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현장]-기업·지자체에 광범위한 대출 개시…‘부채의 화폐화’ 우려 커지기도
코로나19로 확대된 미국 중앙은행의 역할론
[뉴욕(미국)=김현석 한국경제 특파원]미국 중앙은행(Fed)은 지난 4월 27일 지방채의 매입 대상을 확대한다고 발표했다. 당초 인구 200만 명 이상의 카운티(군)와 100만 명 이상의 시가 발행한 채권만 사기로 했지만 이를 50만 명 이상의 카운티와 25만 명 이상으로 넓힌 것이다.

이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미 의회, 각 주가 연방 자금 지원 이슈를 놓고 다투는 와중에 나왔다. 연방 정부가 주 등 지방자치단체에 지원하지 않아도 Fed가 이들의 지방채를 사주면 유동성 문제는 사라진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세계 중앙은행들의 역할이 전례 없는 수준으로 확대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Fed는 그동안의 중앙은행의 존재 의미를 변화시키고 있다”며 “‘은행들의 은행’이 아니라 기업·지자체 등에까지 광범위하게 대출해 주면서 그동안의 금기를 깨고 있다”고 보도했다.

최근 중앙은행의 조치들은 갑작스럽게 터진 코로나19라는 천재지변 속에 경제를 구원하기 위한 적절한 조치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시장 곳곳에 대한 중앙은행의 개입이 ‘모럴 해저드’를 부추기고 나아가 ‘부채의 화폐화(debt monetization)’를 부르고 있다는 우려도 크다.
◆‘정치적 지뢰밭’에도 뛰어든 Fed

미국은 최근 코로나19 사태로 재정이 어려워진 주 정부에 연방 자금을 투입하는 문제로 시끄러웠다. 미 상원의 미치 매코널 공화당 원내대표가 “각 주들이 예산 부족분을 채우기 위해 연방 지원을 받는 대신 파산을 선언하도록 허용하는 것을 지지한다”고 밝힌 때문이다. 이는 연방 정부가 돈을 대주면 각 주가 마음대로 예산을 쓰는 모럴 해저드가 생길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이에 대해 뉴욕 주의 앤드루 코모 주지사는 “정말 바보 같은 생각”이라며 “뉴욕 캘리포니아 등이 파산을 선언하면 국가 경제가 붕괴될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에 트럼프 대통령은 트위터를 통해 “왜 납세자들이 형편없이 운영되는 주들과 도시에 구제 금융을 지원해야 하는가”라며 매코널 의원을 지지하고 나섰다.

이런 가운데 Fed가 예산 5000억 달러 규모의 지방정부유동성기구(MLF)를 통해 매입할 지방채의 대상을 확대한 것이다. 이에 따라 트럼프 대통령까지 가세한 논란은 일단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자금 사정이 급한 지자체는 Fed의 조치로 지방채를 쉽게 발행해 자금을 조달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이날 조치로 Fed의 수혜를 볼 수 있는 지자체는 당초 50개 주와 워싱턴D.C.를 포함한 76개 지방 정부에서 261개 지방 정부로 증가했다. Fed는 이들 지자체의 지방 공사 등이 도로·교량·공항·병원 등을 짓기 위해 발행하는 지방채도 매입 대상으로 검토하겠다고 덧붙였다.

월스트리트저널은 “Fed는 오랫동안 주와 도시에 대한 대출을 ‘정치적 지뢰밭’으로 봐 왔다”며 “내부에서는 상환받기 어려운 지방채를 보유하게 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지자체가 파산하면 Fed가 어떤 역할을 할지, 어떻게 돈을 되찾을지에 대한 답이 없다”고 지적했다.

이날 Fed의 조치는 코로나19 사태 속에 중앙은행의 역할이 어디까지 확대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Fed는 미국에서 코로나19가 확산되던 3월 3일 0.5%포인트 긴급 금리 인하를 시작으로 제로 금리(3월 17일), 무제한 양적 완화(3월 23일), 2조3000억 달러 규모의 유동성 공급(4월 9일)까지 거의 매주 정책을 쏟아냈다. △금리 조정이라는 전통적 통화 정책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갖추게 된 양적 완화(QE) △‘예외적이고 긴급한 경우’ 쓸 수 있는 Fed법 ‘13조 3항’을 기반으로 기업 회사채까지 사들이는 자산 매입 프로그램들까지 활용할 수 있는 모든 정책을 동원한 것이다. 특히 정크본드와 부채담보부채권(CLO), 상업용 모기지채권(CMBS) 등까지 사들이기로 한 것은 미국에서는 유례가 없던 일이다.

시장에선 ‘극한의 바주카(ultimate bazooka)’라는 표현이 나왔다. ‘바주카’는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당시 헨리 폴슨 전 재무장관이 미 의회에서 “강도를 만나면 물총이라도 쏴야 한다. 하지만 바주카가 있다면 강도가 우리를 건드리지 못할 것”이라며 초대형 QE에 대한 동의를 받아내 유명해진 용어다.

