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청와대에선]-교육제도 개편 드라이브에도 이상보다 현실에 무게-‘소주성’ 사라진 자리엔 ‘소부장’이 대체
이상과 현실 괴리 속 고민하는 문재인 대통령
[김형호 한국경제 기자] “국민의 관심이 가장 높은 대입 제도부터 공정성을 확립해야 합니다. 참으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이해관계가 엇갈리고 가치가 충돌하며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도 있습니다.”

서울 세종로 정부종합청사에서 10월 25일 열린 교육개혁 장관회의. 긴급회의를 주재한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 가운데 눈길을 끄는 대목은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언급한 부분이었다.

정시 확대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국민이 불공정한 학생부종합전형 중심의 수시보다 ‘차라리 성적으로 뽑는 정시가 더 공정하다고 생각한다’면 정시 확대가 불가피하다는 게 이날 문 대통령 연설의 핵심이었다.

이런 문 대통령의 생각은 이날 오후 청와대에서 열린 출입기자단 초청 행사에서도 묻어났다. 문 대통령은 “지나오고 보니 누구도 공정이라는 말들을 하지만 공정의 개념은 각자 굉장히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사교육을 통해 좋은 대학을 가는 부모 세대의 부를 대물림하는 구조를 바꾸기 위해 개인의 적성을 존중하는 다양한 전형을 공정이라고 생각해 도입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불공정의 대상이 됐다는 것이다.

문 대통령의 공정의 의미를 되돌아보는 계기는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남북한 아이스하키 선수단 구성 문제를 둘러싼 공정성 문제를 지켜보면서 상당한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비인기 종목인 아이스하키를 남북 단일팀으로 구성하면 국민적 관심뿐만 아니라 실업팀 구성 등 향후 선수들에게 좋을 것이라는 취지에서 시작한 일이 젊은 층에게는 북한 선수 참가로 출전 기회를 놓친 우리 측 선수에 대한 공정성 문제로 불거진 것을 보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고 전했다.

임기 중반을 맞으며 문 대통령의 현실과 이상 사이의 고민은 더욱 깊어지는 듯하다. 11월 9일 임기 반환점을 앞두고 마음처럼 성과가 나지 않은 상황에 대한 답답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문 대통령은 청와대 기자단 초청 행사에서 나온 첫 질문에 “국정이 참 어렵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러면서 “평가를 어떻게 받을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나름대로 쉼 없이 달려왔다”며 “하지만 경제도 아직 국민이 동의할 만큼 체감이 안 되고 국민 통합도 그렇고…”라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청와대에서 최근 소득 주도 성장 표현이 사라진 것도 이상과 현실에 대한 고민의 결과라는 분석이 나온다. 집권 초기 신념적으로 밀어붙이던 ‘소주성’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커지면서 올 하반기 들어 문 대통령의 공식 연설뿐만 아니라 청와대 경제 참모들의 입에서도 ‘소주성’이 사라졌다.

한 청와대 경제 참모는 “소주성의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이를 두고 정상적인 토론이 안 되고 불필요하게 소모적 논쟁만 계속된다면 굳이 사용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분위기”라고 했다.

◆ 내년 총선 앞두고 정책 전환 시도 관측 나와

그 대신 일본의 경제 보복 본격화를 계기로 ‘소주성’의 자리를 ‘소부장(소재·부품·장비)’이 대체하고 있다. ‘소주성’이 사라진 상황을 두고 일각에선 문재인 정부가 성과를 내야 하는 집권 중반을 맞아 조심스레 정책 전환을 시도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정책 기조의 전면적 전환을 시도하면 노동계·시민사회 등 전통 지지층의 반발이 우려되는 만큼 일본의 경제 보복을 계기로 소주성을 자연스럽게 소부장으로 대체하는 방식으로 정책을 선회하는 것이라는 분석이다.

문 대통령이 지난 9월 중순 경제 장관회의를 직접 주재하고 대기업을 비롯한 주요 기업들의 산업 현장을 직접 찾는 경제 행보를 대폭 확대한 것도 이런 배경으로 풀이된다. 홍남기 경제부총리가 해외 출장 중임에도 문 대통령은 경제 장관회의를 소집해 민간 부문의 활력을 강조했다.

