, 교구 등 다양한 상품이 전시돼 있다. 특히 굵은 눈물이 볼에 맺힌 미피를 표지로 내세운 책을 찾는 이들이 가장 많았다.

브루너 작가의 별세 소식은 미피 캐릭터의 저작권 보유 회사인 출판사 메르시스 베붸(Mercis bv)의 공지를 통해 전 세계에 알려졌다. 해당 출판사는 네덜란드의 한 온라인 사이트에 작가를 추모할 수 있는 공간을 개설했다.

단 며칠 만에 16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작가와 그의 가족에게 조의를 표하기도 했다. 한 독자는 “그동안 내 손주들과 이웃에서 태어난 아기들에게 늘 미피 책과 장난감을 선물했다”며 작가에게 감사를 표했다.

마크 뤼터 네덜란드 총리 또한 주간 기자회견 도중 딕 브루너 작가의 별세에 대한 기자의 질
문에 “그는 정말 위대한 사람이자 위대한 예술가였다”며 “그의 죽음이 매우 슬프다”고 답했다. 총리는 과거 한 인터뷰에서 브루너 작가에 대해 “네덜란드의 문화적인 유산이자 영웅”이라고 극찬한 바 있다.

네덜란드에서 브루너 작가의 명성은 상당하다. 그의 고향인 위트레흐트의 한 골목은 미피 거리와 브루너 거리로 이름이 붙여져 있는데 이 길의 표지판을 작가가 직접 그리기도 했다.

또한 2006년에 미피미술관이 설립됐다. 평일에도 유아·어린이 관람객들이 가득할 정도로 인기가 많다. 이 미술관의 바로 맞은편에 있는 위트레흐트 중앙미술관에도 작가가 실제 사용했던 소품과 가구들을 그대로 옮겨 놓은 브루너 아틀리에가 마련돼 있다.

이곳에는 작가로부터 기증받은 수백 점의 미피 그림과 포스터도 전시돼 있어 네덜란드를 찾는 여행객들의 필수 관광 코스로 떠오른 지 오래다.

본래 가업을 이어 받아 출판사를 운영할 뻔했지만 그림에 더 관심을 보여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해 온 브루너 작가는 책의 표지 그림을 그리면서 상업 작가로 첫발을 내디뎠다. 그는 아이들이 즐길 수 있는 쉬운 캐릭터를 만드는데 주력했고 프랑스 파리 여행 중 알게 된 앙리 마티스의 그림을 롤모델로 삼게 된다.

이후 네덜란드 예술운동 ‘데 스테여’의 그래픽 디자인에서도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이 운동은 네덜란드 추상화가 피에트 몬드리안의 정신을 계승한 것으로 전해진다.
작고 하얀 토끼, 가장 유명한 수출품 되다
(사진) 딕 브루너를 추모하기 위해 네덜란드의 주요 서점에서는 굵은 눈물을 머금은 미피가 그려진 도서를 판매하고 있다. /김민주 객원기자

◆‘단순함’이 캐릭터 성공 비결

시각적인 세련미와 단순함이란 키워드에 매료돼 독특한 스타일을 구축한 브루너 작가는 1955년 네덜란드의 한 해안으로 떠난 가족 휴가에서 본 토끼에서 영감을 얻어 자신의 아들을 위한 그림책 미피 이야기를 출간했다.

그는 이내 어린이 그림책 계의 스타로 급부상했다. 큰 귀와 두 개의 점으로 이뤄진 눈, 엑스 모양으로 그어진 입술로 표현되는 작고 하얀 토끼 이야기에 아이들은 열광했다.

미피 캐릭터의 성공 비결은 단순함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브루너 작가는 적은 비용으로 많은 일을 한다며 미피의 상품성에 대해 선(線)의 경제(Economy of line)라고도 평했다. 아주 간단한 선 몇 줄과 굵은 그래픽 디자인, 단순한 기본 색상만으로 전 세계 어린이들을 사로잡는 히트 캐릭터를 완성했기 때문이다.

아시아권 특히 일본에서는 어린이를 비롯해 성인 여성들도 좋아하는 캐릭터로 오랫동안 사랑 받고 있기에 미피는 보편적인 언어로 그려진 인기 일러스트레이션의 대표적인 예로도 평가 받는다.

사실 미피의 본래 이름은 네덜란드어로 ‘작은 토끼’란 뜻의 네인셔(nijntje)로, 이곳 아이들에겐 미피보다 본명인 네인셔가 훨씬 친근하다. 영국 언론 BBC에 따르면 미피는 영국 번역가 올리브 존스가 브루너 작가의 동화책을 영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보다 쉬운 이름을 찾다가 사용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국적을 알 수 없는 단순하고 보편적인 얼굴과 일상적인 내용, 발음하기 편한 수출용 이름까지 한몫하면서 미피는 지난 60년 동안 5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됐고 전 세계적으로 8500만 권 이상 판매됐다. 유수의 서구 언론들은 미피를 가리켜 ‘세계를 정복한 토끼’,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토끼’라고 말한다.

정복이라고 표현한 데에는 미피가 다양한 머천다이징 상품으로 제작되면서 수익성에 날개를 달았기 때문이다. 네덜란드에서는 티셔츠를 비롯해 이불·칫솔·주방용품 등 생활에 필요한 대부분의 제품군에서 미피를 쉽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다.

브루너 사후 그가 이룬 성과에 대한 보도가 이어지고 있는데, 네덜란드 일간지 데 폴크스크란트는 미피 캐릭터에 대해 ‘요한 크루이프(네덜란드의 전설적인 축구 선수) 이후 가장 유명한 수출 제품’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