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코인 A to Z]
-IBM과 세계 최대 해운사 머스크의 합작품…글로벌 공급사슬에 ‘신뢰’ 부여
현실이 된 블록체인 ‘트레이드렌즈’
(사진) 비탈릭 부테린 이더리움 개발자

[오태민 크립토 비트코인 연구소장, ‘스마트 콘트랙 : 신뢰혁명’ 저자] 이더리움 가격이 침체 국면인 가운데 비탈릭 부테린 이더리움 공동 개발자가 투자자들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는 9월 블룸버그통신과의 인터뷰에서 향후 암호화폐 가격이 1000배나 오르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교육받은 이들 대부분이 블록체인에 대해 들어봤는데 그들에겐 이제 블록체인이 흥미로운 이야기라기보다 실제로 사용되는 현실이 돼야 하기 때문이라는 근거를 달았다. 예전 같으면 가격이 폭등해야 했을 뉴스들에도 암호화폐 시장은 조용하기만 했다. 블록체인의 효용성이 과장됐다는 것을 대중이 알아 가고 있다는 논리와 부테린 개발자의 이날 발언은 호응한다. 암호화폐 공개(ICO)는 스타트업들에 장밋빛 청사진만으로 자금을 모을 수 있는 기회였지만 기대만큼 확실한 실체가 보이지 않으면 ICO 자체가 사기라는 주장이 거세지기 마련이다.



실체 없는 ICO는 결국 ‘사기’ 될 수도

비트코인이 암시장의 유사 화폐라는 비난을 받는 동안 이더리움은 ‘블록체인 2.0’이라는 트레이드마크를 내세워 제도권으로부터도 찬사를 받아 왔다. 인공지능(AI)·빅데이터와 함께 블록체인을 4차 산업혁명의 주역으로 꼽는 이들은 대부분이 이더리움을 옹호하는 이들이었다. 블록체인 기술이 사실은 별로 쓸모가 없다는 회의론이 우세할 때 비트코인보다 이더리움이 더 큰 타격을 받는 이유다.

그런데 블록체인의 기술적 효용성에 대한 본격적인 1차 검증은 이더리움이 아니고 IBM과 세계 최대의 해운사인 머스크가 공동으로 만든 ‘트레이드렌즈’를 통해 이뤄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IBM과 머스크는 지난 8월 트레이드렌즈의 출범을 알리면서 블록체인이 글로벌 공급사슬 관리를 혁신할 것이라고 홍보했다. 12개월 이상 진행된 테스트에서 블록체인이 최대 40%의 운송 기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고 한다. 주로 서류상의 오류 때문에 발생되는 선적이나 통관의 지연을 블록체인 기술로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100여 개의 회사들이 참여하고 있고 전 세계 20개의 주요 항구와 연계됐고 하루 100만 건의 이벤트를 처리한다. IBM 산업 플랫폼 SVP(Software Value Plus)의 브리짓 반 크랠링겐 IBM글로벌인더스트리 본부장은 “연간 4조 달러의 물량을 처리하는 글로벌 공급 사슬을 관리하는데 블록체인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한편 크랠링겐 본부장은 트레이드렌즈의 개발에 왓슨의 사업적 실패에서 얻은 교훈이 반영됐고 그 무엇보다 사용자 편의를 우선순위에 두고 설계했다는 취지의 발언도 했다. IBM의 슈퍼컴퓨터 왓슨은 어느 모로 보나 선도적이었지만 사업적으로는 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IBM은 남보다 앞서 유망 기술에 뛰어들지만 유망 기술에서 사업적 성공을 거두지 못하는 기업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들어 왔다.

해운업 관계자들은 트레이드렌즈가 글로벌 공급망을 혁신할 것이라는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서류 작업 때문에 일어나는 선적 지연이 운송 기간 전체에서 비율이 높지 않은데다 굳이 블록체인이 아니더라도 서류의 전자화를 통해 개선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자문서교환(EDI)을 활용하면 운송 중에도 항만이나 세관에 미리 서류를 발송할 수 있다. 또 한 번 기록하고 나서 변경하기 어려운 블록체인보다 e메일과 팩스를 주고받으며 구두 협의를 통해 유연하게 대응하는 기존의 방식을 쉽게 떠나려고 하지 않을 것이라는 논리도 설득력이 있다.

