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정치판에선]
-내년 총선 앞두고 또 정치권에 ‘객토’ 바람…“물이 오염됐는데 고기만 간다고 정치 바뀌지 않아”
새 피가 곧 헌 피…‘도돌이표’ 되는 물갈이 정치학
[한경비즈니스=홍영식 대기자] 내년 ‘4·15 총선’을 앞두고 정치권에 다시 ‘바꿔’ 열풍이 불고 있다. ‘조국 사태’가 일단락되자 각 당이 내부에 눈을 돌리기 시작하면서 ‘현역 물갈이’가 정치권 최대 화두로 떠올랐다.

‘총선 객토’ 바람은 더불어민주당에서 먼저 불었다. 이철희 의원의 불출마 선언이 ‘나비효과’가 돼 당에 물갈이 바람을 몰고 있다. 민주당 내에서 10명 정도가 불출마 의사를 밝혔거나 불출마를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당은 신인 등용문을 넓히기 위해 현역 의원들의 경선 감점 폭을 더 늘려 평가 결과 하위 20%에 해당하는 의원들에게 20% 감점을 주기로 했다.

불출마 의사를 밝혔거나 검토 중인 의원이 10명(숫자는 유동적)이라고 가정한다면 이들을 뺀 현역 118명이 평가 대상이고 이 가운데 하위 20%에 포함돼 20%의 감점을 받는 의원은 23명이다. 치열한 경선전에서 20% 감점은 공천 배제나 마찬가지라는 게 의원들의 반응이다.

교체 폭은 불출마 의원(10명)과 공천 배제 23명을 합해 모두 33명에 이른다. 민주당 현역 의원 네 명 중 한 명(25.8%)에 해당한다. 불출마 선언 의원이 더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그런 만큼 실제 물갈이율은 이보다 훨씬 높을 것으로 관측된다.

자유한국당도 총선기획단(단장 박맹우 사무총장)을 출범시키면서 총선 채비에 나섰다. 다만 당 차원의 공식적인 ‘경선 룰’은 발표하지 않고 있다. 황교안 대표가 던진 ‘보수 대통합’ 문제가 어떻게 가닥이 잡힐지 가늠할 수 없는 상황에서 물갈이 그림을 그리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주당이 물갈이로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마당에 한국당도 이를 피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당장 중진 용퇴론, 험지 출마론이 터져 나오고 있다.

김태흠 의원은 영남권과 서울 강남권 3구에서 3선 이상 지낸 중진 의원들이 솔선수범해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거나 수도권 험지에 출마하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한 중진 의원은 “친박 주구들이 자신들은 희생할 생각은 하지 않고 쇄신파 행세를 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당 신정치혁신특위 위원장을 맡고 있는 신상진 의원은 대선 주자들에게 수도권 출마를 권유했다. 그는 “수도권이 지금 많이 어렵다”며 “인지도가 높고 비중 있는 분들이 결단해 국민에게 감동을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현재 홍준표 전 대표는 경남 밀양·의령·함안·창녕, 김태호 전 경남지사는 합천·산청·함양·거창, 김병준 전 비상대책위원장은 대구 지역 출마를 저울질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신 의원은 한국당 ‘물갈이’가 최대 50%까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 역대 총선, 30~50% 교체…물갈이율 높은 당이 승리

총선만 되면 인적 쇄신이라는 이름으로 물갈이 경쟁을 벌이는 이유는 뭘까. 기성 정치인들에게 씌워진 정쟁과 구태 이미지를 일신할 필요가 있다. 참신한 새 인물을 등용해 유권자들의 기성 정치권에 대한 불신과 반감을 누그러뜨리자는 전략이다. 이렇게 해서 물갈이율이 마치 개혁의 척도인 것처럼 여기는 정치 풍토가 형성됐다.

실제 역대 총선에서 물갈이율이 높은 정당이 승리를 거뒀다. 2016년 20대 총선만 하더라도 현역 33.3%를 교체한 민주당이 23.8%에 그친 당시 새누리당(한국당 전신)에 압승했다. 2012년 19대 총선 때는 반대로 현역 의원 절반 가까이(47.1%)를 물갈이한 새누리당이 민주통합당(37.1%)을 이겼다.