특히 이 자리에서 문 대통령이 생활형 사회간접자본(SOC)과 수도권광역교통망(GTX), 3기 신도시 조기 착공을 주문한 것은 의외라는 반응이 적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 초기 SOC 예산을 대폭 삭감하고 건설 부문을 통한 경제 활력을 금기시 했던 상황에 비춰 보면 이례적이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는 인위적 경기 부양책을 쓰는 대신 국민 생활 여건을 개선하는 건설 투자에 주력해 왔다. 이 방향을 견지하면서 필요한 건설 투자를 확대해 나가야 한다”는 전제를 달긴 했지만 문 대통령이 민간 부문 활력을 위한 건설 투자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은 드문 일이다.

전·후방 산업 효과가 큰 건설 투자 확대를 통한 일자리 증가 등의 고용 지표 개선을 겨냥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그만큼 임기 중반의 경제 고용 지표에 대한 부담이 크다는 방증이다. 일각에선 내년 수도권 총선을 염두에 둔 다목적 포석이라는 시각도 있다.

실제 더불어민주당 수도권 의원들은 문 대통령의 GTX 조기 착공을 크게 반기는 분위기다. 여당 수도권의 한 중진 의원은 “GTX 조기 착공은 지역구 의원들에겐 조국 정국으로 악화된 현장의 민심을 수습할 수 있는 핵심 카드”라며 “서울 도심 접근성이 크게 개선되는 GTX에 대한 경기권 주민들의 기대는 서울에서 바라보는 것 이상”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의 경제 행보 역시 현실성에 무게를 두는 느낌이다. 문 대통령은 10월에만 삼성디스플레이 신규 투자와 상생협약식, 해양 신산업 발전 전략 보고회, 현대차 미래차 국가 비전 선포식, 전북 군산형 일자리 협약식, 인공지능 ‘2019 데뷰(DEVIEW)’ 회의 등 다섯 차례의 산업 현장 방문 행보를 보였다.

일부 진보 언론과 시민사회단체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삼성·현대차·SK·LG 등 국내 주요 기업들의 대규모 투자 현장을 빠지지 않고 챙기고 있다. 올 들어 일곱 번 만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의 잦은 회동에 대해서는 “지나친 삼성 행보가 아니냐”는 비판도 나오지만 크게 개의하지 않는 모습이다.

청와대 고위 인사는 “기업들의 투자는 투자고 재판은 재판”이라며 “새 일자리를 만들고 중소기업과 상생 모델을 만들어 가는 기업들의 투자 행사에는 언제라도 갈 방침”이라고 설명했다.

◆ 경제·산업 현장 방문 행보 더욱 가속화될 듯

최근 청와대의 기류를 감안할 때 문 대통령의 경제·산업 현장 방문 행보는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미·중 무역 갈등과 한·일 경제 분쟁 등 외부 악재가 여전한 가운데 내부적으론 잠재성장률 저하로 올해 성장률 2%대 달성조차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이다.

청와대는 고용률이 역대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다고 항변하지만 최근 통계청 발표에서 비정규직 비율이 2007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하는 등 고용의 질적 하락이 심상치 않은 실정이다. 올 8월 비정규직은 748만1000명으로 전체 임금 노동자의 36.4%에 달했다.

황덕순 청와대 일자리수석은 “올해 조사에서 고용 지위와 관련된 부분을 바꾸기 위한 새로운 조사가 추가되면서 작년 조사에선 정규직이었을 사람이 (올해 조사에서는) 비정규직으로 조사된 것”이라며 “역대 최고라고 하는 것은 상당한 과장”이라고 반박했다.

그럼에도 ‘비정규직 제로’를 천명했던 문재인 정부에서 비정규직이 큰 폭으로 증가한 것은 뼈아픈 대목이다. 이 같은 경제 여건 때문인지 청와대 핵심 인사는 사석에서 “앞으로 문 대통령의 주요 외부 행보는 경제에 초점을 두게 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민간 부문의 핵심인 기업 투자 활성화를 위한 획기적 유인책이 빠진 상황에서 대통령의 ‘경제 챙기기’ 행보만으로는 역부족이라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를 청와대가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chsan@hankyung.com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49호(2019.11.04 ~ 2019.11.10)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