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형극회 조용석 대표, 조윤진 실장 부녀

1947년생. 42년 동안 KBS 방송 인형 담당. KBS, MBC, TBS, EBS, SBS TV 등 각 방송사의 인형극 프로그램 제작, 서울올림픽 마스코트 ‘호돌이’제작. ‘조용석의 줄 인형 콘서트’ 및 다수 공연 기획 및 연출, 출연. 현대인형극회 대표(현). 1976년생. 성신여대 공예과 졸업. 성균관대 대학원 공연예술학과 수료. 2005년 ‘난타’ PMC 프로덕션과 함께 ‘PUPPET CITY’ 공연 연출 및 주연배우. 2006년 영국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A KOREAN FANTASY’ 기획 공연 연출. 저서 ‘탈인형 제작법과 연기론’ 등.조용석 대표는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 인형극 역사의 산증인이다. TV 인형극으로 시작해 무대극 공연에 이르기까지 근 50여 년 동안 인형극에 열정을 쏟아 온 그에게 딸 윤진 씨는 가장 아끼는 후계자이자 든든하기 짝이 없는 훌륭한 동료다.매주 수요일 오전이면 경기도 국악당에는 귀여운 손님들이 옹기종기 모여든다. 지난 4월부터 시작된 상설 국악 인형극 ‘피리인형 떼루떼루’를 보러 온 어린이 손님들이다. 현대인형극회 조영석 대표가 예술감독을, 조윤진 기획실장이 연출을 맡은 ‘피리인형 떼루떼루’는 가야금 대금 피리 등 국악기들을 소재로 한 인형극으로 어린이들에게 인형극을 통해 우리 국악기에 대한 친숙함과 재미를 알려주는 국악 인형극이다. 한동안 매진 행렬을 계속할 정도로 어린이들에게 인기 만점인 이 인형극을 만든 곳이 바로 우리나라 최고의 인형극단이라고 할 수 있는 현대인형극회다. 그리고 현대인형극회의 대표를 맡고 있는 이가 바로 1960년대 TV 방송이 개국한 이후 줄곧 한국의 방송 인형극을 앞장서 이끌어 온 조용석 대표와 그 딸인 조윤진 실장이다. 이들 부녀를 만나기 위해 찾은 대기실 안에는 각종 인형극 소품들을 든 인형극단원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조윤진 실장은 유독 더 분주한 모양새다. 인형 점검에 무대 음향, 배경 점검에 이르기까지 연출자인 그녀의 눈길을 필요로 하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연출자이긴 하지만 인형을 만든 제작자이자 무대 위에 올라 직접 공연도 하는 연기자이다 보니 바쁠 수밖에 없다. 카리스마 있게 무대에 오르기 위한 준비를 하나하나 점검해 가는 그녀를, 같은 동료 연기자이자 이번 작품의 예술감독을 맡고 있는 조용석 대표가 믿음직스럽다는 듯 지켜보고 있다.“까마득한 후배이고 또 딸이긴 하지만 매번 감탄하곤 해요. 아이디어도 넘치고 또 그 아이디어를 구체화하는 힘도 남다르죠.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잘해 나가고 있기 때문에 따로 당부할 것이 없을 정도예요.”(조영석)거의 50년 동안 인형극에 몸담아 온 조용석 대표에게 조윤진 실장은 믿음직스러운 동료이자 인형극의 열정을 이어갈 든든한 후계자인 셈이다.조용석 대표가 인형극에 몸담게 된 것은 지난 1961년의 일이다. “당시 큰아버지가 신문기자셨는데 TV 방송이 개국하면서 방송에서 어린이 인형극을 필요로 하는 것을 보고 당시 중학생이었던 아버지를 인형극의 세계로 이끄셨다고 해요. 아버지뿐만 아니라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고모 등 6남매 전부가 인형극에 매달리게 되셨다고 하더군요. 그게 바로 현대인형극회가 창단하게 된 계기라고 할 수 있어요.”(조윤진)“그때만 하더라도 인형이라고 해 봐야 바가지에 그림을 그리고 색깔을 입힌 인형들이 고작이었죠. 인형을 만드는 기술도 인형을 조종하는 기술도 이렇다 할 것이 없었죠. 결국 직접 하나하나 공부해 나가면서 기술이나 제작 노하우를 터득할 수밖에 없었답니다.”(조용석) 그 때문에 현대인형극회의 지난 역사는 한국 방송 인형극의 역사나 다름없다. 아직도 30~40대 장년층이라면 한번쯤 생각날 KBS 인형극 ‘부리부리박사’를 비롯해 ‘짱구박사’ ‘TV유치원’ ‘혼자서도 잘해요’ 등의 어린이 프로그램에서 어린이들을 웃기고 울렸던 인형들은 모두 현대인형극회의 작품들이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 마스코트인 ‘호돌이 캐릭터를 제작, 총감독한 것도 바로 그다. 