신진 인사 영입 경쟁이 본격화한 것은 1996년 15대 총선 때다. 핵심 키워드는 정치권 세대교체였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자신과 대립했던 이회창 전 국무총리를 선거대책위원장으로 발탁했다. 재야인사인 김문수·이재오·이우재 전 의원이 신한국당의 ‘영입 1호’로 발표됐다.

재야인사를 발탁한 것은 새정치국민회의와의 수도권 경쟁에서 밀리지 않겠다는 포석이었다. 실제 총 96석인 수도권에서 신한국당은 54석을 차지해 30석을 얻는데 그친 국민회의를 따돌리는 성과를 거뒀다.

‘모래시계 검사’인 홍준표 전 의원과 당시 30대인 김영춘 현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새 피’로 수혈됐다. 김대중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총재는 천정배 의원과 신기남 전 의원, 정동영 의원 등 쇄신파로 불리는 ‘천·신·정’과 추미애 의원, 김한길 전 의원 등을 영입했다. 신한국당의 색깔론 공세에 대비해 군 출신의 임동원·천용택 전 국정원장 등도 수혈했다.

2000년 16대 총선 때 한나라당은 선제적인 물갈이를 단행해 김윤환·이기택·신상우 전 의원 등 다선 중진을 물러나게 했다. 그 대신 오세훈 전 서울시장, 원희룡 제주지사, 임태희 전 대통령 비서실장 등 신진 인사들이 대거 들어왔다.

새정치민주당은 김대중 전 대통령 핵심 측근인 권노갑 고문이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물갈이 공천의 길을 열었다. 권 고문을 비롯한 동교동계 중진이 대거 물러나고 우상호·이인영 의원과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 등 ‘386 운동권 인사’들이 정치권에 진입했다.

2004년 17대 총선 때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풍’을 탄 ‘386 탄돌이’들이 대거 정치권에 입성하면서 초선 비율이 71.1%(108명)에 달했다. 이들이 각자 자기 목소리를 키우는 바람에 ‘108번뇌’라는 말이 회자되기도 했다.

2016년 20대 총선에서 민주당은 게임업계(웹젠) 대표인 김병관 의원, 고졸 출신으로 ‘유리 천장’을 깨 화제가 됐던 양향자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 원장 등 운동권 이미지를 상쇄할 인사들을 두루 영입했다. 내년 21대 총선 화두는 젊은 피 수혈이 될 것 같다. 민주당은 비례대표에 20~30대를 대거 영입할 계획이다.

◆ 물갈이, 계파 싸움과 ‘내 사람 심기’ 수단 되기도

물갈이가 다 긍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아니다. 계파 싸움과 유력 정치인의 ‘내 사람 심기’ 수단이 되면서 후유증을 낳기도 했다. 2008년 18대 총선 때 당권을 장악한 한나라당 친이(친이명박)계가 친박계를 공천에서 대거 배제하면서 갈등이 심화됐다.

김무성 의원 등 친박계 인사 10여 명이 낙천됐다. ‘친박 학살’로 불리며 박근혜 전 대통령은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며 불편한 심기를 보였다. 낙천된 서청원 의원 등 친박계가 만든 친박연대는 14석을 얻었다.

2012년 19대 총선 때는 반대로 친박계가 반격에 나섰다. 친이계가 대거 공천에서 탈락해 ‘친이 학살’이라는 말이 나왔다. 20대 총선에선 ‘진박(진짜 친박) 공천’이 논란이 되면서 ‘옥새 파동’까지 겪었다. 이런 친박-비박 갈등이 새누리당의 참패를 불렀다.

총선 때마다 30~50%에 이르는 물갈이가 이뤄졌다고 해서 정치가 발전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새 인물도 정치권에 들어오면 금세 ‘헌 인물’이 되는 것이 우리 정치 풍토다. 후진적인 정치 관행과 문화를 그대로 둔 채 단순히 얼굴만 바꾼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물이 오염됐는데 물고기만 바꾼다고 해결될 수 없다는 얘기다.

선수(選數) 중심, 당론 중심으로 이뤄지는 정당 정치 문화와 계파 정치, 현역 기득권을 공고히 하는 선거 시스템이 유지되는 한 아무리 똑똑한 초선이 들어와도 개별 입법기관으로 제 기능을 하기보다 또 다른 ‘거수기’를 만들 뿐이라는 지적이다.


yshong@hankyung.com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50호(2019.11.11 ~ 2019.11.17)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