월가에서는 Fed가 일본은행처럼 증시가 흔들리면 주식 상장지수펀드(ETF)도 매입하지 않겠느냐는 기대까지 나오고 있다. 스티븐 므누신 재무부 장관은 “Fed가 주식을 사들일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밝혔지만 그 가능성을 완전히 닫지는 않았다.
◆모든 걸 사는 중앙은행들…급증하는 자산

Fed의 자산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3월 2일 4조2415억 달러이던 자산은 4월 20일 6조5731억 달러로 7주 만에 2조3316억 달러(54%) 급증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Fed의 자산이 올해 말이면 8조~11조 달러까지 증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 국내총생산(GDP)의 절반에 달하는 규모다.

Fed의 전방위적 완화 정책에 대한 시각은 아직까지는 우호적이다. 윌리엄 더들리 뉴욕연방은행 전 총재는 “제롬 파월 의장은 (직감에 따라) 매우 적극적으로 움직였고 아주 적절했다”고 말했다. 미국의 회계 자문사 그랜트손튼의 다이안 스웡크 수석 경제학자는 “이번은 정말 다르다. 우리는 편견을 버리고 공중 보건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Fed의 정책을 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4월 23일 발표된 갤럽 설문 조사에서도 58%의 미국인이 파월 의장에 대해 ‘미 경제에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답했다.

‘오지랖’을 넓히고 있는 곳은 Fed뿐만이 아니다. 일본은행은 3월 16일 주식 ETF의 매입 규모를 연 6조 엔에서 12조 엔으로 올렸다. 또 지난 4월 27일에는 80조 엔이던 국채 연간 매입 한도를 폐지하고 무제한 매입에 나섰고 회사채와 기업어음(CP) 매입 한도도 7조4000억 엔에서 20조 엔으로 높였다. 회사채 매입 한도는 일본 회사채 시장에 유통되는 물량의 45%를 살 수 있는 초대형 규모다.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수없는 QE를 반복해 온 유럽중앙은행(ECB)은 3월 18일 또다시 사상 최대인 7500억 유로 규모의 QE를 발표했고 4월 22일엔 정크본드도 시중 은행들의 대출 담보로 인정하기로 했다. 현재 일본은행의 자산은 610조 엔, ECB는 5조5000억 유로에 달한다.
신용 평가사 피치에 따르면 올해 세계 중앙은행들의 QE 규모는 6조 달러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이는 2009~2018년 9년간 이뤄졌던 세계 QE 규모의 절반이 넘는다.

중앙은행들의 전방위적 시장 개입은 상당한 우려도 낳고 있다. 먼저 시장 내에 모럴 해저드가 확산되면서 ‘생산성 높고 혁신적 기업을 골라내는’ 시장 기능이 교란되고 있다. ICE 뱅크오브아메리카(BofA) 지수에 따르면 3월 20일부터 4월 14일까지 투자 적격 등급 채권과 국채 간의 스프레드(금리 격차)는 1.5%포인트 줄었고 같은 기간 하이일드 채권의 스프레드는 2.1%포인트 감소했다. Fed의 개입으로 정크본드가 투자 등급 채권보다 선호되는 기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블랙록의 릭 라이더 글로벌 자산배분팀 헤드는 최근 회사 블로그에 “Fed와 다른 중앙은행을 따라 그들이 매입하기로 한 자산을 사겠다”고 밝혔다. 힘들게 리스크를 따져 자산을 선별할 필요 없이 중앙은행만 따라하겠다는 뜻이다.

모럴 해저드는 시장에만 그치는 게 아니다. 정치인들도 개입하면서 중앙은행의 중립성이 흔들릴 가능성이 제기된다. 미 상원의 테드 크루즈 의원(공화·텍사스)은 최근 파월 의장에게 편지를 보내 신용 등급이 낮아 대출을 받을 수 없는 석유·가스 회사에 돈을 빌려줄 새로운 방법을 제안하기도 했다. Fed의 금고를 쌈짓돈처럼 쓰겠다는 시도다.

Fed가 지방채 매입 대상을 확대한 것도 3월 9일 MLF 설립을 발표한 뒤 볼티모어·피츠버그·디트로이트 등 흑인들이 많이 사는 시들이 대상에서 제외됐다는 비난을 받은 데 따른 것이다. 정치적 비판을 견디지 못해 매입 대상을 확대함으로써 더 큰 위험을 부담하게 된 셈이다.

구겐하임파트너스의 스콧 마이너드 최고투자책임자(CIO)는 투자 잡지 배런스와의 인터뷰에서 “Fed와 재무부는 신용 위험을 사회주의화하며 새로운 도덕적 해이를 조성했다”면서 “미국은 절대로 자유시장주의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중·장기적으로는 ‘부채의 화폐화’를 통해 화폐의 가치를 흔들 수도 있다. 중앙은행이 돈을 찍어내 정부의 부채를 갚는 현상을 뜻한다. 시장의 신뢰를 잃는다면 통화는 휴지로 변할 수 있다. 지난 10년간 15분의 1로 추락한 아르헨티나의 통화 가치가 대표적인 사례다.

신(新)채권왕으로 불리는 제프리 건들락 더블라인캐피털 최고경영자(CEO)는 “Fed가 모두를 구제하려고 한다면 실제로는 아무도 구제하지 못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realist@hankyung.com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75호(2020.05.04 ~ 2020.05.10)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