조용석 대표의 아내도 그와 함께 인형극을 연기했었다.“어려서는 늘 바쁘신 부모님 때문에 좀 많이 섭섭하기도 했죠.(웃음) 그래서 나만큼은 인형극을 하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하기도 했었고요.”(조윤진)하지만 인형극 집안의 딸답게 어려서부터 인형극에 대한 자질은 확실히 남달랐다. 중학생 때부터 아버지와 함께 방송사를 드나들며 방송 인형극을 돕기도 했고 고등학교 때는 학교 축제에서 20분짜리 짧은 인형극을 연출하기도 했다.“하지만 직업으로 삼고 싶지는 않았어요. 아버지도 딱히 권유하지 않으셨고요. 대신 넌지시 미술을 해 보지 않겠느냐고 하시더군요. 미대를 나와 웹 디자이너로 일하게 되면서 생각이 바뀌었죠.”(조윤진) 웹 디자인은 너무나 잘하는 사람이 많았다. 자신이 아무리 잘한다고 하더라도 최고가 될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인형극은 달랐다. 인형극은 그녀가 태어나면서부터 그녀의 곁에 있었던 그녀의 몫이었다.“인형극은 이미 부모님이 기반을 다 닦아 놓으신 거잖아요. 그러니 열심히만 하면 최고가 될 가능성이 있을 것 같았어요. 이거다 싶었지요. 인형극을 피해 열심히 도망 다니다 결국은 인형극으로 되돌아온 셈이죠.(웃음)”(조윤진) 다른 사람의 권유나 어쩔 수 없는 흐름이 아닌 자의로 선택한 길이었던 만큼 더 열정을 가질 수 있었다. 인형극을 더 잘하기 위해 대학원에서 공연예술도 공부했다. 미대에서 공예를 전공했던 것도 인형 제작에 큰 도움이 됐다. 그렇게 돌고 돌아 인형극을 인생의 항로로 정할 때까지 그녀의 아버지는 늘 그녀의 선택을 존중해 줬다. 그런 아버지가 너무나 고마웠다.조윤진 실장은 늘 새로운 인형 개발이라든가 새로운 표현 방식을 연구하려고 애쓴다. 뮤지컬이나 콘서트, 국악 공연 등 다른 장르와의 접목을 통해 보다 많은 이들에게 인형극에 대한 매력을 알리려고 애쓰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 덕분에 2000년대 들어 TV 방송 인형극이 쇠퇴한 이후에도 현대인형극회는 ‘띠용이와 떠나는 환경캠프’, ‘조용석 줄인형 콘서트’, ‘돌아온 부리부리 박사’ 등 각종 기획 공연을 성공시키며 탄탄대로를 걸어오게 된다.또한 홍콩 일본 싱가포르 러시아 폴란드 이스라엘 뉴질랜드 호주를 비롯한 수많은 해외 공연을 했으며 2006년에는 한국의 인형극 사상 최초로 영국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 참가해 어셈블리 볼룸 극장에서 한 달간의 기획 공연을 성황리에 진행하기도 했다. “해외에 공연을 가면 느끼는 점이 많죠. 박장대소하며 감탄을 금치 않는 관객들을 보면 새삼 우리 손으로 만든 인형극에 자부심도 느끼게 되고요. 하지만 부러운 점도 많아요. 인형극을 하나의 예술 장르로 여기는 문화 풍토라든지, 인형극 전용 극장이 있다든지 하는 점들이요.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부러운 건 바로 인형극 전문가를 양성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만들어져 있다는 것이죠.”(조용석)외국처럼 인형극을 하나의 예술 장르로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대학이 아직 국내에는 없다. 그래서 이들 부녀의 꿈은 언젠가 인형극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대학이 생기는 것, 그리고 그곳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것이다. “아, 또 있어요. 지난 1960년대부터 만들어 온 수많은 인형들을 전시할 수 있는 인형 박물관을 만들고 싶어요. 이대로 우리 창고에만 묵혀 두기에는 너무 많은 분들의 추억과 함께하는 인형들인데, 아깝잖아요. 우리 인형극의 역사와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긴 인형 박물관, 여러분도 기대해 주세요.”(조윤진)김성주·객원기자 helieta@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