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청와대에선]
-文 대통령, 이순신 장군 언급·김현종 차장, 요시다 쇼인 인용…“또 다른 역사 전쟁”
아베의 도발을 바라보는 청와대의 시각
[김형호 한국경제 정치부 기자] “요시다 쇼인, 다카스키 신사쿠가 누구지.” 지난 7월 17일 김현종 청와대 안보실 2차장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7월 1일부터 시작된 일본 아베 정부의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 부품 수출 규제의 부당성을 해외 언론에 알리기 위한 자리였다. 실제 내용은 일본 국민과 언론을 향한 메시지가 핵심이었다.

김 차장은 “만일 요시다 쇼인 그리고 아베 신조 총리와 그의 아버지 아베 신타로가 ‘신(晉)’을 공유하는 다카스키 신사쿠가 오늘날 살아있다면 한·일 양국이 미래 지향적인 관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내 생각에 공감했을 것”이라며 일본의 수출 규제가 자유무역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것을 강조했다.

김 차장의 일본 역사 인용은 계속됐다. 1868년 메이지유신을 이끌어 낸 사쓰마와 조슈 연합, 일명 ‘삿초 동맹’이 등장했다. “19세기 사쓰마와 조슈가 협조해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킨 것처럼 공동의 가치를 공유해온 한·일 양국은 협력해야 한다.”

김 차장은 8월 2일 일본이 화이트리스트(수출 절차 우대국) 배제 결정을 내린 당일 브리핑에서도 한·일 간의 역사를 거론했다.

그는 “임오군란·갑신정변·청일전쟁, 그것도 부족해 아관파천·가쓰라-태프트밀약·을사늑약·한일강제병합 등의 어려운 상황들을 극복하고 세계 12위의 경제 대국과 역동적인 민주주의를 동시에 실현한 세계 최초의 국가가 대한민국”이라며 일본의 2차 경제 보복 극복 의지를 다짐했다.

일본의 경제 보복 이후 문재인 대통령을 필두로 청와대 핵심 인사들의 한·일 역사 언급이 부쩍 늘고 있다.

문 대통령은 7월 12일 전남 무안을 방문한 자리에서 “이순신 장군은 불과 12척의 배로 나라를 지켰다”며 호국정신을 언급한 이후 주요 회의와 행사에서 일본의 침략 역사와 관련한 발언을 이어 가고 있다.

대통령 휴양지인 저도를 국민에게 환원하는 행사에서는 “저도가 있는 거제는 이순신 장군의 옥포해전이 있었던 곳”이라고 상기시켰다.

8월 7일 화이트리스트 배제 결정 이후 처음으로 국내 부품 소재 기업을 방문한 자리에서도 ‘기술입국’을 강조하며 “임진왜란 때 일본이 가장 탐냈던 것은 조선의 도예 기술이었다”고 말했다.

청와대 내부에선 아베 정부의 경제 보복을 또 다른 역사 전쟁으로 인식하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지난 7월 반도체 소재 부품 3개 품목의 수출 규제 조치 당시만 해도 다소 신중한 분위기였지만 8월 초 화이트리스트 배제 결정이 나온 뒤 이 같은 인식이 확고해지는 분위기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그동안 아베 정부가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에 대한 보복 차원인지 아니면 이를 뛰어넘는 또 다른 구상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전략적 판단이 필요했다”며 “현시점에서는 단순한 경제 보복을 뛰어넘어 우리 경제와 문재인 정부를 좌초시키려는 의도라고 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 처장이 요시다 쇼인과 사쓰마·조슈 동맹을 공개 자리에서 언급한 것도 이 같은 인식을 반영한 것으로 풀이된다.


◆ 아베 총리가 가장 존경하는 ‘요시다 쇼인’

아베 총리가 8번이나 당선된 지역은 야마구치현이다. 일제강점기 부산에서 관부연락선이 오가던 시모노세키항이 있는 지역이다.

요시다 쇼인은 아베 총리와 같은 야마구치현 출신으로, 조선을 침략해야 한다는 ‘정한론’의 창시자로 꼽힌다. 1855년 요시다는 저서 ‘유수록(幽囚綠)’에서 정한론을 처음 거론했다. “군함과 포대를 서둘러 갖춰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 무역에서 러시아와 미국에 입은 손해는 조선과 만주의 토지로 보상받아야 한다.”

요시다는 사설 학당 격인 쇼카손주쿠(松下村塾)를 통해 이 같은 정한론을 전파하고 일본의 근대화와 제국주의의 선봉에 서는 핵심 제자들을 배출했다.