게다가 암호화폐 진영은 글로벌 기업들이 주도하기 때문에 트레이드렌즈는 진정한 의미에서 블록체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블록체인은 중앙 서버를 관리하는 특별한 지위가 없는 네트워크인데 트레이드렌즈는 IBM과 머스크가 이미 주도권을 가지고 시작한다. 그러면 블록체인을 활용해 저장된 데이터를 쉽게 개·변조할 수 없게 만들었다고 해도 입력 단계에서는 특별한 권한이 누군가에게 주어지므로 그 특별한 누군가가 타락하거나 권한을 남용하는 것을 차단할 수 없다는 논리다.

특별한 노드 없이 평등한 노드들만으로 구성된 순수한 의미의 블록체인은 활용 범위가 제한적이다. 화물 내용, 보관 상태, 운반 중의 온도, 화주의 변경, 계약 일자 및 금융 정보 등 산업에서 필요한 데이터를 담으려면 블록체인의 이상은 어느 정도 양보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이더리움 같은 공개 블록체인을 활용해도 마찬가지다.

트레이드렌즈가 당장 글로벌 공급 사슬망 관리에 획기적인 변화를 줄 수야 없겠지만 IBM과 머스크의 야심을 서류 전자화 정도로 깎아내리는 것은 블록체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블록체인은 효율보다 신뢰 솔루션이다. 하던 일을 더 잘하게 하는 기술이라기보다 불가능했던 거래를 가능하게 해주는 해결책이다.

정보의 입력 단계에서 잘못된 정보를 심는다면 블록체인은 오류를 쉽게 고칠 수 있는 전통적인 데이터베이스보다 오히려 더 위험하다는 주장은 타당하다. 하지만 혁신 기술은 생태계의 동시 발전이라는 맥락에 놓고 저울질해야 한다.

전기차나 수소차가 일반화되려면 충전소가 보급돼야 하는데 충전소는 거대한 먹이사슬이 등장해야만 확산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중국 칭다오 스캔들처럼 글로벌 공급 사슬망은 몇 단계의 서류 윤색만으로 존재하지 않는 실물을 만들어 내는 사기에 취약하다.

기술의 발전으로 거의 모든 과정에 센서가 개입하기 시작했다. 사물인터넷(IoT)과 AI도 블록체인 플랫폼에서 통합된다. 사람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여러 단계의 센서들이 교차 확인하면서 패턴에서 벗어난 정보들을 AI가 감지해 미리 알려준다면 블록체인은 글로벌 공급망을 하나의 거대한 신뢰 네트워크로 만들 수 있다.. 금융이나 정부, 법치의 실패 때문에 지금까지 소외됐던 이들이 생산자나 소비자로서 글로벌 공급 사슬의 새로운 주역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현실만으로 미래를 단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그렇게 놓친 기회를 회복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돋보기] 실물과 상관없이 거래될 수 있는 금융거래의 맹점 ‘칭다오 스캔들’
2014년 중국의 칭다오항은 국제 원자재 거래 시장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중국의 국영기업이 항구 창고에 보관하고 있는 알루미늄 등 40만 톤의 금속을 담보로 여러 차례 중복 대출을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스위스 원자재 거래 업체 머큐리아는 중국 기업이 제시한 서류를 근거로 씨티그룹으로부터 대출을 받았다. 씨티그룹이 이로 인해 머큐리아에 손해를 본 금액은 2억4000만 달러에 달한다. 두 회사는 이후 국제 소송에 휘말렸다가 2016년에야 합의에 이르렀다. 칭다오 스캔들로 발생한 중국 금융회사의 피해액은 알려지지 않았다.

칭다오 스캔들의 여파로 런던금속거래소(LME)가 실제의 보관 여부를 모니터하는 ‘LME 실드 시스템’을 제안하기까지 했지만 사실 원자재 담보 중복 대출은 암암리에 행해지는 관행이기도 하다. 보관 중인 원자재를 금융회사에 팔았다가 다시 되사는 식의 금융거래들이 몇 차례 반복돼도 실물이 창고 밖으로 나올 필요가 없는 맹점 때문이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191호(2018.09.17 ~ 2018.09.23)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