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IT 업계에 초대형 ‘쇼크’가 이어지는 까닭

광파리가 박병엽 팬택계열 부회장한테 종종 하는 말이 있습니다. “다시 태어나면 디바이스 사업은 하지 마세요.” 웃으면서 말하지만 그게 제 진심입니다. 휴대전화와 태블릿 PC 등을 ‘디바이스’라고 하는데 참 어렵습니다.

이 바닥에서는 “졸면 죽는다”는 말이 철칙입니다. 그러니 편히 잘 수 없습니다. 박 부회장은 휴일이나 휴가를 잊은 지 오래됐습니다. 지켜보기가 안쓰러울 정도죠.

모토로라가 구글에 팔렸다는 소식을 듣고 가장 많이 놀란 사람은 아마 박 부회장이 아닐까 합니다. 팬택계열은 모토로라에 페이저(일명 삐삐)를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으로 공급하며 성장했습니다.

팬택계열에는 잊을 수 없는 기업입니다. 모토로라는 슬림폰 ‘레이저(RAZR)’가 잘나갈 때 잠깐 졸았습니다. 후속 모델을 제때 내놓지 못해 곤경에 빠지기 시작했죠.
[광파리의 IT 이야기] 디바이스 시장에선 “졸면 죽는다”
졸고 있는 모토로라에 갑자기 철퇴가 가해졌습니다. ‘아이폰 철퇴’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후속 모델을 내놓지 못해 헤매던 모토로라는 아이폰이 나오자 혼비백산했습니다.

안방인 미국 시장에서 ‘아이폰 돌풍’이 확산되면서 판매 대수가 곤두박질하고 적자가 눈덩이처럼 커졌습니다. 안드로이드폰에 집중한 덕분에 파산은 면했지만 분사를 거쳐 팔리는 신세가 됐습니다.

모토로라만 졸았던 것은 아닙니다. 노키아도 졸고 LG전자도 졸았습니다. 노키아는 세계 최대 휴대전화 메이커로서 잘나갔습니다. 시장점유율이 40%를 넘나들었고 20%대의 높은 이익률을 기록했습니다.

2위 삼성전자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였죠. “도대체 노키아의 비결이 뭐야?” 이랬죠. 노키아는 애플이 아이폰을 내놓았을 때 “설마 별일 있겠어?” 이렇게 방심했던 것 같습니다.

졸았다고 봐야겠죠. 노키아는 아이폰에 대적할 만한 휴대전화를 좀체 내놓지 못했습니다. 모토로라가 ‘드로이드’를 내놓고 삼성이 ‘갤럭시S’를 내놓으며 애플에 맞선 상황에서도 노키아는 이렇다 할 신제품을 내놓지 못했습니다. 결국 자체 운영체제(OS) 심비안을 버렸고 미사일 맞은 전투기마냥 추락하고 있습니다. 이젠 노키아가 팔릴 것이란 루머도 이상하지 않게 됐습니다.

휴대전화 시장만 격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도는 덜하지만 컴퓨터 시장에도 이상 징후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난해 델을 제치고 세계 2위까지 올랐던 대만의 에이서는 4위로 밀려났습니다. 반면 만년 4위 중국의 레노버는 무슨 연유에서인지 급성장해 에이서를 제치고 3위에 올랐습니다.

에이서와 레노버의 역전…. 레노버는 2005년 IBM으로부터 PC 사업부문을 인수한 후 에이서를 제치려고 무척 애를 썼지만 따라잡지 못했습니다. 최근 2, 3년 동안 에이서가 넷북으로 돌풍을 일이키는 바람에 판매 대수 기준 점유율에서 격차가 크게 벌어졌죠.

그런데 넷북 돌풍이 잠잠해지고 레노버 안방인 중국에서 컴퓨터 수요가 부쩍 늘어나면서 상황이 역전됐습니다. 단지 넷북 때문일까요. 에이서의 추락이 심상치 않습니다.

HP가 자체 운영체제(OS) 웹OS를 탑재한 태블릿·스마트폰 사업을 포기하고 PC 사업부문을 떼어낸다는 소식도 충격적입니다. 설마 ‘PC판 노키아’가 되는 건 아니겠죠? 하지만 노키아와 마찬가지로 절대 무너질 것 같지 않던 HP가 아이폰·아이패드 등장 후 흔들리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모토로라 쇼크’, ‘노키아 쇼크’, ‘에이서 쇼크’, ‘HP 쇼크’…. 디바이스 사업, 참 어렵습니다.

김광현 한국경제 IT 전문기자 khkim@hankyung.com
블로그 ‘광파리의 글로벌 IT 이야기’운영자·트위터 @kwang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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