막부 타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다카스키 신사쿠를 비롯해 이토 히로부미, 기도 다카요시, 일본 군국주의의 화신으로 꼽히는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이 요시다의 직계 제자들이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기획한 이노우에 가오루 초대 조선 공사와 이를 실행한 미우라 고로 공사 등이 요시다의 영향을 받은 야마구치현 출신들이다. 가쓰라-태프트밀약의 가쓰라 다로, 조선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도 야마구치 출신이다.

야마구치의 옛 이름은 조슈(長州)다. 앙숙 관계였던 사쓰마(薩摩, 현 구마모토현)와 손잡고 250여 년간 유지해 온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리고 메이지유신을 이끌어 냈다. 조슈 출신들은 이후 일본 정계의 주요 요직을 휩쓸었다.

아베 총리까지 야마구치 출신 총리만 8명에 달한다. 아베 총리에게 정치적 유산을 물려준 외조부 기시 고노스케는 전범임에도 불구하고 총리를 지냈다.

메이지유신 동맹인 사쓰마의 핵심 인물인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쿠보 도시미치가 자살 또는 암살로 메이지유신 직후 사라지면서 사실상 조슈 세력이 일본 정부를 장악했기 때문이다.

동향 출신인 사이고와 오쿠보는 메이지유신 이후 신식 군대와 사무라이 계급을 대변하는 적으로 맞선다.

당장 조선으로 출병해야 한다는 사이고와 조선을 정벌하더라도 우선은 신식 군대로 힘을 길러야 한다는 오쿠보의 정치 노선의 대립 끝에 일본 내 최후의 내전으로 불리는 세이난(서남)전쟁(1877년)이 발발했다. 이 전쟁에서 패한 사이고는 자결하고 오쿠보는 이듬해 사이고를 따르는 사무라이에 의해 암살당한다.

요시다가 일본 우익의 사상적 뿌리로 꼽히는 핵심 이유는 그의 주장이 훗날 ‘대동아 공영론’으로 발전, 일본의 침략 전쟁의 근간이 됐다는 점 때문이다.


◆ 한국과 갈등, 헌법 개정 돌파구 마련 ‘노림수’?

요시다는 정한론을 주장하면서 “홋카이도를 개간하고 캄차카반도와 오호츠크를 탈취하고 오키나와도 점령해야 한다. 조선과 만주 땅을 얻고 남쪽으로는 대만과 필리핀을 손에 넣어 일본의 진취적 기상을 보여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 군국주의 세력은 1940년대 태평양전쟁을 통해 요시다의 주장을 실현했다. 그뿐만 아니라 요시다는 조선의 ‘다케시마(당시 울릉도) 개척론’을 처음 주창했고 이는 훗날 독도를 둘러싼 한·일 간 영유권 분쟁의 단초가 된다.

아베 총리는 평소 가장 존경한 인물로 요시다를 꼽고 있다. 요시다의 좌우명 ‘지성(至誠)’을 본인의 좌우명으로 삼을 정도다. 아베 정부의 경제 보복 이면에는 과거 일본의 패권 회복을 노리는 일본회의가 존재한다.

아베 정부 각료의 상당수가 일본회의 소속이다. 요시다가 그린 ‘패권 국가 일본’에 대한 향수가 일본회의의 지향점이다. 평화헌법을 고쳐 전쟁이 가능한 나라로 만드는 게 이들의 목표다.

국내 일각에서 아베 정부의 경제 보복을 ‘신경제 정한론’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도 이 같은 역사적 맥락에서다.

실제로 2012년 5월 대법원이 강제징용 재판과 관련해 “일본 기업이 피해자에게 직접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한 이후 아베 총리 측근들 사이에서 정한론이 제기된 것으로 알려졌다. 2013년 11월 일본의 유력 주간지 주간문춘은 “아베 측근들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며 새로운 정한론을 제기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여권에선 일본 정부의 경제 보복이 이 같은 우익들의 움직임과 맞닿아 있다는 우려의 시각이 적지 않다. 참의원 선거 이후에도 아베 정부가 국제사회의 비판을 무릅쓰고 경제 보복 2탄에 착수한 것도 일본 내 우익 세력들의 정서를 반영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한·일 경제 전쟁이 단기간에 해결되기 어려운 구조적 갈등 국면에 접어든 것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역사 문제를 경제 전쟁으로 전환한 일본의 태도는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라며 “여기에는 한·일 간의 갈등을 통해 평화헌법 개정의 돌파구를 마련하려는 아베 정부의 노림수가 있다”고 분석했다.


chsan@hankyung.com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37호(2019.08.12 ~ 2019.08.18)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