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현장]
“미국에 불리한 협정” 주장…유지 위한 재원 조달에 큰 차질

[워싱턴=박수진 특파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6월 1일(현지 시간) 파리기후변화협정(이하 파리협정)에서 탈퇴한다고 공식 선언했다. 파리협정이 미국에 불리하게 체결됐다는 이유에서다.

트럼프 대통령은 재협상 또는 파리협정의 전면적 재체결을 제안했다. 세계는 충격에 빠졌다. 파리협정 체결을 주도한 미국이 빠지면서 협정 자체가 유지되기 힘들다는 지적이다. 호주에서는 “미국처럼 협정에서 빠져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재협상 여부에 쏠리는 관심

트럼프 대통령은 6월 1일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오늘부터 미국은 파리협정 이행과 협정으로 인해 부과된 엄격한 경제·금융적 부담 이행을 일절 중단한다”고 말했다. 파리협정 체결 1년 6개월 만에 스스로 발을 뺀 것이다.

파리협정은 2015년 12월 195개국이 지구 온도를 산업혁명 이전보다 섭씨 2도 이상 높이지 않기 위해 자발적으로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기로 약속한 국제 자율 규약이다. 미국은 배출량을 2025년까지 2005년보다 26~ 28% 줄이기로 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파리협정 탈퇴는 예고된 수순이었다. 그는 2011년부터 지구온난화 주장에 대해 ‘헛소리(bullshit)’또는 ‘속임수(hoax)’라는 표현을 쓰며 비판해 왔다. “지구온난화는 미국 제조업 경쟁력을 떨어뜨리기 위해 중국이 만든 개념”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선 후 시각이 바뀌는 듯했다. 지난해 11월 23일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 때는 “열린 시각에서 파리협정을 보고 있다”고 말했다. 취임과 함께 발표하겠다던 파리협정 탈퇴 선언도 미뤘다.

결국 취임 5개월여 만에 탈퇴 선언 쪽으로 결론 났지만 그 근거는 바뀌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1일 “파리협정이 중국·인도·유럽에 비해 미국에 불리하게 체결됐다”고 지적했다.

미국은 2025년까지 불가능에 가까운 감축량을 제시했지만 중국은 13년 동안 계속 늘릴 수 있고 인도는 2020년까지 석탄 생산을 두 배로 늘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 “세계의 모든 나라가 부담과 책임을 공유할 수 있게 재협상 또는 전면적인 파리협정 재체결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미국이 탈퇴를 선언했지만 곧바로 파리협정에서 빠져나가는 것은 아니다. 파리협정 규정에 따라 협정 당사국은 3년간 파리협정에서 탈퇴할 수 없고 탈퇴 의사를 밝혀도 1년간 공지 기간을 둬야 한다.

뉴욕타임스는 “규정대로 절차를 밟으면 최종 탈퇴 시점은 2020년 11월 4일”이라고 보도했다. 차기 미국 대선 다음 날이다. 따라서 파리협정 재가입 문제가 대선 쟁점이 될 수 있고 차기 대통령은 원하면 협정에 재가입할 수도 있다.

관심은 재협상 가능성에 쏠리고 있다.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는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이나 인도 쪽에서 온실가스 배출 감축 노력을 배가하고 미국의 부담을 덜어주면 재가입하겠다고 제의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런 제안에 중국이나 인도 등이 대응할 인센티브가 없다는 데 공감하고 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지구를 대체할) 행성 B가 없기 때문에 (파리협정을 대신할) 플랜 B도 없다”고 재협상 가능성을 일축했다.

◆美 움직임에 뒤숭숭한 파리협정

협정 가입국들은 미국 없이도 파리협정을 이끌고 나가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있다. 장 클로드 융커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 발표 뒤 트위터를 통해 ‘심각할 정도로 잘못된 결정’이라고 비난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파올로 젠틸로니 이탈리아 총리는 공동성명을 통해 “파리협정은 국제적인 협력의 주춧돌”이라며 “파리협정에 제시된 (탄소 배출 감축) 목표를 이행할 수 있도록 개발도상국들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미국 없이 파리협정이 제대로 유지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가입국들의 강한 의지와 달리 벌써부터 여기저기에서 균열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협정을 유지하는 데 드는 돈이다.

파리협정의 골자는 선진국들이 반강제적으로 개발도상국들의 온실가스 배출을 규제하는 대신 개도국의 감축 노력을 측면 지원하는 것이다. 선진국들은 이를 위해 2020년까지 연간 1000억 달러의 녹색기후기금(GCF)을 마련하기로 했다.

하지만 아직 누가 얼마를 낼지도 정해지지 않았다. 앞서 2013년 미국 등 43개국은 녹색기후기금 종잣돈 103억 달러(초기 부담금)를 마련하자고 합의했었다. 이 돈도 다 걷히지 않았다. 미국은 30억 달러를 내기로 했지만 10억 달러만 냈다. 영국은 12억1000만 달러, 프랑스는 10억4000만 달러, 독일과 일본은 10억 달러 등을 내겠다고 했다. 돈을 다 낸 나라는 없다.

미국이 빠지면서 나머지 선진국들의 부담이 더 커지게 됐다. 선진국들은 미국 몫까지 부담하기를 꺼릴 것이고 중국 같은 개도국들은 덜 지원받으면서 당초 계획대로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이 때문에 브뤼셀에서 6월 2일 끝난 중국·EU 정상회담에서는 기후변화와 관련된 공동성명도 없었다. 전날까지만 해도 EU 정상들과 중국 등은 트럼프 대통령의 파리협정 탈퇴 선언을 ‘중대한 실책’이라고 비난하며 협정 준수 의지를 강조했지만 막상 끝날 때는 종이 한 장짜리 공동성명서도 채택하지 못했다.

양측 간 무역 불균형 등 골이 깊은 갈등도 있었다지만 파리협정 준수 과정에서 불거질 재원 부담 등을 둘러싼 이견도 적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디 오스트레일리안’ 등 호주 언론들은 6월 3일 미국의 파리협정 탈퇴 선언 후 보수 연립정부 내 6~7명의 의원이 맬컴 턴불 총리를 향해 협정 탈퇴나 협정에 대한 원점 재검토를 요구했다고 보도했다.

호주는 인구가 2400만 명에 불과하지만 풍부한 석탄 자원을 주요 발전 원료로 이용하면서 1인당 온실가스 배출량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국가 중 하나로 꼽힌다. 파리협정을 준수하면 일부 지역에선 급격한 전력 가격 상승과 함께 심각한 전력난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우려가 나온다.

미국 전역에서는 6월 3일 파리협정 탈퇴에 찬성하는 ‘파리보다 피츠버그’ 집회와 결정에 반대하는 ‘진실을 위한 행진’ 집회가 동시다발적으로 열렸다. 일부에서는 집회 참가자들 간에 충돌 직전 사태까지 벌어졌다.

렉스 틸러슨 미 국무부 장관은 6월 2일 성명을 통해 “미국은 파리협정이 없을 때도 온실가스 감축과 관련한 뛰어난 실적을 보여줬다”면서 “앞으로도 이런 노력이 변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ps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